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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동화] 농장으로 가는 길 / 이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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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0회 작성일 23-12-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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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으로 가는 길



“할머니 할머니”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집안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할머니, 할머니.”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재하니?”

한참 만에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 그 시간이 무지무지 길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얼굴이 대문 밖으로 보일 때까지는 또 무지무지 긴 시간을 느꼈습니다.

“할머니, 누나. 형 왔어요?”

얼굴이 상기되고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우스워 보였는지 할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급한데 할머니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할머니이~”

나는 소리를 높였습니다.

“조금 전에 갔지.”

“엥?”

나는 그 순간 머리가 핑 돌았습니다. 이럴 리가. 한 번도 나를 두고 먼저 떠난 적이 없는 누나와 형이었는데. 나는 앞이 캄캄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재하야. 괜찮아?”

같이 온 준철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일으키려 합니다. ‘조금 전이라 했지. 지금 빨리 뛰어가면 누나와 형을 따라잡을 수 있겠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나는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재하야. 재하야.”

할머니 소리를 등에 매달고 나는 그냥 달렸습니다. 한참 달리는데 준철이가 따라오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동네를 벗어나 꼬불 고갯길로 접어들었는데도 준철이는 같이 가자고 소리 지르며 따라왔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 빨리 달렸습니다. 꼬불 고개만 넘으면 누나와 형이 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꼬불 고개는 왜 이렇게 힘이 들어.”

꼬불 고개를 넘는 사람치고 이런 말 안 하는 사람 없었는데 나는 가뿐히 넘었다는 느낌입니다. 꼬불 고개는 마을과 새로 난 신작로를 가르는 마을의 경계선입니다. 농장이나 산림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닐 뿐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는 고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빠ㆍ엄마 농장으로 가려면 이 꼬불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꼬불 고개를 넘은 나는 신작로에 들어섰습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쭉 뻗은 신작로. 실망감이 확 다가왔습니다. ‘아, 누나, 형은 생각보다 더 앞에 가고 있구나.’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나는 ‘조금만 더’라고 외치며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준철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분명 꼬불 고개 마루까지 들렸던 준철이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봤습니다. 준철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준철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신작로 위로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뿌연 먼지가 길 위로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어째. 끄끄끄’

갑자기 목이 턱 막혔습니다.

‘아니야. 무서울 거 없어. 저 구부러진 곳만 지나면 누나, 형이 보일 거야.’

주춤했던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생각 하나가 스쳐 갔습니다. ‘어, 준철이가 나를 못 따라왔네. 준철이가.’ 준철이는 우리 3학년에서 가장 잘 뛰는 친구입니다. 달리기 1등은 언제나 준철입니다. 운동회 때나 체육시간 달리기에서 3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늘 1등 하는 준철이가 부럽기만 합니다. ‘뭐야. 내가 준철이보다 잘 뛴다는 거야 뭐야.’ 준철이보다 잘 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어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와 뭐야. 내가 우리 학년에서 제일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된 거 아니야?’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내 실력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신기하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두려움에 멘 목이 어느새 스르르 풀어졌습니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는 날입니다. 친구들이 자주 쓰는 ‘재수가 없는 날’이 오늘입니다. 농장에 계신 아빠, 엄마를 2주 만에 만나는 날. 너무 좋아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마지막 체육시간. 평균대에서 나는 너무 덤벼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가볍게 잘 넘어가던 평균대. 오늘은 가다 떨어지고 가다 미끄러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평균대 세 개 이어 놓은 데를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집에 가도 좋다는 선생님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계속 떨어집니다. 평균대에 떨어지면 대기 줄 뒤로 가서 순서를 기다려야 합니다. 빨리 집에 가서 누나와 형과 같이 농장에 가야 하는데 시간은 자꾸 흘러갑니다.

‘으이그’

속이 부글부글 탑니다.

“재하야, 오늘 늦으면 안 돼. 우린 오늘 수업이 빨리 끝나거든.”

아침에 등교할 때 하던 누나의 목소리와

“재하야. 너 늦게 오면 우리 먼저 간다.”

늘 나를 골탕먹이려드는 사촌 형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 누나 목소리와 합해 요란하게 내 귓가에서 울렸습니다.

거의 마지막이 되어 평균대를 통과했습니다.

“오늘 못한 사람은 다음 시간에 다시 해 보겠어요.”

체육 선생님의 이 말이 나오기까지 시간은 또 엄청나게 지나갔습니다.

교문을 향해 달려 나오는데 준철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철이는 일찌감치 평균대를 넘었습니다. 준철이는 우리 집하고 같은 방향이라서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재하야. 너 오늘 농장 가는 날이지?”

“응. 그래. 알면서 왜 물어?”

