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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과묵한 봉투 외 9편 / 정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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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3-12-1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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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을 공부하면서

뜬금없이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내 몸속의 욕망이라는 장기를 채우기 위해

무수한 헛것을 좇으며 허당으로 살진 않았는지.

욕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라는 것을.

욕망에 얽매이지 않아야 우리는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자꾸 블랑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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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봉투



검은 속을 감추기 위해 눈부신 흰색을 고집하죠

생 똥 냄새가 날 때는 코 대신 눈을 질끈 감죠

애달픈 연애편지처럼 아무도 모르게

숨기면서 주고받는 것이 예의죠

굳이 묵직할 필요는 없어요

편지지 한 장 무게로도 봉투의 가슴은

벌렁거릴 수 있으니까요

가끔 배달 사고가 나기도 하죠

서로 도우며 사는 일은 아름답죠


봉투의 입을 여는 순간

거짓말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죠

누군지 모릅니다

받은 적 없습니다

일면식도 없습니다

일단 정해진 순서에 따라

모르쇠로 밀고 나가는 게 불문율이죠

봉투가 씨익 웃죠


장사 한 두 번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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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와 부조리 사이



아시아에서 음식을 조리하며

아프리카의 굶주림을 본다


둥글게 둘러앉아 갈비탕을 먹는다

아프리카 아이의 힘 없는 눈이

티브이 밖으로 나와 갈비탕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먹고 버린 뼈보다

더 앙상한 손이 빈 뼈에 닿는다

식욕을 끓이고

웃음을 무치며

왁자한 재료를 넣고

음식을 조리했던 나의 시간은

부조리였을까


축 늘어진 아이에게

빈 젖을 물리는

아프리카 여인의 메마른 가슴

빈곤은 포르노일까

지구 건너편에서 밥 먹듯 굶고 있는

검은 대륙을 믿으며 숟가락을 놓는다


조리가 부조리로 식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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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말



순한 양이란 말은 낭설이죠

거칠고 방향 감각이 없어 자주 길을 잃었죠

그래도 해가 지면 집을 향하도록 길들였죠

그제야 뿔을 버리고 순해졌죠


나의 애마 로시난테도 늘 동분서주하죠

가장 빠르고 오래 잘 달리는 말로 길들였죠

캄포 데 크립타나의 풍차를 향해 달리는 돈키호테처럼

우린 언제나 하나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양과 말은 서로를

조율하고 닮아가면서

나를 태우고 다니죠

오늘도

양과 말을 데리고 집을 나서죠

온순한 가면을 쓰고 양처럼 순해 보여도 결국 양이 되진 못하죠

도시의 유목민으로 떠돌며

가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만나기도 하죠

쉬지 않고 달리는 말의 고삐를 쥐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뛰었죠


지친 양과 말이 빨래 바구니에서 곯아떨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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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힘



주먹만 한 궁리를 쪼갠다

도시 생각하지 말고

강원도만 키우라며

약속하듯

다독다독 땅속에 묻는다


쏟아져 내린 별들이

감자꽃으로 하얗게 피는 산비탈

흙의 이마에 속삭이는 꽃말

골똘한 생각들을 키우는 뿌리

당신을 따르겠다는 맹세를 캐자

주먹만 한 약속들이

주렁주렁 강원도를 끌고 나온다


감자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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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도 지금



늘 요염하게 웃으며

손님 맞이하는 건 화류계 숙명이다

미모를 뽐내며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 것 또한 이 바닥

그래도 저마다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짝사랑으로 노랗게 가슴 앓는 것

죽도록 사랑한다고 화끈하게 고백하는 것

나를 잊지 말라며 은근하게 속삭이는 것

언제나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것

도도하게 제 몸값을 올리는 기특한 것

운명처럼 죽음의 향기 피우는 것

꽃의 이름으로 약속한 말들이 꽃말로 피어난다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짝사랑은

한결같이 노란 튤립이다

빨간 장미 한 다발 안고 나간 청년의 고백은

시들지 않았을까

파란 수국 모종을 들고 간 여자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카네이션 고르며 환하던 긴 머리 아가씨가

