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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수필] 감자 이야기 외 1편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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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3-12-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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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유독 다른 해 보다 더웠던 거 같다.

갑자기 훅 찾아와 버린 가을이 제법 쌀쌀하다.

조금 더디게 와주기를 바랐다,

사람과의 관계도 조금씩만 더디게 가까이 와주었으면 한다.

혹 찾아왔다 갑자기 떠나 버리면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차가운 가을날이지만 난 그래도 따스한 마음을 나눠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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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이야기



지인과 함께 사진을 보다가 너무 예쁜 꽃 사진이 있어 무슨 꽃이냐고 물어 보았다. 감자 꽃이라고 알려준다. 세상에 감자 꽃이 이렇게 예쁘다니 감탄스러웠다. “감자에도 꽃이 피는구나” 하고 그 꽃을 한참을 들여 다 보았다. 참 예뻤다. 갖가지 열매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혹시 가지 꽃도 오이꽃도 필까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길가에 수많이 핀 야생화며 여러 가지 꽃들이 다 예쁘게 피어나지만 감자 꽃이 이렇게 예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감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감자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서울에 살 때는 감자보다 고구마를 더 많이 먹었다. 그러나 이사 와서 보니 강원도는 고구마 보다 감자를 많이 먹는 것 같다.

해마다 수확 시기가 되면 여기저기 후배들이 감자를 한 박스씩 주곤 하였다. 그렇게 얻은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감자 부침개도 하고 감자를 삶아 으깨어 마요네즈에도 버무려 먹기도 하고 그냥 쪄서 한 끼 요기도 하며 자주 먹게 되었다. 요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 칩이며 감자 빵도 나오면서 감자가 더 맛있어졌다.

어느 날 지인이 감자를 많이 심어서 비가 오기 전에 캐야 한다면서 걱정을 태산처럼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감자를 캐본 적이 없기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에게 “우리 가서 한번 감자를 캐보자.” 언니의 시름도 덜어 줄 겸 도와주러 가자하고 했다. 그 후배가 잘되었다 싶어 감자 캐기 경험도 할 겸 아이들을 동행해도 되냐고 하니 흥겨이 허락하여 모두가 나섰다.

난생처음 캐보는 감자라 혹시 밭을 망치면 어떡하나? 힘들어서 몸살이 나면 어쩌나, 전날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었다. 괜히 간다고 이야기 했나? 가지 말까? 이런저런 생각에 후회를 하고는 그래도 후배랑 한 약속이니 후배만 달랑 보내기 뭐해 나섰다.

밭에 가니 주인장이 반겼다. 또 아는 언니도 있어 반가웠다.

주인장은 내 복장을 보고는 패션쇼 하러 왔냐고 하더니 장화를 신은 모습과 호미랑 마스크 모자를 들고 온 걸 보더니 “음, 복장은 그럭저럭 되었네.” 하며 웃으면서 “그 호미로는 택도 없다.” 하며 진짜 호미랑 장갑을 건네었다.

주인장은 “감자 캐는 것은 처음이지” 하면서 일단 먼저 풀을 뽑고 V자로 땅을 파서 감자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감자를 캐라고 일러 주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혹시나 감자를 캐다 망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가시고 ‘별거 아니네.’ 하면서 열심히 감자를 캤다. 알려준 대로 하다 보니 감자가 보였다. 세상에, “감자다.” 우리 모두는 감자가 보인다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쳤다, 세상 처음 만나는 땅속의 감자이니 그럴 수밖에...

혹여 감자에 상처가 날까 싶어 손으로 흙을 치우면서 조심조심 캤더니 손끝이 아팠다. 주인장이 다시 요령을 알려 주어 캐기 시작하는데 한 알, 한 알 감자가 나오는 것을 보니 너무도 소중하고 신비스러웠다.

같이 간 후배는 시골에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나보다 두 배를 아니 세배 일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 고랑이나 캤을까 싶다. 가서 보았을 때는 그렇게 넓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400평이나 된다고 해서 놀랐다. 막상 말을 듣고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많아 ‘이걸 언제 캐나?’ 싶었다.

