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2023년 [시] 수선화 외 9편 / 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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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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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봄볕 따스한 날 장바구니 들고
골목길 돌아서는데
귀녀 할머니
“새댁 장에 가나”
수선화 옆에 앉아 나를 반긴다
과일 두 개 생선 두 마리
부엌문 앞 몰래 두고 오면
수선화 고마워 방긋 웃는다
할머니 요양원 가시던 날
수선화 노란 얼굴로 울고 있다
이듬해 쌀쌀한 봄날
귀녀 할머니
하늘나라 가셨다고
수선화 고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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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미소가 예쁜 봄날
봉고차 꽃나무 가득 실고
철물점 마당에 서 있다
탐스럽게 핀 수국 눈부시다
난초꽃도 제비 입처럼 피었고
그중 녹색 잎 주렁주렁 달린 거 골라
아저씨 이거 얼마인가요
꽃이 피면 행운이 온다 하던데
커피 한 잔 값 주고 데려왔다
물을 주며 웃는 얼굴 보고픈데
말을 건네 보고
꽃봉오리 보인다
가슴이 벅차 흥분하며
얼마 만에 만났지
삼년을 기다렸다
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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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의 눈
막대 사탕 물고
다섯 살 꼬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이모 쳐다보니
이모가 아닌데요
그럼 아줌마
아줌마 아니고요
할머니가 되려고 해요
수정 같은 눈 아니고
매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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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살기 위해 피난길 나섰다
생명줄은 작은 배
언제 돌아올 기약 없이
흥남부두를 떠나
북위 38도 지나
남쪽으로 넘어올 때
미군 헬기가 삐라를 뿌렸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밀가루 포대
다들 처음 보는 거라 의심스러운 눈치
이걸 가지고 떡장물 해서 먹으면
참 맛이 좋습메
누군가 말했다
이북 사람들에겐 처음 먹어 본 수제비
피난길 목숨은 험난했어도
허기진 배를 채운
밀가루 삐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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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7반
시시하게 시를 썼다.
등단이라고 시인님이라 부른다
6학년 7반에 ‘갈뫼’ 입학도 하고
어린 시절 추억을 꺼내고
가슴에 박힌 가시도 빼내어
썼는데
뜸 들다만 밥처럼
윤기도 구수함도
없는 설익은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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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보석
너는 어디서 왔을까
태양 빛 따라왔지
서해 거친 해풍 타고
온 거야
깊은 바닷속에 숨어 있다
왔을 거야
누구의 혀에 귀한 몸
녹여 줄까
명품 보석이라 비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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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아버지가 사 준 고무신
누가 훔쳐 갈까
모래밭에 묻어 놓고
신나게 물놀이하다
태양이 구름 속에 들어가면
영금정 바위에 배 깔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다
해 넘어 갈 때 엄마가 부르면
넓은 모래밭 다섯 자매들
모두 나서도 끝내
찾지 못한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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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저녁노을 붉게 물들이더니
설악산 단풍 내려오는 중
따가운 햇살
사과나무 포도나무
그늘에 놀다 가더니
빨강 초록 보석 달아 주고
밤이슬 조용히 내려앉더니
방울방울 물감 만들어
나팔꽃 백일홍
화단에 수채화
그려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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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시장 골목길 콩, 조, 여러 가지 곡식
한 홉씩 한 대박씩 담아
좌판대 놓고 졸고 있는 할머니
지붕 위에 비둘기 들
때를 기다린다
만찬의 기회가 시작이다
그때
할머니 화장실 다녀오더니
손뼉 치며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우짜노 마이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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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치다
장성한 아들 둘이나 있으니
어여쁜 규수들 지나가면
며느리 삼고 싶어
슬쩍 훔쳐보며
소싯적 나에게도
많은 늑대들이
훔쳐보았겠지
백합처럼 활짝 핀 꽃
날마다 훔쳐더니
이제는 호박꽃이라
쳐다보지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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