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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소설] 메시아의 낙원 / 최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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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3-12-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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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낙원



낯선 이들이 원고의 아내에게 극렬한 애정 표현을 했다고 해서 그 책임을 왜 제 의뢰인에게 묻는 겁니까? 소송을 제기하려면 그 얼빠진 친구들을 상대로 해야지, 왜 제 의뢰인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첨단 유전공학을 연구하고 이를 널리 전파하기에도 바쁜 제 의뢰인이 이렇게 부당하게 법정에 끌려와야 되겠습니까? 판사님, 본 변호인은 원고 측의 소송 제기가 원천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쌀입니다. 쌀 한 톨의 크기가 수박만 하죠? 이게 제 의뢰인의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업적이죠. 이제 우리는 그저 쌀 한 톨을 푹 삶아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렇게 칼로 썩썩 베어 먹으면 그뿐입니다. 굶주림? 우리 시대에 이르러 그 용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게 누구 덕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제 의뢰인, 조 박사 덕분입니다.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 분이시란 말입니다! 지금 저처럼 피고석에 앉아 계실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아, 아. 좋습니다. 소송의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럼 우선 원고의 주장부터 검토해 보겠습니다.

맨 처음 박사님의 사무실을 스스로 찾아온 건 원고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식’을 팔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죠?

물론, 광고를 보고 오셨겠죠. 박사께서는 실용적 가치가 있는 지식과 독특한 체험을 구입하겠다고 광고를 낸 사실이 있습니다. 이 획기적인 연구를, 인류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박사께서 연구하시는 학문 분야는 ‘기억유전자’라는 것입니다. 편형동물인 플라나리아에게 빛과 전기충격으로 미로 찾기를 가르친 다음, RNA를 뽑아 다른 것에게 주사했더니, 거침없이 미로의 출구를 찾아냅니다. 쥐에게 줄타기를 가르친 다음, 신경세포 핵核의 RNA 염기를 빼내어 다른 쥐에 주사했더니, 역시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박사께서는 바로 이런 방식을 응용하여 실용화하고자 했던 겁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바로 얼마 전 그 연구를 완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강호江湖에 숨어 있는 많은 지식인에게 널리 알려 그들의 지식을 구매하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서 유전자 정보를 읽어 내어 이를 그대로 복제해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주입한다면, 세상은 모두 전문가로 넘쳐날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별다른 수고 없이도 이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행세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지식과 경험을 사고팔 수 있다는 사실, 참으로 경이로운 세상 아닙니까?

그것은 이제 이 세상이 낙원으로 변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낙원이 우리 당대에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 ‘낙원’이라 함은, 죽음도, 늙음도, 슬픔도, 애통함도, 질병도, 이별도 없는 그런 세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죽음이 없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사자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고, 그건 곧 양의 죽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자에게 낙원이 펼쳐진다는 얘기는, 양에게는 그 반대의 세상이 온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낙원입니까? 특정 세력에게만 낙원이라면, 그건 낙원으로서의 의미가 없지요.

성경 예언이 그런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죠? 그렇습니다. 우리 박사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십니다. 성경이 스스로 모순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확신하는 분이십니다. 박사의 연구는 그것이 모순이 아님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구약성서를 함께 읽어 봅시다. 이사야서 제11장을 펼칩시다. 메시아의 왕국에 약속된 낙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아시겠습니까? 이제 이 성경 예언이 우리 시대에 성취되었단 말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전자 조작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죠. 이리를 양처럼 만들고 사자가 풀을 뜯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유전자 조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박사의 연구처럼, 양의 기억유전자를 사자에게 이식한다면, 양의 감성을 지닌 사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겁니다.

이건 획기적인 일입니다. 원고께서도 인정하시지요? 그래서 역사학자이신 원고께서도 기꺼이 박사에게 자신의 역사 지식이 새겨진 그 기억유전자를 팔았던 것 아닙니까?

