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2023년 [시] 귀뚜라미의 부활 외 9편 / 홍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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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걷다 보면 채워지는 목표 수의 걸음처럼, 꾸준히 활동했던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시어를 통한 글로 전해지는 수행길을 게으르지 않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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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의 부활
가만히 눈을 감은 작은 주검
울음으로 토해 낸 전생 이야기
여름이 끝나고 그도 떠났다
꼭 다문 입안 노잣돈 꽃씨 한 톨
경건한 장례를 치른다
귀뚤 맴도는 노랫소리
극락으로 인도할 연꽃 한 송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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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마중
내게로 스며드는 가을 마중길 나선다
질끈 머리 동여 묶고 뜨락에 선다
장맛비에 성성해진 풀을 젖힌다
흙 내음 속엔 바람의 맛이 난다
다시 핀 분홍 에키네시아 까르륵 웃고
흰 바늘꽃 한들 날갯짓
바삐 걷는 햇살 한 줌 잡고 노닌다
키 훌쩍 목 긴 해바라기
알뜰히 품에 안긴 씨앗 키워 낸다
곁눈질 배운 호박 노란빛 집을 짓는다
가만히 풀밭에 앉아 그들을 본다
영근 바람이 불고, 꿀을 빚는 벌 떼는 날고
따사로운 가을 성큼성큼 걸어온다
가을 찬란히 펼쳐지는 빛의 날들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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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피다
하얗게 피어난 행복이 터진다
톡 톡
알맞게 익은 부지런함이 웃는다
가을볕 따가워도 좋아라
한나절 늘어진 낮잠 즐긴
어미 누렁이 새끼들 젖 물린다
붉은 노을 따라 놀다 온 아이들
입가 가득 묻은 가을
따사로운 바람에 어물쩍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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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날
눈물 지우개로 썼다 지운 삼백예순다섯 날 지나
상서로운 빛 잎새 우는 오동나무 위
사뿐히 내려오시는 나의 님
다시 만나는 날
잘 닦아 놓은 달 하나 훤하니 켜 두고
정성껏 유하주流霞酒* 빚어 봅니다
이날을 위해 참아 두었던 울음
기쁘게 웃으면 맞이합니다
한 마리 새가 되어 오신 나의 아버지
오동나무 잎새 서걱 밟으며 오시는
나의 아름다운 님
이맘때 되어야 나의 눈물은 마르려나 봅니다.
* 유하주(流霞酒) : 신선이 마시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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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종일 기다림으로 뻣뻣해진 목덜미
높이 올려 보아도 보이는 건
푸른 멍울 출렁이는 들판뿐
붉어지는 목메임
머릿속까지 선홍빛으로 물들어
퍼런 서걱임 출렁이며 흐른다
풍선 되어 설레던 날 모여
부풀었던 가을
따라 놀던 해넘이 저녁 즈음으로 사라지고
풀로 태어나도 찾을 애잔함
노을 되어 그대에게
스며들어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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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문 뜨는 날
잊은 채 모른 척 지낸 날들
푸른 바다에 당도해
은빛 비늘로 솟는다
이제 찾아옴을 점잖게 어루만지는
고요한 영겁의 눈빛
밤의 장막 훤하게 열어 두고
노니는 금빛 융단 위를 걷는다
투명하게 속살 비추고
맞잡을 듯 가까운 거리에 우뚝 동그랗게
다가오는 그대의 얼굴은 붉게 타오른다
시린 가슴 치유하는 홀씨 하나
가슴에 묻으며 다시금 떠나는
별들의 세계
그 이름 그리운 그대 머물러 계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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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애상
바스락 한 줄 바람에
서글픈 계절을 달려갑니다
까닭도 없이
그리운 얼굴 찻잔에 띄워 놓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이 재잘 맴돌다 사라집니다
허공에 머문 추억
오색 단풍 위에 걸쳐 앉아
그 시절을 물들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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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된 바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뭍일까
하얀 포말로 우뚝 일어서는 바다
고독한 심연의 늪
바다도 물이 깊어지면
감당치 못하는 무게 벗으려 토해 낸다
포효하는 아우성
헤집고 들어오는 통증
깊게 박혀 뿌리내리려 한다
물살이 가라앉으면
고요히 떠오를 하나의 섬
한 폭 풀 한 자루 보듬을 한 평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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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사랑으로 밀려와 안기어
그리움 되어 떠나가는
슬픈 가을 파도 소리
산가엔 별빛 드리워지는데
허기진 삶 채울 수 없어
먹이 찾아 비상했다 가라앉는
민초들의 갈매기 떼 날갯짓
목이 터져라 외치면
이룰 수 있는 꿈이더냐
부르다 지쳐 스러질 사랑이더냐
온몸이 부서져 내려도
당신 향한 푸르른 내 빛
퇴색되지 않으리
녹아 흐른 거품 된 육체
깊고 깊은 그대의 바다에서
영원한 항해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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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여정
빛의 속도로
쿵 하고 안기는 너의 여정
이날을 위해
삼백예순 닷샛날 고행을 했을 터
별이 죽고, 별이 태어나는 날들을
침묵으로 지켜 내며
평온한 얼굴빛으로 다가온다
푸른 별을 돌고
깊은 바다를 첨벙 건너
모래바람 이는 사막을 걸어
두 눈 크게 뜨고 왔으리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수많은 바람을 가슴에 품어
함께 걷기 위해 나에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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