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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향낭 외 6편 / 조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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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3-12-15 10:53

본문

하루가,

계절이 바쁘게 지나간다.

게으름이 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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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낭



나의 손을 살포시 잡아

그대 가시는

길섶 어디쯤에 놓아두세요


가끔은 외롭고

때로는 행복하고

현실이 힘들지라도

내일은 희망으로

스미는 내음 담아 둘게요


잔잔히 흐르는

세월의 향기


저물녘 당신은

향낭 가득한 기억으로

두고두고 취하는

모래미* 인생입니다


* 모래미 : 막걸리 원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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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란의 불효



밤마다

동네 원성이 높았다

몇 여자를 거느린

수탉의 사랑놀음


내 사랑은 떳떳하다고

목울대 길게 빼고

홰치는 아침


새집 지어 정성 들인 아저씨

유정란 몇 알씩 거두어

명절날 고향 다니러 온 자식들에게

고이고이 품었다 건네지만


고단한 먼 길에

짐 되는 흔한 것이라며

슬그머니 내려놓고 떠난

그날 이후


조용한 밤이 쉬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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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을 내며



바다로부터

눈이 뽀얗게

꽃잎으로 흩어지던

그 언제


우리 서로 말없이

처음으로

되돌아서고 싶었다


대책 없이 내리는 송이 눈이

지워버린 길

젊은 날

푸른 밤톨 같은 객기를 묻고

무작정 달리며


첫 발자국이 되어

첫 마음이 되어


서투른 나이에

서로를 묶어 버린

지난 그 어느 날


새로운 길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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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사



겨울을 건너온 봄이

인사를 한다

일 년 동안 잘 계셨어요


등 뒤에서도

곁에서도 툭, 툭

그동안 건강하시죠


두런두런 소곤소곤

우리 안 보는 사이

세상 참 많이 변했죠


여전히

꽃은 피어

봄인사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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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프다



바람 불어

봄이 아프다


냉랭한 계절 푸른 속살 열어

싱그러운 휘파람 소리 즐거운데


청하지도 않은 너는

꽃들의 찬란한 날개를 꺾으며


내가 아껴 둔 하나의 추억을

휘감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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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여운



보란 듯이

봄이 온다

도도한 콧날에 향낭을 달고


반쯤 내민 삼월 입술이

봄빛 수줍도록

꽃신 벗어 놓고

너울춤을 추다


이팝 하얗게

송이 지는 그즈음

뜨겁게 마음이 안 고픈

따뜻한 햇살 거두어


댓돌 위

꽃잎 자분자분 내리면

조용히 가리라


서운타 돌아보며

향기 가득한 이날

미련인 듯

또다시 꽃잎은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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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



더위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여름의 정점까지

그들은 오지 않았다


해거리 없이 오던 터라 

밤마다 화톳불 피워 놓고 

손님맞이 준비는 완전무장


설렘 없는 기다림

긴 늦더위와 함께

불안함으로 왔다


구척장신 남편의 강적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의 

모기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