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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수필] 가슴으로 안은 청호동 / 조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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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3-12-14 12:03

본문

애틋함은

그리움과 후회와 미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청호동은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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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안은 청호동



내 고향 남쪽 바다를 기억 저편에 두고, 아득히 먼 수평선을 향한 푸른빛의 설렘이 짙은 청호동은 남편이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다.

어디를 가나 봄이 되면 하얗게 흩날리는 벚꽃이 지천이겠지만, 일제 강점기가 근원이 되어 벚꽃 축제로 유명한 진해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던 내 뿌리의 전환점이 청호동이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신혼생활을 부천에서 보내며 지내다 고향의 애틋함을 그리워하던 남편을 따라 두 아이와 함께 청호동을 찾아 든 것이 30년이 훌쩍 지났다.

외길을 따라 비슷한 형태와 구조로 지은 판잣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제 집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던 일이 생각난다. 눅눅히 배어 오던 바다 내음과 습한 곰팡이 냄새가 잠식한 판잣집에는 겨울이 되면 빨아 놓은 걸레가 밤사이 꽁꽁 얼어 돌멩이로 굴렀다. 하루에 두 번씩 연탄을 갈고, 재래식 화장실에 욕실조차 없어 불편하던 그 집에 남편은 효심을 앞세워 합가를 했다. 지금은 세월이 허물고 세상이 허물어 낸 그 옛날의 청호동 판잣집들이 사진으로 남아 추억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청호동 외길이 정비사업으로 넓혀지고 구획 정리에 일부의 집들이 미리내 마을로 이전해 갔다. 도로 가에 인접한 본가도 삼분의 일 정도가 도로에 흡수되어 땅콩집을 지을 정도만의 토지가 남게 되었다.

건축일을 하는 남편이 손수 정성 들여 새집을 지었다. 고단한 삶을 사신 어머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깨끗한 집에서 여생을 보내시라고 정성을 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가,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남편의 속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흔적을 가끔 이야기하며, 마루 밑에서 곰삭아 가던 꽁치젓갈처럼 나 또한 곰삭아 가고 있는 중이다.

청호동 생활이 그리 길지 않는 몇 년이란 시간이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들이 많아 애착이 생겼다. 청호동은 실향민의 아픔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다. 6.25라는 환난을 피해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 피난처로 자리 잡은 곳이라는 사실과 속초의 뿌리였다고 가끔씩 토로하는 남편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게 되었다.

명절이 되어 일 년에 두세 번 찾아왔을 때나 합가를 하여 한지붕 아래서 모실 때나 어머님은 젊은 아들 내외가 깊은 잠 설칠세라 문 여닫는 기척도 없이 일을 나가셨다. 새벽 두세 시경쯤 처마 밑에 전등을 내다 걸고 소리 죽여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밤과 낮의 경계가 없는 일상이라 나에겐 참으로 생소한 일이었다.

앞바다에서 잡힌 생물 오징어를 할복하고 손질하여 축 잡아서 생계를 이어 가시던 어머님. 생물 오징어가 없는 깊은 겨울에 꽁꽁 언 오징어와 명태를 거친 바람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손질하시던 모습이 내 가슴속엔 아직도 선연하다. 비릿한 냄새가 밴 손수레 위엔 바지랑대에 꿰인 오징어들이 실려 있고, 이른 새벽 뱃일 나가는 남정네들의 오고 가던 투박한 말투는 서서히 사멸하는 청호동의 실체다.

작고하신 작은아버님은 게를 잡는 배를 타셨다. 가끔씩 뱃머리에서 드신 술기운으로 지나시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홍게를 문 안으로 넣어 주시며 가시곤 하셨다.


실향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청호동. 그 이념의 잔재는 아이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품에 안고 살갑게 볼 비비시던 할머니가 계신 곳일 뿐이었다.

삼 년 동안 불편함 속에서 어머님을 모시다 분가를 하였다. 아이들의 면학을 위한 이유와 청호동 분위기에 어우러져 들지 못하는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지금 삼십이 훌쩍 넘은 아이들에게 가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너희들은 살아온 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는 적이 언제니?”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였다. 해거름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던 아이들이 거칠 것 없이 자맥질하며 뛰어놀던 청호동 바닷가에서의 추억이라고 이야기한다. 반월형 하얀 모래톱 위에서 뒹굴던 아이들의 새까맣고 빤질빤질한 콧잔등을 속상해 하던 나에게 배신자처럼 당당히 이야기한다.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할머니의 사랑이 넘치고 푸른 바다가 품을 내어 안아 주던 청호동의 기억은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청호동에서 홀로 계시던 어머님은 타지에서 명절이라 다녀갈 자식들을 위해 명태, 가자미식해를 정성껏 마련해 놓고 기다리셨다. 싱싱한 꽁치가 날 때면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잘게 다져서 햄버거 패티처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남편은 실향민 2세다. 청호동에서 태어나서 자라며 유년기의 우정을 쌓아간 청호동 본토박이인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던 남편이 맞았다는 착착 감기는 덜 마른 오징어 회초리 이야기. 바다 깊이 던져 버린 구슬 주머니를 건지기 위해 자맥질을 하다가 엄지발가락에 심한 생채기가 났다며, 영웅담처럼 들려주는 남편의 옛날이야기 주머니는 아직도 풍성한 고향 사랑이 담겨 있다.

생활고를 버티며 자식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주시던 부모님들의 빈자리가 많아졌다. 그 빈 자리 하나를 채우고 사는 우리 부부는, 노을 지는 벤치에 앉아 먼바다에다 지난 청호동의 이야기들을 쉼 없이 끈끈하게 적어 내려갈 것이다.

가을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빛이 아릿하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