어제는 흰 국화를 모두 데리고 갔다


기쁨과 슬픔도 요즘은 모두 무료 꽃 배달 서비스다

평생 꽃집을 하던 내 친구 꽃말은 화류계 대모

곧 문을 닫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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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작업복



오늘도

훌훌 벗고

팬티와 브래지어로 갈아입는다

젖가슴이 보이고

배꼽도 보이고

사타구니가 보이는

나뭇잎 두 장 같은


그러나

속옷은 절대 아닌

아들딸 대학까지 공부시킨

힘센 작업복


세상의 모든 작업복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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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 빠진 이혼



서로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버린다

사랑이라고 포장되었던

위선의 총구를 내려놓자

살벌하게 장전했던 눈빛들이

그렁그렁 쏟아진다

모순을 뚫지 못한

창과 방패도 망설임 없이 던진다

아주 멀리

아군도 적군도 아닌

긴 전쟁에서 지쳐 돌아온 패잔병 둘이

서로의 상처를 절반씩 나누며

비로소 종전을 선언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묶어 놓은 투명 사슬

툭 끊어진다


후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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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남자



엄마에게 그는 특별한 남자였다 엄마는 그 남자를 잘 다루었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임연수라고 불렀다가 이맨수라고 불렀다가 이민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다를 노래한 어느 시인의 이름 같기도 했고 더러는 뽕짝을 부르는 삼류가수의 이름 같기도 했으며 어느 때는 멋진 영화배우 이름 같기도 했다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그는 나긋나긋하게 엄마에게 순종적이었다 엄마의 지극한 손길에 어쩌면 영혼도 맡겼을 터


가끔 아버지와 다툰 날이면 엄마는 휑하니 이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보란 듯이 이 남자를 데리고 와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로 시작되는 총각 선생님을 부르며 지지고 튀기고 구우면서 엄마는 남자를 요리했다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칠 때도 이 남자를 대접하면 체면이 서기도 했다 엄마에게 있어 남자는 시인이고 가수이며 잘생긴 배우였다 하지만 엄마의 이 비린 사랑도 길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엄마는 칼처럼 이 남자를 버렸다 아버지와 이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엄마 어쩌다 사람 이름을 얻어 망망한 바다에 호적을 둔 임연수 씨


매정하게 돌아선 엄마가 그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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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플라스틱 하루



플라스틱으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아침을 먹으며

플라스틱 옷을 입고

플라스틱 커피잔을 들고 출근한다


플라스틱 속에서 일하며

플라스틱 대화를 주고받다가

플라스틱 음식을 포장해서

플라스틱 집으로 온다

플라스틱 침대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꿈꾸지만

플라스틱으로 굳은 몸과 마음

플라스틱 절정을 나눌 뿐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아기가 곧 태어나

플라스틱 우유로 자랄 것이다


안녕! 플라스틱 지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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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방 여인숙



이 기억 좀 놔 봐요

아직도 내가 스무 살의 꽃으로 보여요?

당신은 해풍으로 불어와

나를 흔들지만

나는 그저 눈썹에 낮달을 얹고

차라리 쪽배처럼 둥둥 떠다니고 싶어요

이따금 술잔처럼 흔들리지만

불행을 정박하는 밤은 그래도 따뜻해요

밤마다 빈 배로 누운

몸 저 아득한 곳

아직도 내 안에는 섬 하나 당신으로 남아 있고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비릿한 물안개가 늘 피어올라요

우리의 기억이 흑백으로 남아 있다면

지금쯤 나는 낮달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목선이 되어 온종일 낯선 바람만

실어 날랐을지도 몰라요

거리 화가의 그림 속 여자들처럼

낡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을까요

나비부인처럼 당신을 기다렸을까요

꼼짝없이 한 곳만 바라보았던 청춘을 매립하고

폐선이 된 나는

달이 빠져나간 섬에서 아직 나오지 못했어요

낮달은 자꾸 멀어져 가는데


*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