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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아름다운 그림자 외 9편 / 양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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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0회 작성일 23-12-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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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지 

일 년이 금방이다.

주어진 하루를 마치 남의 것인 양 

생각 없이 보내 버리고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들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산다는 것이

어떤때는 긴 지루함으로

 또 어떤 때는 너무나도 짧은 

한순간으로 느껴지는 건 

나만의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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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자



횡단보도 옆 전신주에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 하나 붙어 있다

잔뜩 묻어 있는 먼지

퇴색하다 못해 숭숭 구멍도 뚫려 있다


세상에나

한들거리는 바람 따라

태양 빛에 비친 그 그림자

저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팔십 평생을 살아온 내 삶에도

켜켜이 먼지가 내려앉고

할퀴고 멍들어서

흉칙하며 냄새나는 모습일지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 만들어 줄

밝고 따스한 마음 한 자락

더듬어 찾아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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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방울의 비밀



그늘진 솔밭을 걷다가

솔방울 몇 개 주웠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나무로 깎아 만든 꽃송이일까

어젯밤 쥐들이 몰래 쌓아 놓은

작은 탑들일까


아니 아니

소나무가 씨앗을 꼭꼭 숨겨 놓은

자신을 향한

뜨거운 연서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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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 언덕



주님이 마지막 걸으셨던 그 길을

나도 따라 올라갑니다


내딛는 걸음걸음에

수모와 고통과 몸서리쳐지는 배신감을 쏟아 내시며

오르셨을 주님

셀 수도 없는 나의 죄까지 더해져서

등에 진 십자가는 또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오로지 순종의 길을 위해

자신을 이겨 내고 몇 번이나 이기셨을

애처로운 주님


주님을 닮고 싶지만

손톱만큼도 닮을 수 없는 내가 부끄러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고 닦아 내며

말없이 그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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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곱근과 나



수학에서 제곱근은

자신과 똑같은 제곱근을 곱하지 않으면

루트를 벗어날 수가 없다


연습이 없는 삶을 사느라

험한 골짜기 열심히 헤쳐 나온

지금은 안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제곱근이 되어 준다면

그도 나도

무리수 같은 개운하지 못한 삶이 아닌

자유롭고 홀가분한

마지막을 얻을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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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더디 오네요



가을이 멀리서 머뭇거리나 봅니다

9월이 중반인데도

이마에 땀이 흐르네요


혹시

그렇게나 퍼붓던 늦은 장맛비에

놀라 숨은 걸까요

반가운 친구를 만나 시절을 잊은 걸까요


시원한 매미 소리 사라진 지 한참인데

베란다에 무궁화꽃 열심히 피고 지는데

이제나저제나

높은 하늘 소슬바람 기다리다가

내 눈이 벌겋게 짓무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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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저녁



뱃고동 소리가 요란스럽게 환영하는

이름 모를 바닷가

그 옆으로 늘어선 식당에서

춤추는 갈매기 떼 바라보며

저녁을 먹는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수많은 낚싯줄

찰나의 순간 버둥거리며

다리 위로 내팽개쳐진

물고기의 임종을 입으로 함께하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에서

내 물컵에 찾아온 장미 빛깔 노을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이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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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과 벌



넓은 초록 바다에

노란 별들이 눈부시다


어느 날

노랑 대문 활짝 열고

벌과 나비들 불러 큰 잔치를 베풀더니

조그맣고 예쁜 선물을 받았대요


큰 기쁨을 안고 별은 제 나라로 돌아갔지만

낮에도 밤에도 그 선물은 영글어 갔답니다


너도 꽃이냐고 놀림 받던

별을 닮은 그 꽃

이젠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는

탐스러운 열매로 환생한

호박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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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



거울을 볼 적마다

화들짝 놀랜다

제멋대로 늘어진 눈꺼풀

빨지 말아야 할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려버린 듯

주글주글 흘러내리는 양 볼

웃어도 울어도 못마땅한

기괴한 모습이다


지나간 긴 세월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했던

고약한 마음이

지금 이처럼 심술궂고 못생긴 그림자로

돌아왔나 보다


채찍으로 내 마음을 후려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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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함께 이 지구에 발을 딛고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시며 사는

모든 친구들

너무나도 소중하다


나만큼 행복하고

나만큼 평안하고

나만큼 건강하기를 빌어 주며

순간순간을 미움과 싫음이 아닌

좋아함과 사랑으로 그려 간다면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이

조금은 당당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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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망중한



종달리 마을 어느 카페에

바람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가만가만 의자를 흔들며

어느 해 늦 가을을 떠올린다


초록초록 작은 손 마구 흔들며

뒷걸음질 치는 가로수를

사정없이 무너뜨린 일


사나운 파도를 부추겨서

순식간에 배를 뒤집어 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쳤던 순간을


영원히 변치 않을 자신의 심술궂음에

잠깐 이마를 찌푸리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들썩이는 엉덩이를 쫓아가느라

흔들의자가 넘어질 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