후배는 아예 고무 방석을 엉덩이에 달고 감자를 캤다. 나는 그 요상스런 동그란 방석을 다리에 끼어 엉덩이에 달고 캐기가 좀 민망스럽고 어색해서 그냥 옮겨 가면서 감자를 캤다. 겨우 한 고랑도 안 캤는데 온몸이 땀에 젖고 너무 더웠다.

막상 내가 감자를 캐보니 엄청난 노동이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등줄기는 땀으로 다 젖었고 얼굴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도 지글지글 타는 거 같았다. 장화 신은 발은 물속에 풍덩 잠긴 것처럼 끈끈해졌고 힘들었다. 그냥 손 털고 집에 가서 당장이라고 씻고 싶었다. 감자를 캐는 것이 이렇게 땀 흘리는 고된 노동이라니 농사는 정말 힘든 거구나 몸소 실감하게 된 날이다.

전원주택에 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모임에 가서 늘 내가 하는 말이 있었다. 나의 노년의 꿈은 넓은 마당에 야생화를 갖가지 심고 뒤편에는 조그마한 텃밭에 감자, 고구마, 고추, 오이, 상추 등을 심어 가꾸며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고문님이 “감자 캐고 와서는 그 말이 쏙 들어 갈 거다.” 하셨는데 그 말이 딱 맞다. 난 그냥 편하게 아파트에서 사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가끔 학교에서 감자 농사를 지었다고 감자를 한 바구니씩 주면 너무 많다며 몇 개를 얻어 와도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서 썩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감자를 캐보니 이 한 알, 한 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농사지어서 얻은 그 열매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가 감자 농사를 시작 한지는 6.25 전쟁이후이고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말기인 1824~5년쯤이라고 한다.

감자는 벼,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로 불릴 정도로 인류를 먹여 살리는 귀중한 작물이다.

감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연이 재미있다.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서 산삼을 구하기 위해 산을 헤매고 다녔는데 이때 양식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길목마다 감자를 심어 놓고 비상식량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이 함경도에 감자가 들어온 사연라고 한다. 강원도 지역에 재배가 된 시기는 1930년대부터라고 한다. 강원도는 기후조건이 맞아 감자 재배에 무난하였기 때문에 감자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구황 작물인 감자는 먹을 게 없었던 예전에 가난한 사람들만 먹었다. 그러니 대접받은 식품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접받지 못했던 감자가 시대가 바뀌면서 웰빙 식품으로 또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손꼽히며 우리의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감자는 포만감이 높고 사과보다 비타민 C가 세배 더 들어 있다고 한다. 또한 철분이 충분하고 칼륨이 들어 있어 고혈압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좋은 음식인 것은 확실하다.

원래 감자라는 이름은 북쪽에서 들어와 북저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감저’라고 하면서 감자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감자를 수확할 때 주렁주렁 매달려 나와서 지슬, 북감저, 마령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지 않다.

서울에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밥이 모자라 양을 늘리기 위해 고구마를 넣어서 먹기도 했다. 강원도 에서는 밥에다 감자를 넣어 먹었으리라 생각한다. 가끔 식당에 가면 밥에 감자를 넣어 주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자를 골라내고 먹었다. 그만큼 감자를 즐겨 먹지는 않았다.

감자는 염증 완화에 좋고 기관지염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만큼 내가 많이 먹어야 할 음식이다. 내 건강을 위해서 자주 먹어야겠다.

나도 요즈음 가끔 밥을 먹기 싫다거나 그냥 한 끼로 대신하고 싶을 때는 감자를 쪄서 먹기도 한다. 고슬 ,고슬 하니 참 맛있다.

그만큼 감자는 예나 지금이나 밥 대신 먹던 음식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19세기 후반의 삶속에도 감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노동 끝에 얻는 소중한 식량이었다. 모든 농사에서 얻은 것들이 소중하기는 하나 감자는 더욱더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음식이었다.