아직 땀이 이마에서 다 마르지 않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아니, 그냥. 너랑 놀려고”

“형이 나 늦게 오면 떼놓고 간대. 지금도 늦었단 말이야.”

내가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하자 준철이가 따라왔습니다.

우리 집은 지난겨울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니 이사를 갔다기보다 아빠, 엄마가 가셨습니다. 약 4킬로나 되는 산속에 약초농장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버지네도 가셔서 시작한 약초농장. 학교 다니는 우리들(5학년 누나, 4학년 사촌 형)은 할 수 없이 집에 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 엄마를 만나러 가기로 했습니다.

먼 친척 할머니가 오셔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일주일마다 가던 농장 가는 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농장 일에 바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우리를 미처 데리러 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주일에 한 번 농장 가는 걸로 했습니다. 나는 안 된다고 떼쓰고 울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린 나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충분히 아니까요. 2주일째 금요일이 되면 우린 종일 들뜨고 신나서 좋아죽습니다. 나는 밤에 잠도 안 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낼 정도입니다.


신작로 위에 부는 바람이 점점 세졌습니다. 길 위로 하얀 먼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시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기후에 대한 영상을 볼 때처럼 마른 사막에 부는 바람 같았습니다. 와락 무서움이 내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목이 턱 막힙니다. 목소리가 안 나오고 꺼억꺼억 소리가 납니다. 숨을 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곧게 뻗은 신작로 끝까지 달리고 꺾어진 신작로까지 달렸습니다. 눈 씻고 봐도 그 길에도 누나, 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감과 허탈한 마음이 정신을 아찔하게 합니다.

오늘따라 자동차도 한 대 지나가지 않다니, 재수 없는 시간은 계속되나 봅니다. 이 신작로는 작년에 산림청에서 자작나무숲 단지를 만들 때 만든 도로입니다. 하루에 작업 트럭 몇 대 드문드문 다니는 길입니다. 그리고 아빠가 우릴 자동차에 태워 집과 농장을 번갈아 다니는 길입니다. 사람이 이 길을 걸어 다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딱 한 번 아빠가 출장 가서 누나와 형과 함께 걸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땐 서로 재미있게 장난도 하며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매우 위험한 길인 것을 농장에 가서 알았습니다. 다신 너희들끼리 그 길을 다니면 절대 안 된다고 아빠가 엄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어른들 얼굴이 모두 하얘진 걸 보고 우리는 엄청 겁을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2주일 만에 가는 농장. 누나와 형 없이 할머니와 집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모든 걸 잊어버릴 만큼 나에게는 심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휘이익 씨잉”

그때 매우 센 먼지바람이 나를 덮쳤습니다. 작은 모래들이 귀와 얼굴을 따끔하게 때리고 지나갑니다. 나는 몸을 돌려 웅크리며 주저앉았습니다. 내가 뛰어왔던 신작로길이 뽀얀 안개 속같이 아득하게 보였습니다.

‘되돌아갈까? 아니야.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조그만 더 가면 분명히 누나. 형이 보일 텐데.’

먼지바람을 뚫고 나는 다시 달렸습니다. 뒤이어 끊임없이 날아오는 바람은 내 몸을 강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너 더 못 가. 못 가게 할 거야.’ 바람의 심술에 ‘난 갈 거야. 꼭 갈 거야.’ 이렇게 대꾸하니 곧 누나, 형을 저 길 끝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더 듭니다. 그러자 힘이 다시 생겼습니다.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바람이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헛 울음소리는 계속됐지만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리나무 숲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신작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숲 때문에 바람이 힘을 크게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바람의 세기가 약해지자 불쑥 머릿속에 형이 나타났습니다.

“재하야. 저것 봐. 저 다섯 바위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아니?”

어느 날 아빠 트럭을 타고 이 길을 지나갈 때 사촌 형이 말했습니다.

“뭐가 있는데.”

“저기 가장 큰 바윗덩어리 꼭대기를 보란 말이야. 뭐가 앉아 있잖아.”

형이 가리키는 곳은 집채만 한 다섯 개의 고만고만한 바윗돌이 마치 형제처럼 도란도란 모여 있는 바윗덩어리였습니다. 형 말을 믿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봐도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난 안 보인단 말이야.”

“이그, 그것도 못 보냐~”

사촌 형은 내 머리에 살짝 군밤 한대를 먹였습니다.

“저 바위 항상 사나운 매 한 마리 앉아 있어. 근데 저 매는 신작로를 지나가는 사람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다니까.”

나를 보는 사촌 형 인상이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지며 말했습니다. 그날 사촌 형이 말한 뒤로 나는 다섯 바윗덩어리 비탈을 지날 때마다 그 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려 했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 기억이 살아난 것입니다.

