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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수필] 박경리 선생님을 추모하며 / 강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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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3-12-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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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새삼 인지하는 요즘이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보이지 않게 가르침과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분들이 이제 옆에 계시지 않아 쓸쓸함이 더한다. 문우회 동인들만 하더라도 윤홍렬, 이성선, 최명길, 박명자, 이충희 선생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났다.

지난간 옛일을 이것저것 떠올리다가 문득 토지문화관에서 뵈었던 박경리 선생님이 생각나서 그때 일을, 수필 형식을 빌려 회고해 보고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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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을 추모하며

― 밀짚모자와 전정가위, 그리고 호미



오월의 아침 햇볕이 밝고 따사롭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에 색 바랜 블루진 상의와 회색 바지 차림인 선생님의 가지치기 작업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호미와 담뱃갑이 든 대바구니가 땅바닥에 놓여 있다. 손바닥 부위에 빨간색 고무를 입힌 실장갑을 끼고 나무를 올려다보며 전정가위로 곁가지를 잘라 내고 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촌부 모습 그대로이다. 누가 이분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신 대작가 박경리 선생님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

지치셨는지 잠깐 당신이 가지치기한 나무에 등을 대고 그대로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신다. 땅에 놓인 대바구니를 앞으로 끌어당기시더니 담뱃갑을 찾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시고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눌러서 불을 붙이신다. 이내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무척이나 무심하고 평화스러운 표정이시다.

절대 애연가이신 선생님은 『토지』의 집필 과정에, 한 시대가 주는 아픔을 좋아하시는 담배로 풀어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만년에 담배로 얻은 폐암 수술을 마다하시고 “좋아하는 담배나 실컷 피우다 가시겠다”고 거절하셨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담배 한 개비를 맛있게 피우시고는 다시 대바구니에서 호미를 꺼내 드신다. 무심한 시선 속에서도 잡초가 눈에 보였던 것 같다. 앉은 자세 그대로 호미 쥔 팔을 길게 뻗어 나무 밑의 잡초를 뽑아내신다.

창작실의 하루는 밥 먹고 자는 일 외는 온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누워서 쥐가 나도록 머릿속을 비워 내는 일이 전부다.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는 생활이니 누구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때로 답답하고 무료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제대로 글이 풀리지 않을 때는 글 쓰는 일 자체에 회의까지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럴 땐 하던 일을 접어 두고 기분을 바꿔 보는 방법이 최상이다.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나무 마루가 깔린 베란다로 나온다. 등받이가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마루 아래에서 베란다는 바로 숲으로 이어진다. 밖은 5월의 신록이 한창이다. 어디선가 아카시아 꽃향기가 미풍에 실려 오고 진녹색의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이토록 좋은 계절에 읽히지도 팔리지도 않는 소설을 쓰느라 끙끙거리는 모습이란 스스로도 참으로 한심하다. 그러나 어쩌랴! 글 쓰는 이에게는 글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을.

바라보는 수풀 속에 작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머리만 드러낸 채 조심스럽게 나뭇잎을 뜯고 있다. 창작실 베란다 앞 숲에 고라니라니! 신기하다 못해 은밀한 비밀의 정원 안에 있는 느낌이다. 고라니가 나뭇잎을 다 뜯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출 때까지 나는 정물처럼 미동도 않는다.

토지문화관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오봉산은 봉우리가 다섯인 백운산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골짜기가 깊어 창작실 100여 미터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계곡 옆으로는 회촌이라는 3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 있다. 계곡을 따라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원시림 같은 무성한 숲이 나오고 숲속에는 허름한 성황당이 하나 있다. 한낮인데도 어둑한 나무 그늘 밑에 취와 둥굴레, 삽주 같은 약초들이 자라고 있어 고라니와 멧돼지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다. 옛날에는 곰 같은 짐승도 있었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화전민이나 은자隱者들만의 터전이었을 성싶다.

