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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귀뚜라미의 부활 외 9편 / 홍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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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3-12-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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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걷다 보면 채워지는 목표 수의 걸음처럼, 꾸준히 활동했던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시어를 통한 글로 전해지는 수행길을 게으르지 않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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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의 부활



가만히 눈을 감은 작은 주검

울음으로 토해 낸 전생 이야기

여름이 끝나고 그도 떠났다


꼭 다문 입안 노잣돈 꽃씨 한 톨

경건한 장례를 치른다


귀뚤 맴도는 노랫소리

극락으로 인도할 연꽃 한 송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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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마중



내게로 스며드는 가을 마중길 나선다

질끈 머리 동여 묶고 뜨락에 선다


장맛비에 성성해진 풀을 젖힌다

흙 내음 속엔 바람의 맛이 난다

다시 핀 분홍 에키네시아 까르륵 웃고


흰 바늘꽃 한들 날갯짓

바삐 걷는 햇살 한 줌 잡고 노닌다


키 훌쩍 목 긴 해바라기

알뜰히 품에 안긴 씨앗 키워 낸다

곁눈질 배운 호박 노란빛 집을 짓는다


가만히 풀밭에 앉아 그들을 본다


영근 바람이 불고, 꿀을 빚는 벌 떼는 날고

따사로운 가을 성큼성큼 걸어온다


가을 찬란히 펼쳐지는 빛의 날들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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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피다



하얗게 피어난 행복이 터진다

톡 톡

알맞게 익은 부지런함이 웃는다


가을볕 따가워도 좋아라

한나절 늘어진 낮잠 즐긴

어미 누렁이 새끼들 젖 물린다


붉은 노을 따라 놀다 온 아이들

입가 가득 묻은 가을

따사로운 바람에 어물쩍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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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날



눈물 지우개로 썼다 지운 삼백예순다섯 날 지나

상서로운 빛 잎새 우는 오동나무 위

사뿐히 내려오시는 나의 님


다시 만나는 날

잘 닦아 놓은 달 하나 훤하니 켜 두고

정성껏 유하주流霞酒* 빚어 봅니다


이날을 위해 참아 두었던 울음

기쁘게 웃으면 맞이합니다

한 마리 새가 되어 오신 나의 아버지


오동나무 잎새 서걱 밟으며 오시는

나의 아름다운 님

이맘때 되어야 나의 눈물은 마르려나 봅니다.


* 유하주(流霞酒) : 신선이 마시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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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종일 기다림으로 뻣뻣해진 목덜미

높이 올려 보아도 보이는 건

푸른 멍울 출렁이는 들판뿐


붉어지는 목메임

머릿속까지 선홍빛으로 물들어

퍼런 서걱임 출렁이며 흐른다


풍선 되어 설레던 날 모여

부풀었던 가을

따라 놀던 해넘이 저녁 즈음으로 사라지고


풀로 태어나도 찾을 애잔함

노을 되어 그대에게

스며들어 피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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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문 뜨는 날



잊은 채 모른 척 지낸 날들

푸른 바다에 당도해

은빛 비늘로 솟는다


이제 찾아옴을 점잖게 어루만지는

고요한 영겁의 눈빛

밤의 장막 훤하게 열어 두고

노니는 금빛 융단 위를 걷는다


투명하게 속살 비추고

맞잡을 듯 가까운 거리에 우뚝 동그랗게

다가오는 그대의 얼굴은 붉게 타오른다


시린 가슴 치유하는 홀씨 하나

가슴에 묻으며 다시금 떠나는

별들의 세계

그 이름 그리운 그대 머물러 계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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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애상



바스락 한 줄 바람에

서글픈 계절을 달려갑니다


까닭도 없이

그리운 얼굴 찻잔에 띄워 놓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이 재잘 맴돌다 사라집니다


허공에 머문 추억

오색 단풍 위에 걸쳐 앉아

그 시절을 물들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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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된 바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뭍일까

하얀 포말로 우뚝 일어서는 바다


고독한 심연의 늪

바다도 물이 깊어지면

감당치 못하는 무게 벗으려 토해 낸다


포효하는 아우성

헤집고 들어오는 통증

깊게 박혀 뿌리내리려 한다


물살이 가라앉으면

고요히 떠오를 하나의 섬

한 폭 풀 한 자루 보듬을 한 평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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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사랑으로 밀려와 안기어

그리움 되어 떠나가는

슬픈 가을 파도 소리


산가엔 별빛 드리워지는데

허기진 삶 채울 수 없어

먹이 찾아 비상했다 가라앉는

민초들의 갈매기 떼 날갯짓


목이 터져라 외치면

이룰 수 있는 꿈이더냐

부르다 지쳐 스러질 사랑이더냐


온몸이 부서져 내려도

당신 향한 푸르른 내 빛

퇴색되지 않으리


녹아 흐른 거품 된 육체

깊고 깊은 그대의 바다에서

영원한 항해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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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여정



빛의 속도로

쿵 하고 안기는 너의 여정


이날을 위해

삼백예순 닷샛날 고행을 했을 터


별이 죽고, 별이 태어나는 날들을

침묵으로 지켜 내며

평온한 얼굴빛으로 다가온다


푸른 별을 돌고

깊은 바다를 첨벙 건너

모래바람 이는 사막을 걸어

두 눈 크게 뜨고 왔으리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수많은 바람을 가슴에 품어

함께 걷기 위해 나에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