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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청춘 외 4편 / 이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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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3-12-15 10:47

본문

해마다 지지부진한 시 농사

속수무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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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바다에 빠진 아침 해를

건져내어

그대와 나의 자리에

놓아둔다


이처럼 뜨거웠을까


말간 봄꽃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에

가슴 저린 적 있었던가


휘파람 불며 걸어가는

새파란 면도 자국 훔치며

붉히던 마음

간직했던가


내 안의 나와 부딪치며

길 밖으로 내몰리다

잠 못 드는 밤

밝혔던가


그 이름들 스러진 자리

그대라고 이름 짓기도

미안하여

백일홍 붉게 터지는


골목길 돌아 나오며

까닭 없이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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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거리 구멍가게 오십 년 어머니 한글은 몰라도 계산은 틀림없네 아담한 주상복합 이층집 일찍 가신 남편 대신 아들딸 어엿하지

해수욕장 펜션 장사 여사님 얼굴 본 지 오래인 원광전기 삼 층 건물 집이 세 채

납작한 지붕 담장에 닿을 듯 옆집 풍산개, 고개만 내밀고 짖느라 정신없는 뒷등 쪽으로 몰래 들어가 까치발 종아리 무릎으로 눌러주고 튈 수 있을까

순하게 엎드린 작은집 할머니 이태 전 동네 미장원 앞 도로 건너다 하늘까지 가신 뒤, 장가 못 든 큰아들 들어 온 뒤로 방문 겸 현관문 자주 열려 있네

바닷가 척척 올라가는 아파트 원정 오신 인부들 방이 모자라 속초모텔 주차장은 만원


반장 집 세 들어 수타면 뽑아 직접 배달하는 영랑반점, 오토바이 사고 세 번에 시름시름 앓다가 문을 닫고 작명, 택일, 사주 간판 걸리더니 그새 지점만 세 개라는 성인용품 분홍분홍 잠투정 밤 투정하는 영감님 껴안고 주무시게 죽부인도 있냐고 물어볼까

주민센터 작은 도서관 방 빼는 날, 할머니 손잡고 찾던 손녀들 막아 주세요! 인건비며 유지비에 어려운 시청도 답답해서 그런지 도로만 파헤치지

찰거머리 개발업자 붙었다는 사십 년 눅거리철물 한사코 문을 여는 새벽

마을금고 일등 안심 금고 빚만 있는 나는 뺄 수도 없으니 제대로 안심이네

유모차 끌고 운동 나온 할머니 안녕하세요?

고깃값 대신 넘겨받은 갈빗집 고층아파트 짓는 대기업에 팔려 돈방석에 앉았다는 정육점 사장님, 널따란 가게 사서 문 열기 전부터 함께하실 주방, 써빙 모신다는 현수막, 일 년이 다 되도록 펄럭이는데, 보리밥집 네팔 청년은 대학원생 고학력인데 일도 잘하지

올려다보면 고개 꺾여 멀미 나는 아파트 페인트칠하는 것 보니 준공이 눈앞


언덕 위 우리 집

불빛 돌아가는 등대 못 본 지 오래

별 보기 어렵겠네

달 보기도 힘들겠어

멀리 있는 둘째 보듯 가끔 만나는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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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



그해 봄 우리는 서툰 솜씨로 감자를 심었습니다

풀을 매고 두둑을 얹었지요

씨감자 한쪽 햇볕을 받으며 비를 거둬 순정한 일가를 이루는 동안 돈벌이를 위해 몸을 굴리고 정신을 볶았습니다


하지 지나 장마 온다기에 서둘러 감자밭에 머무는 발길

꽃도 못 피운 감자알 제법입니다

아침저녁 호미질에도 감자밭은 여전히 푸르고 키 큰 풀도 그대롭니다

아들 며느리 어린 손녀와 사돈도 모자라 친한 동생, 동생 친구까지 불렀습니다


비 오기 전날 마저 캔 감자, 남편 몸 어딘가 헐어 병원을 들락거리는 동안 나누고 팔고 저장했습니다

쌓여 있던 창고를 쓸어 내며 웃음이 나옵니다


마감이 빠듯한 시를 찾아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머릿속은 하얗고 몸은 뒤틀립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없지요

흙의 심장으로 석 달을 빚어 저를 완성한 감자 두 마지기 수확하고 우쭐댄 부끄러움이 고개를 듭니다


농사란 때가 있다는 걸 깨닫지만 지지부진한 시 농사

모자란 심장이며 게으른 땀방울이 속수무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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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봄꽃, 가을 달

행여, 소용도 없이

쟁여 놓은 시진 첩 속으로

새벽 항구를 거푸 밀어 넣는 길


즐비한 수족관

켜켜이 쌓여

달빛에 꽃잎 베이듯

비명도 없이

가라앉은 물고기들


어느 항구에서 펄떡이며 내렸는지

먼 남쪽 양어장에서

신호도 무시한 채 밤새 달려와

와글와글 갇혔는지


각혈처럼 번지는 아침노을에 젖어

돌아온 날


밥상에 올린

생선구이 위에서

젓가락이

바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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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동창회

― 반백 년 동창회에 부쳐



어머니

허리가 접힌 채 내다보시는 골목

반질반질 코 묻은 소매 끝

움켜쥔 주먹으로 내달리던 동무들아

풀들 적막히 무성한데

무거웠던 아버지 어깨

고사리 너덧 포기 올려놓으셨네


세상 곳곳 날아들어

살과 뼈로 둥지를 짓고 새끼를 치는 동안

날개를 접으며 발톱을 봉인하고 간과 쓸개를 버렸지


빌딩 숲 유리창에 부딪혀

날아오르지 못한 동무야

등불 하나 꺼진 듯 마음 갈피가 어지러웠으나

총총거리는 발자국에 묻혀 스러지곤 하지


하얗게 부서지는 울음 파도처럼 밀려들기도 했을 게야

뒤돌아볼 수조차 없는 부끄러움 온몸 붉혀도 봤을 게야

울울창창 자라나는 그리움 시린 늑골도 앓았을 게야


그래

세상 언저리를 맴돌던 울분

깊어지는 후회


겨울 들바람처럼 매서웠던 시간들

모두 내려놓는 거야

남몰래 두근거리던 연애편지처럼

순정했던 시절 꺼내놓는 거야


이제

어깨를 보듬듯

상처를 어루만지듯

서로를 읽는 시간이야


우리

가슴 뜨겁게 지피며

날아오르는 꿈 꾸어도 돼


숯불이 재가 되어 대지로 스며드는 날까지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