토지문화관 창작실은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디 숙소동에만 예술인을 수용하다가 2003년 박경리 선생님이 때마침 방송국에서 받은 드라마 <토지>의 원작료 2억 원에 사비를 더 보태서 문화관 본관 입구의 왼쪽 길목에 다섯 명을 더 수용할 수 있는 창작실을 짓게 된 것이 제1 창작실 ‘매지사’이다. 이어서 2006년 열 명을 수용하는 제2 창작실 ‘귀래관’을 토지문화관 본관의 오른편 앞쪽 100미터 지점에 신축했다. 선생님은 평소 당신이 베푼 회식 자리에서 “국가에서 고성古城을 빌리거나 매입해서 예술인들의 창작 의욕을 선양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더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이로써 집필실과 창작공간을 가질 수 없었던 국내의 유수 작가와 예술가들이 토지문화관 창작실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라나 재벌이 할 수 없는 일을 오직 후학을 사랑하는 순수한 당신의 힘과 열정만으로 해냈다. 창작실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 개방하여 인도와 중국, 몽골과 프랑스, 싱가포르 등 외국인들도 이용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만으로도 선생님의 후학 사랑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잠깐 먼산바라기를 하다가 시선을 돌리니 박경리 선생님이 어느새 사저 앞 텃밭에 계셨다.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서 상추와 쑥갓을 솎음질하고 있었다. 그 텃밭에는 이른 봄부터 선생님이 손수 씨를 뿌리고 가꾼, 상추와 쑥갓, 근대, 열무들이 자라고 담장 밑에는 머위가 잎새를 키우고 있었다. 이미 플라스틱 채반에 이미 상추와 쑥갓 근대가 가득 담겨 있다. 보나 마나 이것들은 창작실 식구들의 식탁에 겉절이나 쌈으로, 근대는 시원한 된장국이 되어 오를 것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당신이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손수 가꾸신 유기농 채소로 창작실 식구들을 거둬 먹이셨다.

창작실 식구들이 가장 신나는 날은 선생님을 모시고 개 건너 막국수 집에 가거나 시내로 나가서 회식을 하는 날이다. 작업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서지 않아서 의기소침해 있는 창작실 식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려는 선생님의 섬세한 배려다. 평소 큰 산 같아서 얼른 다가가기 어려운 어른을 바로 곁에 모시고 메밀전병에 동동주를 격의 없이 같이 마시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창작실 식구들의 사기는 크게 고무되기 마련이다. 이런 자리에서 선생님이 들려주신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다.

“…한밤중에 말이야. 퍽퍽!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야. 사람들이 이상해서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글쎄, 못 한 가운데서 거위들이 날개를 크게 벌리고 연못물을 내리치고 있더라는 거야. 자세히 보니 연못물이 전부 얼어 있는데 거위들이 날개를 내리치는 자리만 동그랗게 물이 얼지 않았다는 거야. 거위들은 자신들이 쉬고 있는 연못물이 더 이상 얼지 않도록 밤새 홰를 치는 소리였다는 거야.”

이 연못은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 앞에 있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백조로 일컬어지는 거위들이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다.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보다 더 큰 의미는 선생님의 예술과 삶에 대한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를 후학들에게 일깨워 주려던 것이었으리라.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 2년쯤이던가, 다시 창작실에 입주했을 때다. 점심을 먹으러 창작실을 나와 식당으로 가다 말고 내 눈을 의심하였다. 본관의 현관에 이르는 계단 옆 둔덕에 선생님이 엎드려 잡초를 뽑고 계셨다. 뒷모습이 영락없는 선생님이셨다. 가까이 가서야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는 따님 김영주 이사장님인 것을 알아보았다. 모녀간은 닮는다더니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이 생각난 김에 점심시간도 약간 일러서 선생님의 유품이 전시된 전시실로 들어섰다. 유품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유리 상자 속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 블루진 저고리와 회색 바지, 밀짚모자와 호미, 전정가위와 즐겨 피우시던 담뱃갑이다. 그것들이 너무 눈에 익어서 지금도 텃밭에 나가면 선생님이 그 옷차림 그대로 잡초를 뽑고 계실 것만 같았다.

전시실을 나와 식당 앞 잔디밭에서 잠시 토지문화관을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오봉산을 올려다보았다. 다섯 봉우리 가운데 주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선생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저 주봉에서 토지문화관을 내려다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따님이신 김영주 이사장님도 사위인 김지하 선생도 박경리 선생님 곁으로 가셨다. 두 분도 선생님 곁 오봉산 한 봉우리에 계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