명화 중에도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란 고흐의 그림이 있다.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지치고 허기진 배고픔을 감자로 채우는 모습을 보인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어둡고 힘든 노동자들로 묘사되어 삶이 궁핍했음을 알려 준다. 고흐는 그들의 시골 생활의 고됨을 고스란히 담아야 했기에 농부들의 얼굴을 거칠고 억세게 그렸고 손도 투박하게 그렸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만족했으나 그 당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그림의 색채가 너무 어둡고 인물 묘사의 정확도나 기술적인 면에서도 떨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고흐는 농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진실을 담으려 했기에 그의 묘사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투박한 얼굴과 힘들고 거친 손으로 하는 노동의 대가이며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의 소중함을 기억 하면서 잘 먹었어야 되는데 때론 많다고 버리기 일쑤였던 나는 이 식량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 이었나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감자 캐기를 거의 마무리하고 나니 늦은 저녁 시간이 되었다. 감자를 많이 캐지도 못해서 미안해 그냥 오려고 했는데 수고했다고 하면서 감자를 한 박스나 주셨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상당히 부담이 되어서 배고파도 먹지 않으려고 했다. 그 시간이 다행이 저녁장사 마무리가 되어 다 문을 닫아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떡하든 저녁을 먹이려고 여기저기 찾아보고 검색하며 애를 썼다.

밥을 못 먹고 여기저기 헤매는 우리를 보고 한 식당주인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서 밥을 해 주겠노라 해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문 닫지 않은 식당을 찾아 헤매었던 지인 언니나 문 닫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픈 이들의 밥을 해 주려고 했던 그들에게 문득 고마움이 들었다.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그저 대단치 않게 생각하며 나도 음식 장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데 그 언니가 고생한 모습을 보니 대단해 보였다. 그냥 단순한 음식 장사라고 해서 쉽게 생각했었다. 귀한 농사를 짓고 소중하게 일구어 장사하는 그 모습에 결코 장사는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농사를 짓는 일은 땅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가장 성실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지인 언니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내가 지어 만든 음식들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 주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했다. 물론 장사를 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언니는 유독 음식에 애정을 쏟는다. 남을 위해서 그렇게 음식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감사했다.

배가 불러 바람도 쇌 겸 주차장에 나왔다. 밤기운이 좋아 올려다본 하늘에 예쁜 초승달이 걸려있었다. 저 아름다운 달처럼 예쁘고 마음이 좋은 사람들이 아직은 내 곁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졌었다.

고작 하루 일을 했다고 몸은 고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래도 잘살고 있다고 나를 토닥거려 주었다.

소중하게 담아 온 감자를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나눠 주는 데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감자를 쪄서 먹고 출근을 했다, 너무 맛있었다. 앞으로는 얻어 온 것이든 사 온 것이든 농군들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다 귀하게 생각하며 하나도 버리지 말고 맛있게 먹어야겠다.

그날 하루는 정말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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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톡



“카톡, 카톡 왔어요.” 여기저기 음성소리가 요란하다.

성당 모임에서 어르신들이 핸드폰의 소리를 꺼놓지 않았다. 그 소리에 갑자기 모임 중 회의가 중단 되자 “아차” 하며 핸드폰을 열어 닫았지만 다시 이어지는 카톡 소리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결국 한 분이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꺼버린 후에 조용한 시간이 되었다.

나도 처음 카톡을 시작할 때 무음으로 해놓지 않았었다. 그러니 카톡이 오는 소리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카톡을 무음으로 해놓는 방법을 알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카톡. 카톡 그 지겨운 소리를 여러 번 듣게 한다. 소식을 놓친다는 이유로 주의 사람의 귀를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음으로 해놓아서 가끔 중요한 소식을 놓치기도 하지만 소위 어르신들 말로 ‘캐톡’을 켜놓을 수가 없다.

