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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수필] 숲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무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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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4회 작성일 23-12-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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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의 '일기처럼 시 쓰기' 강의를 듣고

왜 일기처럼 수필이 쓰고 싶어질까?

긴 세월 넑두리만 담아 놓은 것 같아

폐기 처분을 생각했던 일기장을

다시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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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무



내 서재 책장 빽빽이 꽂힌 책들 사이에 누렇게 퇴색된 낡은 시집 한 권이 있다. 늘어나는 책들을 감당할 수 없어 가끔 솎아내기를 할 때도 제일 먼저 챙김을 받는 책이다. 책 제목은 『한국 여류 101인 시선집』, 한림출판사에서 1985년 9월에 발간한 책이다. 올해 나이 서른여덟 살이 된 그 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낸다. 숲을 떠나온 나무가 숲으로 돌아가겠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나무색을 띠며 낙엽 부서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책 속에는 101명의 여류 시인이 산다. 어린 시절 라디오 드라마에 매료되어 장래 희망이 드라마 작가였을 무렵 여인극장에서 만났던 김일엽 스님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시인인 나혜석 작가를 비롯한 101분의 신인들이 살고 있다. 1920년대부터 시를 발표한 몇 분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김남조, 강은교, 신달자, 문정희, 김후란, 유안진, 천양희, 시인 등 요즘도 창작활동에 매진하며 좋은 시로 독자들에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시인도 많이 계신다. 특히 몇 년 전 작고하신 박명자 시인은 설악문우회 ‘갈뫼’의 동인으로 만나 함께 활동한 인연이 있어서 박명자 시인의 「아흔아홉의 손을 가진 사월」 외 3편의 시는 더 정겹게 느껴진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 발표한 여류 시인들의 시들로 엮은 책이니 나에게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만난 한 서린 여인들의 넋두리 같기도 하고 우리 할머니와 엄마의 삶을 시로 풀어 놓은 것 같아 마음에 비가 내리기도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과 세대 차이로 이해도 공감도 어려운 글들이 더 많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나무처럼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는 책이다.

시상이 허공을 떠돌다 흔적 없이 사라진 날이나 합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나 이유 없이 우울하고 슬픈 날이면 은은한 나무 향으로 내 마음 다독여 주는 오래된 친구 같은 책이다. 그래서 정리를 핑계로 폐기 처분 할 책을 솎아낼 때도 제일 먼저 새 자리를 정해주고 있다.

이 책이 어떤 경로로 내 곁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긴 세월 곁에 두고 살다 보니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던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던 이야기꾼 언니의 입담인 듯하다. 내가 먼저 한 줌의 흙이 되어 숲으로 들어가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나무색 찾아가고 있는 이 책이 숲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 책장 한 켠 기꺼이 내어 줄 것이다.

5년 전에 발간한 나의 첫 시집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책장 한 켠 자리 얻어 들어가 있을까?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냄비 받침으로라도 쓰이고 있는지, 내가 지은 첫 집의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