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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훨훨 타르초 외 6편 /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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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3-12-1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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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란?

단어가 이 시점에서 쓰이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문학이란 큰 호수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시'란 한 가닥 구명줄 잡고서 겨우 새로운 인생을 도전한다.

한 편의 시를 내는 것은 가슴 한쪽을 저미는 것 같고

한 줄의 글은 고뇌와 정열을 삭혀서 고운체에 내린 산물이다.

나의 요리는 맛이 없다.

곰삭은 맛에, 시 몇 줄 얹어 곱씹고 되새김질하시면 문학의 참맛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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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훨 타르초



하늘 땅 불 구름 바다

파랑 노랑 빨강 흰 초록

절박함

땅속에 머리 박고 사지를 떠는 룽다*


위대한 히말라야 고결한 나체

석벽 빙벽에 철심을 박으며

로프 하나로 인생을 담보한다


타르초 타르초* 바람 타고 하늘 타고

향내는 바람 태우고 수만 리 춤춘다


자연의 위대함

나약한 인간 우주에 실토한다


룽다 룽다 바람을 잠재우고

타르초 타르초 구릿빛 얼굴을 기다린다.


* 룽다 : 고개와 산꼭대기에 수직으로 세운 나무 기둥에 매단 오색 깃발을 말함

* 타르초 : 만국기처럼 길게 매단 깃발을 사원의 앞 마당이나 길옆에 세워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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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흰 두루마기

빽빽이 늘어선 원대리 산자락


계절 따라 갈아입지 못해도

순백의 자존심 잃지 않고

한 겹 두 겹

억압의 굴레 벗으며

민족의 자긍심 내비친다


매서운 삭풍에도

쓰러짐 없이 곧추세우며

창살 없는 창공을 향해 자유란 두 글자

격렬하게 써 내려간다

하늘빛 담은 눈망울

모름지기 독립을 갈망한 응분이 맺혔다

꺾이지 않은 굽힘은 우리의 기상이다

흰 두루마기 핏빛으로 짓이겨도

조국의 광복은 밝아 온다


자작나무

굽 힘만큼 펴질 때

독립의 열망 드높이 더 멀리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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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매화



가야금 뉘고 열두 줄 뜯는 소리

건청궁* 판문 새로 여흥 넘치고


사내들 턱 아래 꾀꼬리 노래하면

배래* 소맷부리 춤을 춘다


서쪽 눈썹달 쓰러지면

밤새며 꽃은 피고 지고


사슴 목 되어

별궁에 붉게 핀 매화

눈물 뚝뚝 붉은 꽃잎 툭툭.


* 건청궁 : 1873년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재정이 아닌 내탕금을(왕의 사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했던 편전이다.

* 배래 : 한복 소매 아래쪽에 물고기의 배처럼 불룩하게 둥근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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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



힘겹게 구르는 우마차 소리

창살 너머 옥죄는 쇠사슬

구성지게 단내를 태운다


신분 귀천이 있어도 사람은 귀인이라

동인이라 서인이면

소론이고 노론도 같은 백성인데


붕당朋黨 서로를 흔들고 죽임당하니

북쪽 하늘 끝 삼배

동쪽으로 일배

무릎 앉혀 흙냄새 가슴속 적셔 두고

아득한 탄식에 눈물 솟구친다


서리 맞은 산자락 핏빛 물들고

우마야 구르지 마라

삐거덕 소리도 내지 마라라

되넘어 가고픈 마지막 재岾

임 향한 맑은 꽃향기

일천 년 가슴 속 슴베*되리라.


* 슴베 : 칼, 괭이, 호미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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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로村老 골목길을 사랑했다



붉은 해 혓바닥 낮달마저 밀쳐 내면

어둠이 둥지를 튼다


땅거미 내려앉은 봇둑길 건너

시퍼런 달빛 젖은 양지 마을


온종일 언덕배기 오르는 연탄 지게

깔딱 숨 넘기며

어두운 골목길로 빨려 들어간다


노다지 꿈은 타버린 연탄재처럼

그곳에 떨어지고

밤바다 새로운 별똥별 찾아 헤매이는 꿈길


밟아도 아픔 모르는 그림자

밤도 떼어놓지 못한 가로등

청춘은 어둠에 묻혀도

촌로村老 골목길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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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魂 실은 나무



내 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이르길

도끼날 한 치만 더 크더라도

저놈은 쓰러졌을 텐데

허 이참 고얀 놈 숨이 길구나


내 할아버지께서 이르길

저놈을 베어 아리수阿利水 뱃길에 띄우기만 하면

한양서 제일가는 떼꾼 되것만

햐아 그놈 참 몸값 하네


곧은 성품 오죽烏竹 어깨 견주고

청렴하기 옹달샘 명경* 비추니

당대 네 위로 없으랴


만대에 이르러 금강송이라 칭하노라.


* 명경 : 아주 맑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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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머리에 수건 쓴 채 

바쁜 손놀림은

부뚜막 솥단지 사이로 롤러코스터를 탄다


아랫마을 함석집 며느리 

늦바람 쐬어 짐 나갔단다

아궁이 불 지피는 할머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머니는 들은 척도 없이 

구정물 들고 정지 밖으로 봄 감춘다 

얘, 어멈아 들었나...

미심쩍은 듯 할머니 반문한다

"애비한테 바가지 긁지 마라 

그 소리는 귓등을 스쳐 삼심 리 달아났으리라


어머니를 항변이나 한 듯이 

무쇠솥은 직거리며 눈물을 흘린다 

늦은 저녁 호박 장국 달기만 하다


바람, 부, 여자 삼각관계 

요즘은 바람들까 봐 아니면 바람날까 봐 

콧바람도 못 들어오게 마스크로 꼭꼭 싸매며 

얼씬도 못 하게 방범을 선다


마스크 사라지는 날 

바람은 전설로 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