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53호2023년 [시] 그리움이란 독 외 9편 / 장은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23-12-15 16:05

본문

나무는 혼자서도 잘살고

모여서도 잘 산다

적응력이 뛰어나기보다는

마음을 비우기 때문이다


----------------


그리움이란 독



모든 게 넘치면 좋지 못하다

그런데도 난 그리움을 퍼담을

그릇이 없어 끙끙 앓는다

밤새워 지난날을 꿈꾸다 보면

어느덧 별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그리움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먹고 먹히는 그리움이라는 것

청춘의 모든 것이었던 사랑

그녀도 나같이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녀도 이 시간 나를 잡아먹고 있을까

모든 헤어짐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는

옛 시는 낭만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가오지 않는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즈음의 사랑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옛사랑을 잊어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사랑이 찾아왔다고

밤새워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집착의 독이

푸르게 몸과 마음에 퍼진다


----------------


누구냐? 난



나의 단점은 그릇이 작다는 것이다 당신의 사소한 실수에

크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짬뽕을 시켰는데

국물을 남긴다면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혁명들이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것도 있다

그러고 보면 전쟁광들도 그릇이 큰 것 같지만 사실은

그릇이 작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의 그릇은 언제 커질까

그런데 그릇이 커지면 뭐 하나 남들이 이미 다 쓸어가 담을

것도 없는데


----------------


자벌레의 여행



무언가 삶의 매듭이 풀어지지 않을 때

기차에 오른다

저당 잡힌 사랑을 찾으러 갈 때도

막무가내 밤기차를 타곤 했다

우직한 기차는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역무원의 수기에 서서히 출발한다

달아오른 밤기차는 기억의 심지를 밝혀

졸음이 쏟아지면서도

다시 정신이 맑아지곤 했다


레일을 도는 힘찬 피돌기가

전류같이 나에게 흘러

기차와 난 하나가 되어 간다

창밖으로 밤의 표정들을 읽으며

앞으로만 가는 기차

어느 집에선 지나가는 기차 소리에

마음이 평온하여 잠을 청하고

어느 집에선 늦도록

남루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희망의 책을 읽으리라


자연인이 되겠다고

기차를 타고 오지의 설국으로 떠난

어느 시인을 떠올려 본다

돌이켜 보면 이정표 없는 삶은

뼈아픈 후회였고 신산한 삶의 방관자였다

나는 어느 낯선 역에 내려

곡진했던 추억을 반추하며

후줄근한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자벌레 한 마리 혼신의 힘을 다해

선로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


윙크



나의 슬픔의 내력은

잉크는 잘 배웠는데 윙크를 못 배운 것이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습득하는 것이라 한다

시골에선 이것이 무슨 라디오 금지곡처럼 되어

잘못하다간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점점 나의 골격도 커지면서

앵두 같은 여자애들을 볼 때마다

눈이 또렷해지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것은 위험스러운 슬픔을 지나서

내 인생을 빈 드럼통 팽개치듯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내가 윙크를 조금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마음에 두었던 애가 주먹깨나 쓴다는 선배와

토끼같이 예쁜 아기를 안고 다녔다


----------------


시인



시를 잘 쓰기 위해선

자꾸 넘어져야 한다는데

무릎이 깨져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데

상처에 남이 아닌 스스로가

약을 발라야 한다는데

그 상처가 가슴까지 올라와

술 취한 사람처럼 울어야 한다는데

그 울음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는데

남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기는 문어 빨판 같이 달라붙어

사랑해야 한다는데

그러다 보면 스스로 빛나는

별처럼 된다는데

그 별이 바로 시가 된다는데

별똥별들이 밤하늘에

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진다는데

그리하여 가을에는 마른 갈대처럼

한줄기 스쳐 가는 바람에도

놀라 흐느낀다는데

그러면 시인이 된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인되긴 틀렸다


----------------


아직 늦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은 틀렸다

노래방을 나왔는데 그곳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못 불렀다

반전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운명의 주도권을 놓은 지 오래


그러나 푸른 별들의 운행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눈짓을 하고

파도 소리가 심약한 마음을 일으킨다


나는 늘 밖에서 광물을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직 심장은 쿵쿵거리니

내 안에서 나를 찾아

마지막 라운드를 포기하지 말자

안이 중요하다


----------------


홀아비밥풀꽃



홀아비 생활 오랜만에

여자 만나러 가는데

몇 번이나 거울을 보고

성근 머리털에 한숨짓고

그래도 나름대로 멋을 낸다고

잘 입지 않던 정장에

꽃무늬 남방을 입고

호텔 커피숍으로 갔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지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 없는 여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한창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가슴에

졸지에 딱지를 맞았는데

사연은 알고 본즉 모두 좋은데

남방셔츠 단추에 밥풀 하나가

달라붙어 있었던 것

어디 그 밥풀을 밥풀꽃이라

불러 줄 그런 여자 없을까


----------------


도원리桃源里



구호주택에 난리 났다

인근 과수원 주인이 땅 팔면서

복숭아나무 그냥 파 가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 저마다 끙끙대며

복숭아나무 파서 리어카로 싣고 왔다

딸아이 태우고 가듯 정성을 다했다

이듬해 구호주택 집집마다

한여름 복숭아가 불 밝히는 불야성이 되었다

사람들은 좋은 걸로 골라

도시에 있는 아들딸에게 보내고

남은 걸 먹었다

달콤한 과즙 들어갈수록 말랑말랑한 과육

먹을수록 정신이 몽롱해진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복숭아나무가 집집마다 심어진 뒤

마을엔 다툼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약주에 취한 듯

발그레한 얼굴로

복숭아를 대하듯 이웃들을 대했다

낮은 지붕들이지만 별들이 가까이 내려오고

복숭아나무가 울타리가 되어 주는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

구호주택 대신에 도원리란

새 이름이 붙여졌다


----------------


빌라왕



왕이란 한 국가를 통치하는

분인데

그는 빌라 천여 채를

언제나 불붙이는

성냥갑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는 빌라 몇 채 값으로

대출받고 끊임없이 대출받아

성실한 신민들의 왕이 되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왕의 신민들은 명도 명령으로

빌라에서 내쫓겨

하룻밤 새에 깡통을 차게 되었다

빌라왕은 빈 성냥갑들을 남기고

불 속에서 영원히 타고 있었다

이 시대에 왕이란 것들을

특히 조심할 일이다


----------------


여름 단풍나무



도서관 가는 길 구석에 

여름 단풍나무 홀로 서 있다 

가난한 집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정식교육도 못 받고

어깨너머로 도서관의 책들을 치열하게 정독했다 

수많은 날들을 묻고 답하여 

지혜가 가지 끝까지 뻗어 나갔다 

햇빛이 사위어 가는 가을도 오기 전에 

진즉 붉은 단풍잎을 매달았다 

그라고 왜 외로움과 적막함이 없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박발이라도 하며 

저잣거리로 가고 싶었으리라 

순간의 쾌락이 열반의 기쁨을 이길 수는 

없는 법

마침내 침묵의 수도승이 되어 

실금이 간 붉은 손바닥마다 

우주의 질서가 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