‘저 매가 얼마나 사나운지 알아. 토끼. 두더지. 뱀도 막 잡아 와서 바위에 앉아 먹고 있다니까. 아마 저러다간 아이들까지 잡아 올지도 몰라.’

사촌 형의 말이 너무도 생생했습니다.

이제 곧 다섯 바윗덩어리 아래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소름이 끼쳐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바위 위에도 하늘에도 매 같은 존재는 보이질 않았지만 난 두 손을 머리 위에 펴고 모자처럼 흉내 내며 걸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못 가겠다. 돌아가자’ 이런 생각이 들자 내 생각은 갈팡질팡했습니다. 사실 뿌연 먼지로 아예 길조차 사라진 길을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아직도 조금만 더 뛰어가면 저 끝 모퉁이 돌아 누나, 형 모습이 보일 것 같아 머리카락이 서는 공포 속에서도 나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재재잿 재재잿”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어치 몇 마리가 다섯 바윗덩어리 위에서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뭐야. 매가 아니고 쟤들이란 말이야?’

뜻밖의 상황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헛 울음소리도 탁 멈췄습니다. 사촌 형의 일그러진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을 사실같이 퍼뜨리는 사람은 그 버릇 고약해요. 고쳐야 해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들려준 명작 삼 형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세 형제가 살았는데 키우던 염소가 아들들이 풀을 배불리 먹였는데도 못 먹었다고, 배고프다고 거짓말을 하여 세 아들을 다 쫓아낸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거짓을 사실로 믿은 아버지. 사실을 거짓으로 말한 염소. 그 때문에 불행해진 아버지와 삼 형제 이야기가 사촌 형의 얼굴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흥, 자기도 매를 보지 못해 놓고 나보고 뻥쳤군.’

그러자 심술쟁이 못난이 형이 다시 한번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합니다.

나는 달리던 길을 다시 힘차게 달렸습니다. 점점 힘이 들어 뛰는 속도가 늦어지고 있지만 마음만은 더 열심히 뛰었습니다.

다섯 바윗덩어리 비탈을 지나 모퉁이 길을 꺾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서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누나와 형은 나를 놔두고 먼저 갔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날 기다려야지. 내가 학교에서 늦게 오면 기다렸다가 날 데리고 와야지.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해. 새침데기 누나. 심술탱이 형.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구불구불한 신작로에 서니 여전히 바람은 세게 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 이렇게 오래 혼자 달려본 적이 없었는데. 누나와 형에게 배신당했다는 서러움이 분노로, 무서움으로 섞여 뱃속에서 치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도로가 크게 휘어진 길이 나옵니다. 그곳에 유독 홀로 서 있는 오래된 아카시 나무가 있습니다. 내가 제일 무섭다고 생각했던 장소를 이제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잠시 멈췄던 헛 울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크억크억 소리를 내며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저 아카시 나무가 수상해.”

어느 날인가 나무 심는 인부들이 탄 차를 같이 타고 농장에 가는데 인부 한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인부들이 한 말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져 나옵니다. “저 나무는 벌써부터 죽었는데 저렇게 서 있네.” “불에 탔나. 아주 시커먼 게 흉측해.” “저 긴 전깃줄 봐. 살아 움직이잖아.” “저 나무에는 아마 유령들이 득실거릴 거야.” 인부들이 실제로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땐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들은 말이었는데 그 말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지금 튀어나와 나를 무서움에 꽁꽁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지금 실제 상황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아 도저히 더 갈 자신 없다.’

나는 내리막길 중간에서 뜀박질을 멈추었습니다. 안 보려고 했지만 내 눈은 이미 고목 아카시 나무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나뭇가지에 걸린 긴 전깃줄이 바람에 이리저리 출렁거리며 흔들리는 걸 보며 귀신이 귀신 머리 풀어 헤친 모양이 떠올랐습니다. 왜 저걸 치우지 않을까. 보기에도 무서운데. 오늘같이 혼자 가는 나 같은 사람을 골려주려고 그랬나.

발이 떨어지질 않아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 그러면 앞으로 가야 하는 일만 남았는데 잠시 후면 아카시 고목에 매달린 검은 전깃줄이 문어발처럼 뻗어 나를 휘감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을 만날 것 같습니다. 아 아 아. 난 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엄마, 엄마.”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를 불렀습니다. 눈물, 콧물이 펑펑 마구 쏟아집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으앙으앙 내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자동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 농장 방향에서 오고 있는 트럭이었습니다. 트럭은 구부러진 길을 꺾어 돌면서 뽀얀 먼지바람을 달고 오더니 순식간에 지났습니다. 도와달라고 팔을 흔들 새도 없이 트럭은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꼼짝없이 트럭에 매달려 따라온 먼지 속에 갇혔습니다.