이제는 카톡에서 단톡방을 만들어 소식을 전해 듣기에 편한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일일이 하나하나 메시지를 다 입력하여 소식을 전했고 그다음은 단체 문자를 보냈지만 지금은 카톡으로 소식을 전해 주니 얼마나 편안한가? 그러나 나름 커다란 단점이 있다. 자신들의 소식방에서 소식을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그 시끄러운 소리를 자신은 물론 남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디서 그렇게 알기도 잘 아는지 수없이 단톡방에 여러 가지 소식들을 퍼다 나른다. 가끔은 같은 소식을 여러 사람에게 받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이미 본 것이다 하고 다시 보내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 아예 안 보면 되는데 지금은 또 새로운 기능이 발달이 되어 상대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안볼 수도 없다. 더구나 단톡방에서도 몇 명이 읽었는지 알 수 있는 기능이 있으므로 상대가 내 글을 읽고도 답을 안 하는 것에 섭섭함을 갖기도 해 심지어는 괘씸죄도 붙기도 한다.

예전에 카톡을 읽어 놓고도 나중에 답을 하면서 지금 카톡을 읽었다고 거짓을 하는 이들도 봤다. 그들은 상대가 읽었는지 그 기능을 알지 못하던 때 그런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난 노골적으로 몇 시에 읽었던데 하면 당황해 하면서 어떻게 아냐고 해서 내가 알려준 적도 있다.

가끔은 운전 중에는 카톡이 와도 보기는 하나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답을 하다가 문득 예전에 오해했던 친구가 생각나 미안한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사정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까는 운전 중이라 읽기만 할 수 있었다’라고 답변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바로 답변을 못하면 “아까는 운전 중이었다”고 답을 해준다. 그러면 상대는 “아” 하고 이해를 해 준다. 일명 눈팅만 하다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단톡방은 아주 편리하고 좋은 점이 많기는 하나 그렇게 가끔은 울화통이 터지게 하기도 하고, 가끔은 보이지 않게 사람 따돌림방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아주 무서운 곳이 되기도 하고 웃음을 주기도 한다.

수없는 소식들에 현기증이 난다. 물론 가끔은 정말 유익한 소식들도 많다. 하지만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그 유익한 소식마저 자주 전해 듣고 싶지 않아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면 내가 찾아서 들을 테고 각자 알아서 잘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좋으니까 남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고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을 안다. 그러나 “나 이렇게 많이 아는 사람이야” 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마음으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어떤 모임은 거의 연령층이 평균 60~80대 이상 모임인 단톡방이 있다. 인원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단톡방이다 보니 올라오는 글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가끔 그 단톡방에서 서로를 비방하거나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거나 또 잡다한 글들로 도배가 되어 싸움을 하기도 한다. 주인장이 종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를 삼가 해달라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웃기기도 하지만 정말 짜증나기도 해서 확 나가버리기를 서너 번 했으나 자꾸 초대되어 내 발목을 꽉 잡고 있다.

잠이 없으신 어르신들로 꽉 차 있는 단 톡 방이다 보니 새벽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들이 올라온다. 카톡은 노인들의 재밋거리다. 새벽잠이 없으신 분들이 오만 가지를 다 올리다 보니 카톡의 신화다.

참다못한 주인장이 금지령을 내렸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0까지만 글을 올리고 더 이상 올리지 말라는 권고장을 내보였다. 며칠 동안 지키지 않는 어르신들 때문에 주인장은 서너 번의 경고를 강하게 내리며 더 이상의 글을 올리지 말라는 특단을 내렸다. 지금은 그나마 잘 지켜지기는 하나 아침 7시 55분에 글을 올려 혼나기도 하고 7시 58분에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2분 전이기는 하나 또 주인장의 불호령이 내려진다.

“제발 시간을 지켜 주시라고요” 그렇게 주인장의 강한 경고가 올라오면 그 잠깐의 시간은 단톡방이 너무도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한 시간을 금방이라도 깨는 이는 분명 있고 기회는 이때다 하여 다시 글을 열심히 올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 광경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박장대소를 한다. 정말 재미있다. 그러나 주인장 입장에서는 열불이 날 것이다. 내 짐작으로는 그 주인장은 무음이 아닌 듯하다.

