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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수상한 거래 외 9편 / 최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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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61회 작성일 23-12-15 15:57

본문

머문다는 건

마음이 닿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따뜻한 사람을 꺼내 읽으며

나를 다시 쓰는 일 같은

또는 그런 마음으로 사물을 모셔 오는


詩 쓰는 일이 내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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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거래



뙤약볕 내리쬐는 장 모퉁이에

열무를 쌓아 놓고 파는 할머니

한 단에 삼천 원 받아야 하는데

개시라 두 단에 삼천 원만 달라고 하신다

손가락마다 염주를 두르고

열무가 시들까 계속 물을 뿌리는 할머니

첫 손님이 값을 깎는 것도 아닌 듯하여

두 단을 받고 육천 원을 건넸다

돈을 세어 가방 속에 빠르게 넣더니

내가 미처 돌아서기도 전

두 단에 삼천 원, 삼천 원 호객을 하신다

나는 받아야 한다는 대로 값을 주었고

할머니는 내가 주는 대로 받았을 뿐인데

찜찜한 거래가 되고 말았다

염주만 아니었으면 하다가

시들 열무와 할머니 얼굴을 생각하면서

잘했네 잘했네 나를 토닥였다

며칠 후 다시 그 자리

열무 파는 할머니를 멀리서 보았지만

일부러 그곳을 비켜서 갔다

삼천 원이 걸려

할머니 가슴 괜히 뛰게 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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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소묘



살다 보면 견뎌야 할 때가 있듯이

겨울 들판에도 그런 목숨이 있다

가는 길 잃을까

잡초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은 채

한 생을 닫는 들판의 겨울

그곳에는 모로 누운 풀의 계보를 버리고

망루 같은 밭둑에 꼿꼿이 서서

부고도 없이 떠나는 것들을 배웅하는

강아지풀이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나를 읽으며

반갑게 짖었을 묵음의 말들에

바람이려니 돌아서다 걸음을 멈췄던,

우리가 빈 곳이라 부르는 곳에는

그런 것이 있다

서로가 되기 위해 나를 버린

뒤편에는 지금도 그런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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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무렵



처서 지난 가을 새벽

귀뚜라미 울음에 잠이 깼다


내리 수년째

받아 줄 곳이 여기뿐일까 하다가

십자가 꼭대기는 오르기 가파르고

절 마당은 고요가 짐이 되겠구나


닿을 수 없는 막막한 배후처럼

너무 넓어 머물 곳 없거든

밤에 기대 울던지 내게 기대 울던지

마음 놓고 울어라


일어나 가만히 창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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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흐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넘어가고

돌아가고

머물기도 해야 하는


그 길이

물길인 줄 이제 알겠다


밀면서

끌면서

강폭을 늘이지만

바다에 다다를수록 고요해지는


물길이 사람 길인 줄 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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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삭히다



귓바퀴에 끼인 말이 있어

잘 못 만지면 아플 것 같은

낯선 말이 있어

오이지 담듯 안으로 들여

누름돌을 얹는다


제 물에 삭혀 부드럽게 휘어진 말

날 것의 비릿함보다

꼬들꼬들 간이 되어 쓰임새 좋은 말


옳되 겉돌지 않고

다르되 틀리지 않는

숙성된 말을 꺼내 놓고

말의 값을 하거라

신발 끈을 묶어 주는


가을처럼 잘 익은 말 항아리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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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처가 정처다



도처의 외로움은 정 주어 아픈 것들

잘 외로울 수 있다면 섬이어도 좋겠다


세상에 길들여진 굴레를 벗어나

고적 한 잎 걸치고

닫힌 풍경 속에서 열흘만 살아보고 싶다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스민다 해도

남겨질 섬은 또 어쩌나

가도 와도 둘 곳 없는 마음의 정처


잘 익어도 외로움은 외로움이다


섬을 배회하는 나를 불러

세상 속에 세우고

빛바랜 다짐 덧입혀 보는 쓸쓸한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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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책



읽다만 책이 있네

밑줄을 많이 그은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따라온다*고 하네


정독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겠지만

쉽게 읽힌다고 가볍고

어렵다고 중후한 건 아니네


오늘도 읽다가 다시 덮은 책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다독이 어려운 건지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사람책이네


* 정현종의 <방문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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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끊어질 듯 이어진 길


상심이 기쁨이 되기까지

돌아 돌아 먼 길


그 길에 피어 나를 밀어주던 것은

아름드리나무도 향기로운 꽃도 아닌

냉이 양지 밥풀꽃들


나중에 안 것

작지만 소중한 것


돌아보니 나를 키운 건

사소한 것들과 굽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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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장천교 아래 물오리 네 마리

앞서가는 어미 따라 잘 가더니

갑자기 세 마리가 방향을 바꾼다


어미 오리 돌아보며 소리를 치지만

못 들은 척 올라가는 새끼들 뒤로

서둘러 따라가는 어미 오리


저 조그만 새끼들에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세상의 말을

누가 가르쳤을까 하다가


보세요 엄마

이제 우리도 잘할 수 있어요

우쭐대느라 그러는 거 아닐까 하다가


고 작은 것들 하는 짓이

내 어린 날을 보는 듯해서

웃음으로 퉁쳐보는 푸른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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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민들레



좁은 어깨에 목말을 탄 채

떠날 채비를 하는 민들레 씨앗들


얘들아, 어디에 닿던 걱정은 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척박한 땅에도 살 수 있는

생명력을 주셨단다


사람의 발소리가 총성 같던 삶

보도블록에 몸을 푼 어미는

멀리 날아 풀밭으로 가야 한다

마지막 말에 힘을 주고 말았다


꽃씨를 문 바람이 떠나고

확인처럼 몇 날 더 바람이 불었던가

연극처럼 한 생의 불이 꺼지고

서늘한 막 뒤로 햇살이 내려와

낮게 엎드린 등에 꽂힌 밥줄을 거두며

질긴 이름을 가만히 감싼다


몸 상할라

내 어머니 내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