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2023년 [시] 첫 모란 피네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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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시를 낭송하며 지나간다.
파도도 노을도 달빛도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자꾸만 더 가까이 귀를 대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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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모란 피네
붉은 붓점 봉긋하다
한 겹 한 겹 다 열리고만
노오란 속살
곁눈으로
가만히 지나다니며
모란이 지기까지
해마다
우린 서로 부끄러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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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신발
지구를 굴리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가
쉽지 않은 세상
바닥은 늘 안쪽부터 닳았다
덧대어도 덧대어도
타협 없는 평생의 과로
끝내 기울고 마는 생애
태생이 과묵이라
몸을 떠난 신발이
비뚤어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유언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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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
뒤뜰로 난 숲길을 지나
낮은 언덕 위
붉은 노을과 마주 서면
어깨 위를 돌아 흐르는 바람
저녁 산책은
늘상 은밀한 사치이지만
노을과 바람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그저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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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계
고산지대에는 수목 한계선이 있고
특별한 곳에는 출입 통제선이 있고
우리 집에는 무게 절제선이 있다
숨을 참고 살그머니 올라서며
오늘도 같은 생각
인내와 절제의 인생 기록
딱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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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통
바다로 숲으로
철없이 내달리던 때가 있었다
늦은 잠도 달았고
아침은 언제나 가벼웠다
한 계절 저만치서 오고 있는데
사이시옷처럼
비집고 들어서는 환절통
젖으나 마르나 마뜩지 않아
한쪽 슬쩍 고여도 보지만
그예
조금씩 기울어지는 흙집*
계절 지나가는 길목
어김없이 지키고 선
낯익은 인사가 불편하다
* 흙집: 흙으로 지음을 입은 사람(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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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길을 잃다
휘적휘적 걸어가다
쉼표에서 숨 쉬고
마침표에서 멈춘다
때로는 유려함에
몇 번이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갈수록 숨찬
이상의 오르막길과 난간에
힘에 부친 발걸음
마음 다잡고 다시 올라 걸어도
가파른 정상은 까마득한데
울창한 문장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직 책 안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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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것들에 대하여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린
단추 하나
교실 마룻바닥 옹이구멍에 빠져
주인을 오래 생각했을
동그란 지우개
무릎까지 오는 개울을 건너다
떠내려 보낸 고무신 한 짝
기억의 지도 어디쯤에 숨어 있다
가끔 느닷없이 들이미는 낡은 거울
포기가 일상이 된 나이에 들어서야
이런 마음 앓이들이
내 한 귀퉁이를 키워왔음을 안다
노을이 붉다
떠나는 것의 뒷모습
오늘이
나를 두고 떠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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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해 달 별은
눈인사로 제 길을 가고
나무들은 선 채로 늙어 간다
우연이 필연이 될 줄 믿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기다림도 나이가 드는가 보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고
봄 오고 가을 가고
한 줄의 문장이 낡아간다
‘언제 한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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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열쇠
하늘 훤하고 바람 멀리 흐르니
감옥인 줄도 모르는
독방의 무기수
단 하나의 사랑
짧은 금속성 비명으로
네 안에 들어서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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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詩
높은 산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솟는다
가파른 내리막길
죽기 살기로 붙잡고 내려오는
단 하나의 주제
느닷없이 끼어드는 낯선 물길들
흘긴 팔꿈치로 쫓겨난 낭떠러지
상처도 문장이 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경사와 수평의 경계에서
한 편의 詩
한 생애가 퇴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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