나도 늦게 자는 편이라 저녁에 일을 다 마치고 소식을 전하는 시간이 열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시에 한 모임의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가 선배한테 혼나기도 했다.

여덟 시 이후에는 삼가라는 말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예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맘을 먹었다. 내게 있어 그 여덟 시는 아주 바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이후로 여덟 시에 소식을 올리려다 깜빡 잊어도 다시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좋은 소식이라도 공유하기가 꺼려진다.

단톡방의 모임 형태는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하나는 친목을 하는 모임으로 정스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 동네 소식들 그리고 가끔은 섭섭한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로 친목을 하는 단톡방은 서로 보듬어 주며 서로 격려하여 위로 삼아 있기에 좋기도 하다. 가끔은 삐쳐서 나가기도 하고 다시 데려오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또 하나의 모임 단톡방은 공지만 하는 방이다. 그런 공지방에 다른 일상적인 이야기가 올라오면 사람들은 답을 안 한다. 침묵을 지키며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를 무시하거나 왕따를 시켜 다시는 일상 이야기가 올라오지 않게 한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머쓱하고 때론 기분도 나쁘고 불쾌하다고 하며 그 방을 나가 버린다.

나에게도 그런 공지만 하는 모임방이 여러 개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곳에서는 아무런 잡음도 없고 왠지 따돌림이나 무시를 당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다. 그래서 너무 좋다. 편협한 모습들도 보이지 않고 무언가 갈리지는 느낌도 없는 공평한 방이라는 느낌이 들어 정말 좋다. 그래서 그런지 모임도 활성화 되고 똘똘 뭉치며 온라인 밖에서도 서로 사이가 아주 좋다. 모임의 단톡방이 다 그랬으면 좋겠다.

카톡은 글로 소통하는 방식이지만 글에서 보이지 않는 불쾌함 또는 진실들이 묻어나기도 한다. 이상하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단어 하나에도 상대방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 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교묘하고 신기롭다.

나도 가끔은 상대방들의 경우 없는 일들에 반기를 들며 내 생각을 거침없이 써놓았다가 내 글이 계기가 되어 단톡방의 글 올리기 제한적인 시점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 지겨운 말장난들의 소식들이 싫어서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바로 흘러가는 것에 속으로 좋아라 한 적도 있다. 정말 공지 모임의 단톡방이라 명하면 공지만 올리는 그런 방으로 되어 가기를 진정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다 보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으니 조금은 같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어떤 모임은 내가 리더인데 다들 답변이 너무 부진하여 그 단톡방을 없애려고 맘을 먹었었다. 그리고 카페가 있으니 카페의 활성화를 위해서 닫아버리려고 맘을 먹었다. 서로 톡을 나누는 방을 만들고 같이 참여 했으면 눈팅만 하지 말고 예, 아니오 정도의 자신의 의견을 어필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아님 정말 공지만 올리던가…


카카오톡은 (kakao+Talk)카카오에서 따온 말로 달콤한 대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식통의 자리로 매김하고 있다. 다양한 정보와 소식들로 많은 이들을 눈뜨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톡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화 속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많은 유익한 것을 알려 주기도 하지만 절대 경험해서는 안 될 많은 것들도 존재한다.

카카오톡이라는 이 메신저는 핸드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사용을 할 것이다. 다양한 모바일의 메신저가 있지만 그 점유율은 비단 카톡이 95%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 국민으로 쳐도 카톡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경험하면서 힘든 노력 끝에 성공을 거둔 카카오톡, 유래 없는 카카오톡의 성공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일생에 한 번 겪기 힘든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들 역시 “과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정도의 성공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에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이 카카오톡을 좀 더 유익하게 사용했으면 한다. ‘카카오톡=달콤한 대화’처럼 우리의 대화도 달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