“탁, 타다다닥”

그 순간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깜작 놀라 눈을 비비고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았습니다. 뭔가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물체가 보였습니다. 그 물체는 햇빛에 반짝거리며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서 있던 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습니다. 반짝이는 물체를 주우러 나도 모르게 달려갔습니다. 그 물체는 움푹 패인 길옆으로 굴러떨어지려고 합니다. 은빛 반짝이며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물체를 붙잡기 위해 나도 몸을 날렸습니다. 은빛 물체와 나는 동시에 길옆 웅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건 뭐야. 헬멧이네. 왜 이게 여기에 떨어진 거야.’

내 몸 하나 쏙 들어갈 만한 웅덩이 속에서 헬멧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써 보았지만 어른 헬멧이라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헬멧을 꼭 껴안았습니다. 헬멧 쓰고 일하시던 아빠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 무서움은 왜 생기는 거야.”

언젠가 아빠 따라 깊숙한 산 계곡을 간 적이 있습니다. 계곡 속은 너무나 적막하고 으스스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다가

“무서움이라. 무서움은 왜 생길까.”

하고 오히려 나에게 물어보듯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빠는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계곡은 아빠가 약초를 캐기 위해 자주 다니는 길이야. 난 괜찮은데 너는 왜 무서울까. 내가 보나 네가 보나 똑같은 계곡인데. 무서움이란 자신이 겪은 경험에서 그 느낌이 저장되어 나오는 작용이라고 하지.”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아 아빠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서움이란 실체가 없는 거야. 소문처럼 말이야.”

실체도 없는 일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건 우스운 일 아니겠냐고 아빠는 말해 주었습니다.

“재하야. 네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뭐야, 귀신? 도깨비? 괴물? 검은 그림자? 그런데 너 그거 실제로 본 일 있어? 실제로 봤다는 친구도 있어?”

약초 농장을 경영하면서 수없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때 아빠도 처음엔 두려움에 주저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두려움보다 가파른 절벽, 길 없는 숲속, 사나운 야생 동물을 주의하지 이 산속 무서운 존재가 아빠를 움츠리게 하진 않는다고 했습니다.

“재하야. 생각으로 스스로 무서움을 만들지 마.”

껴안은 헬멧이 주는 매끄러움이 내 맘을 조금 달래 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일어나 신작로에 섰습니다. 헬멧을 쫓다 보니 어느새 고목 아카시 나무를 지나왔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나는 은빛 헬멧을 한 손에 쥐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무서움은 없다. 저 아카시 나무는 늘 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전깃줄은 아직 못 걷어갔을 뿐이고. 아무런 의미 없다. 아카시 나무에서 죽은 사람도 없고 전깃줄이 살아 움직일 리 없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난 지나갔다.’

나는 달리면서 누나와 사촌 형이 이 길을 가지 않았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갔다고 하더라도 도중에 자동차를 만나 타고 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 말 한마디에 무조건 내 생각과 판단으로 뛰어나온 일이 후회되었습니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할머니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드디어 내 눈앞에 꼬불 고개 보단 조금 낮은 오르막길 신작로가 보였습니다.

‘저 고개 넘으면 농장이다.’

나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오랜 시간 달려 지쳤는데 다리에 다시 힘이 생겼습니다. 단숨에 나는 고갯마루까지 올라섰습니다.

‘와아~~’

저 아래 우리 농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엄마, 아빠.”

갑자기 울음이 터졌습니다. 다시 눈물이 얼굴에 철철 흘러내렸습니다. 이번에는 무서움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 아닙니다.

누군가 고개 아래에서 뛰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아빠였습니다.

“재하야. 재하야. 우리 재하 맞지?”

아빠는 정신없이 뛰어왔습니다.

“아빠”

나는 아빠의 품속에 와락 안겼습니다.

“이런 세상에. 너 혼자 여길 오다니…”

아빠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엄마도 달려왔습니다. 엄마도 나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엄마 아빠 품속이 이렇게 조용하고 따뜻한 줄 처음 느꼈습니다.

“갑자기 고갯마루에 뭔가 번쩍번쩍 대는데 있어 쳐다보았더니 꼭 너 같은 아이가 달려오기에 믿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우리 재하였구나. 흐흑”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습니다. 눈물, 콧물에 먼지까지 범벅이 되어 뽀얀 내 얼굴 위로 엄마의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누나와 사촌 형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누나와 사촌형 얼굴이 처음에는 눈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눈물, 콧물에 하얀 먼지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나와 형이 나를 보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나도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서서 같이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누나와 형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우리 세 남매는 서로 껴안고 한참 울었습니다.

나는 누나와 사촌 형을 따라잡으려 뛰었고, 누나와 형은 나를 따라잡으려고 달려 왔던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