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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수필] 벼들은 배후가 없다 / 김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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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3-12-1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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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 대한 편력을 표현하려니 시콜하기도 하고 어눌하기 그지없다.

대학을 졸업 후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해졌다.

학자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홀어머니와 동생 넷의 희생을 버려둘 수가 없었고

군필하고 중등교사의 길을 택했으며 팔아먹은 땅을 복구하다 보니 농업사기꾼이 선택지였다.

발령지가 속초 지역일 때 잠시 집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칠십여 년 생가에서 살고 있다. '갈뫼'를 기웃거린 일도 그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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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들은 배후가 없다



벼들끼리 주고받는 가을 밀어에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본다. 미디어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발생한 배후를 알 수 없는 사건ㆍ사고를 특종, 단독보도라 치켜세우며 극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내겐 스트레스로 쌓여 간다. 하지만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벼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리태 익어 가는 들녘은 추수의 행렬로 가득하다.

잔상으로 남아 있는 풍요로운 한가위 달빛으로 귀농이 패착은 아닌 듯 자위도 해 보지만, 수상한 포자들이 날아들고 깨씨무늬병이나 이삭목도열병에 걸려 알곡이 죽어가고 태풍이 불면 도복되어 싹이 나기도 하는데 해충과 야생동물들이 선세를 거두어 가도 그만이다. 고양이의 천적이 사라지고 지게 작대기만 들어도 줄행랑치던 참새들이 늘어나고 쓰러진 벼 밭에는 어김없이 고라니와 너구리가 낮잠을 자고 멧돼지는 하룻밤에 천여 평의 옥수수밭을 20cm 깊이로 초토화시킬 때도 있다. 어김없이 철새들은 조류인플루엔자를 감염시키려 날아 올 것이다.

점점 차가운 백로에 깊어가는 가을 단풍이 황홀하게 물들고 도시를 떠나 횡성 한우 축제도 즐기고 산행을 서두르는 행락객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멀리 보이는 논과 밭의 긴 사래에 무서리 내릴 즈음 한낮의 메밀잠자리 떼와 어우러진 촌음의 하루에 노을이 물들면 농부의 가을걷이의 터널이 보이면서 조바심도 사라지고 두 다리 쭉 펴고 김장을 담글 것이고 깊은 숙면을 예비할 것이다.

바라보는 상상만으로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울만 멀쩡한 성형미인일 뿐 쌀은 천덕꾸러기이고 공산품과 비교하면 그리 만족스러운 가격이 아니다. 농부에겐 겨우 자가 노동의 품삯을 챙기는 진퇴양난에 고령화, 동공화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비료 농약 농자재 가격이 급상승하고 손익분기점이 낮아지는 현실이 농촌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쌀의 1인당 소비량이 90년대 112.9kg이던 것에 비해 22년 기준 56.7kg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밀가루 가공식품과 육류의 소비량은 22년 기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합이 58.4kg으로 최고치를 매년 경신하고 있다. 식량 안보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우울한 냉기가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나마 정부의 보조와 수매가 있기는 하지만 스마트 농업의 밝은 미래가 반감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게 기우였으면 좋겠다.

논은 공시지가가 가장 낮다. 여든여덟 번의 손이 닿아야 쌀米이 생산된다는 속담은 차치하고 농촌은 왜 가난한가? 역설적으로 벼는 삼천리강산에 연년이 심어진다. 전국의 댐들을 합한 물의 열 배가 넘는 담수량이 채워져 홍수 조절 효과가 있고 산소공급원이며 자정능력을 지닌다. 국가의 식량 안보로서의 역할은 물론 주식으로서의 중요성은 인식되어 있다.

세계 곡물 시장의 통계에 따르면 옥수수 밀에 이어 세 번째로 수확량이 많은 쌀의 생산량은 증감이 거의 없다. 콩과 같은 GMO 작물도 아니며 인구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산술급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남아시아 민족과 더불어 매우 특별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으며 인류와 함께 영구적으로 재배되어 가야 할 작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농사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외국 노동자를 끌어 들여와야 가능한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최근의 다문화 정책 중에서 대리모는 물론이고 외국인 육아와 요양 기술자를 도입한다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이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더니 ‘둘도 적다. 셋을 낳아라.’ ‘여성이 아이 낳는 기계냐?’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와 새 타이어가 유의미한 조롱으로 들릴지 모를 일이다. 선거철이 지나면 날개 돋친 듯 솟는 물가에 비하면 쌀값은 제자리걸음이며 운동화 한 벌 사기도 어렵고 외식 한 번 배 터지게 못하고 쇠고기 사 먹기도 명절에나 가능한 버거운 양극화의 현실을 실감하게 한다.

벼는 심어만 놓아도 70%의 수확이 가능하다. 다음 해를 위하여 30% 더 생산하기 위하여 제초제 치고 비료 뿌리며 이삭거름을 살포하며 병충해 방제에 비용을 들이면 광복절 전후로 이삭이 나오고 태풍이 비껴가면 풍년이 된다. 반값 농자재의 지자체 보조를 받으며 정부가 고시한 가격에 농협에 수매하고 국회가 정한 수매가의 차액은 보전해 준다. 신청한 서류의 심사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공익직불금이 지급된다.

최후의 보루인 농지를 매워 아파트 짓는 어리석음과 ‘쌀 소비량이 줄었다.’고 해서 절대농지를 변형시키거나 대체 작물을 권장하는 우매한 정책도 불식을 고려해야 한다.

벼의 품종은 다양하다. 아밀로펙틴과 아밀로오스의 성분에 따라 찹쌀과 멥쌀이 있고 흑미는 찰벼에 속한다. 품종 개량과 기후 변화에 따른 기능성 벼의 품종 개량도 연구되고 있다. 쌀의 가공을 위한 다변화와 식감을 높이려는 노력도 과제 중의 하나다. 수출을 위한 자구책은 물론 다른 나라의 농지를 사들여 벼 재배 기술자를 파견하는 회사의 설립 프로젝트도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농업 인구의 감소에 따른 미래의 농업경영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세계의 톱니바퀴는 이상기류를 따라 상승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경쟁력은 다변화 속에서 전쟁과 기아, 지구온난화, 한계비용 제로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쌀이 미래다. 벼들은 배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