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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사발의 독백 외 9편 / 정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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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 23-12-15 11:57

본문

더듬이 세운

달팽이 한 마리 기어간다.


늙는다는 건 느려지는 것

안경 너무 세상이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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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의 독백



이곳저곳 흠 많은 너는

내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


네가 사발이 아니라

비취색 청자라면

나의 생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매화향 풍기는 여인이 되었을까


수려함만 믿고 도도하게 굴다

깨어질 날 기다리는

금 간 청자가 되었을까


이리 가도 저리 가도 흘러가는 길


밥사발 묵사발 죽사발 …

용도 다양하게 애용됐던 막사발이라

심심할 틈이 없었던 시간


그래도 감사하지

흠이 더해질수록 색이 바래갈수록

용도가 줄어들잖아

쓰이는 사발이 아니라

골라 담는 사발이 되어 볼까

숨 크게 쉬고 절대 기죽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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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꽃



꽃이 핀다

추수 끝낸 들판 젖은 낙엽 속에

슬그머니 뿌리내린 꽃

겨울이 가고 몇 번의 봄이 와도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뿌리를 뽑으려는

날 선 손톱의 호미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역 넓히는

들풀보다 질긴 생명력


스트레스를 줄이면 시든다기에

서둘러 직장을 접고

버리고 비우며 명상에 들어도

잠시 숨 고르다 다시 고개를 드는 꽃


밤마다 스멀스멀

꽃가루 날리며 몸 곳곳을 누빈다

가려움을 긁어내느라

손톱 끝에 피가 맺히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반성문을 쓴다

젖은 낙엽 몸 안에 쌓아 두고

방치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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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6

― 꽃과 돌



만냥금 화분에

잿빛 몽돌 몇 개 앉아 있다


줄기 아래 조롱조롱 달린

만 냥짜리 빨간 열매 맺기까지

흔들리며 지나온 노정에

귀 모으는 몽돌들

뿌리 눌러 주며 열매 함께 키운다


밤이 되면 알을 깨고

아기별로 올 것 같은 둥근 돌을

어미 새인 양 품어 주는 만냥금


거실 풍경 엿보던 달님

꽃과 돌의 동행 길에

금빛 가루 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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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에서 온 꽃이니



세상 구경 온 지

두 달 조금 넘은 것이

탁구공만 한 두 주먹 움켜쥐고

용을 쓰다가

치자 물들인 전 반죽

푸짐하게 싸놓고

큰일 했다고 생글거리더니

비운 배 채워달라 우렁차게 운다


마음 빨리 읽어 주지 못한 할미

울음으로 혼쭐내고

활짝 웃으며 옹알이하는 아가


저 예쁜 꽃 어느 별에서 왔을까


흥겨운 노동요 부르며

옹알이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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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요람



낯선 세상에

혼자 오기 두려워

손안에 별 두 개 꼭 쥐고 온 아기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두 주먹 꽉 움켜쥔다


백일이 지나자

손에 쥐고 온 별, 빛을 잃을까 봐

아기는 울음에 별들을 담아

하늘로 올려 보냈지만


아기 걱정에

밤마다 창을 넘는 별들

금빛 요람 흔들며

하늘 이야기 들려준다


부모는 모른다

혼자 잠든 아기를 밤새워 지키는 건

홈캠의 외눈과 알람이 아니라

아기 걱정에 잠들지 못하는

밤하늘 별들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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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늪



집을 품고 있던 시간의 깊이만큼

녹슨 기억을 지니고 있을 빈터에

길 잃은 울음이 머문다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였던 그곳

내력을 알 수 없는 빈터에 남아 있는

대문을 달고 있던 기둥 두 개는

놀이의 시작 점인 술래의 집이었다

기둥이 경아 동생 미아를 덮치기 전까지


듬직한 우리들의 기둥

청이끼 입고 자리 지키던 친구가

느닷없이 무너져 내린 날

우리들의 시간도 그렇게 무너졌다


붉은 피로 물든 그곳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던

유년의 기억


흐르는 시간도 지우지 못하는

붉은 울음과 허공을 흔들어 대던 외계의 언어들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헤어날 수 없는 늪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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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골목*



건물들이 무단으로 골목을

잠식해 가고 있을 때

동조자들은 눈과 입을 닫았다

밀도를 초과한 골목이

더는 들이지 말라고

소리칠 때도 그들은 귀를 닫았다

푸른 영혼들이 묻는다

‘왜 출구가 닫혔냐고’

가족을 부르는 처절한 절규를

붉은 울음으로 삼킨 골목은

수없이 미안하다를 되뇌는데

출구를 열어 주어야 할 자들은

가면의 검은 입으로

흔적 지우기에 급급하고

누군가 지성으로 차려 낸 제사상이

덩그러니 놓여

출구 없는 골목을 지키고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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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되고 싶어요



어디로 흐를지 모를

당신

온전히 담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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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낳은 말



사유 없이 쏟아 낸

감정의 노폐물


나와 너의 가슴에 남겨진

검은 얼룩들


닦을수록 더 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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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감추고 싶은 것이

무엇이길래

겹겹이 묻어 두었나


깊이를 알 수 없는 하얀 속내


한겹 한겹 벗겨 낼 때마다

내 눈을 타고 흐르는

매운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