아, 아, 방금 원고 측이 지적한 그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입니다. 그것이 이 재판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고, 현재까지의 과학적 기술이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미세한 유전자에서 특정한 정보만 떼어 낸다는 것이 아직은 어렵기 때문이죠. 원고께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 중 다른 것까지 본의 아니게 포함될 수 있었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점은 떼어가되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안 된다는 ‘포셔의 논리’와 같습니다. 떡을 만지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사실, 원고께서 주장하는 그 부문은 우리도 좀 더 검토해 보아야 할 사안입니다. 원고의 역사 지식, 곧 기억유전자 정보를 사 간 사람들에게 원고의 다른 기억유전자도 함께 전달되는 바람에, 원고의 사생활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주장은 얼핏 타당해 보입니다.

그것이죠, 유일한 문제가! 특정 정보만 정밀하게 떼어 낼 수 없기에, 인근 정보도 함께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죠. 원고의 역사적 지식보다는 원고의 아내, 그 여배우와의 성性 경험 때문에 그 유전자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주장이, 원고로서는 가능할 것입니다.

원고의 아내는 제법 인기 있는 배우입니다. 당연히 인기 여배우와의 성 경험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원고의 기억유전자가 현재 유전자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일 겁니다.

물론 저들도 원고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으니, 원고의 아내를 볼 때마다 그 달콤한 성 경험을 기억해 내게 되겠죠. 모든 이에게 그 경험이 팔려나가고, 원고의 아내와 성행위를 한 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날 테죠. 그러나 그 때문에 개인의 명예가 존중되지 못한다는 주장은 당치도 않습니다. 개인적 명예라 해도 공익에 우선할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이 희생이라 해도, 사회적 기여를 위해 약간의 개인적 희생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다, 판사님. 이제 제 변론을 정리하겠습니다.

원고는, 제 의뢰인인 우리 박사에게 기억유전자를 판 사실이 있습니다.

박사께서는 당시 세계적인 석학들의 기억유전자를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유전자를 복제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그 전문지식은 순식간에 널리 전파될 것이었습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 수십 년간씩 세월을 소비하던 것을 일순간으로 단축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인류 문명은 급속도로 진전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상업적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원고께서도 흔쾌히 응했고, 원고의 역사 지식이 담긴 기억유전자는 상품화되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고의 다른 기억과 체험들도 함께 이식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아내와의 성 경험이나, 자신의 속마음 깊이 감추어 두었던 비밀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며,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피했습니다. 원고가 불쾌해 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원고는 자신의 성 경험이 상업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파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 의뢰인인 박사께서 일부러 그런 기억유전자까지 함께 이식시킴으로써 상업적 수요를 일으켰고, 그 때문에 자기 아내가 사실상 창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피해를 배상하고 이미 팔려 나간 그 기억유전자들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며 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원고에게 묻겠습니다. 정녕 그 이유 때문입니까? 혹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 예컨대 군 복무시절 자신의 과오로 사망한 동료의 죽음, 그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운 건 아닙니까? 그날 그 오발 사건의 진실이 온 천하에 속속들이 알려질까 두려운 나머지, 문제를 호도해 박사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지요? 진상이 이러할진대, 대체 누구더러 뭘 배상하라는 겁니까? 자신의 과오마저 박사께서 책임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물론, 원고의 기억 분자는 현재 제 두뇌에도 이식되어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원고와 저는 둘이 아닙니다. 원고의 풍부한 역사 지식은 물론, 아내와의 격렬한 성생활과 그 쾌감, 오발 사건의 기억과 그 죄책감도 고스란히 제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공동체라 할 만하죠.

왜 그렇게 절규하십니까? 이게 과연 그렇듯 절망할 일입니까? 원고의 존재는 계속해서 복제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원고는 모든 공간, 모든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분신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를 크게 감사해야 함에도, 오히려 박사에게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 어찌 적반하장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법정이 소란하기에 본 변호인의 변론을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그 어떤 책임도 제 의뢰인에게 물어서는 안 됩니다. 판사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 『계간문예』 2023 가을호 <짧은 소설 특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