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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밥 냄새 외 9편/ 송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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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4회 작성일 23-12-15 12:10

본문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오랜 추위를 견디었다.


산다는 것은

가끔씩

비웠다 채우며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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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냄새



집안에 부고가 있어

오랜만에 들러 본 친정집

온기 사라진 부엌 한구석에

세월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벌겋게 녹이 슨 가마솥


칠 남매 수시로 드나들며

종갓집 식솔들의 허기진 속을 채우며

구석구석 퍼져 가던 밥 냄새는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가족을 모이게 했었지.


긴 시간 뿌리를 내려 견뎌 온

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뜨거워질 수 있다면


한 줌 재 속

청솔가지 매큼한 연기 가득한

그 냄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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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을 읽는다



산 하나를 밀어내고 들어선 자리에

밤이 되면 불빛들이 만들어 내는

상형문자가 뜨는데


그곳으로 터전을 옮긴 사람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반딧불이와

쉴 곳을 잃어버린 매미들이

불 켜진 창문마다 매달려

시위를 하는 바람에

밤잠을 설친다고 하는데


사라진 돌 냄새와

바람 소리까지 기억하는

산 아래에서는

오늘 밤도 숫자도 그림도

읽기도 풀기도 애매한 불빛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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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의 시간



봄볕이 고이는 곳에서

연두는 시작이다.


겨울 무채색에서

서서히 몸을 풀어

봉긋한 꽃잎에 머물다.


여린 속살의 부드러움으로

비와 바람을 맞아 가며

초록을 향해 신록의 물감을 풀어놓고

무더운 여름을 녹음으로 버티며

단풍을 입힌 시간은


낙엽을 준비하다 지쳐 버린

해쓱한 가을 따라

연두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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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가을



하이힐을 높이고

미니스커트를 재던

여자의 하루는

꽃 같은 시간을 들고

소리 없이 가버렸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몸속 깊이 스며든 시간은

빛나던 시절을 소리 없이 피워 냈고

서걱거리는 바람 소리로 허물어져 갔다.


이제 웃음도 쓸쓸한 스산한 길목에서

져버린 날을 회상하며

눈꽃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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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으로 피었다



삭막한

겨울 녘에서

동면에든 영산홍 가지 하나

베란다 양지쪽에

물꽃이 해 두었더니


봄 샘도 지독한 날

꽃망울 터트리며

봄으로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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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는 날



추적추적

겨울비가 오는 날은

화장 지운 늙은 여인의 얼굴 같아

서글프지만


저물고 있는 삶을

아끼고 싶은 내게


아직 남아 있는

아름다웠던 과거를

선물하듯

뚝 떼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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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생강나무

노란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초록이 지천이다.


계절을 놓쳤으면 어떤가.

이토록

향기로운

여름 냄새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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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37



겨울 창가에 쌓여 있는

추운 마음

온기 사라진 베란다의

동백 목마르다.


보내지 않은 가을처럼

어쩌다 이별이 되었던 날


시간 저편 접어 둔 정인이

창밖을 기웃거리는

붉디붉은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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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홀로

바다를 지키는 등대는

불빛을 깜박거리며 살고

하늘의 구름도

떠다니며 산다.


꽃 한 송이 보려고

먼 길을 찾아가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오랜 추위를 견디었다.


산다는 것은

길지도 않은 한 생을

비웠다가

다시 채워 가며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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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속도



베란다 창가에 앉아

나무들 흔들리는 것을 보며

바람의 깊이를 가늠해 보는

봄날의 저녁


사람의 길이란

꽃 피고 지는 순간처럼

남아 있는 삶도

덧없고 허망한 것임을

봄의 이력으로 묻는다.


바람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