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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첫 모란 피네 외 9편 / 김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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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69회 작성일 23-12-15 16:22

본문

바람이 시를 낭송하며 지나간다.

파도도 노을도 달빛도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자꾸만 더 가까이 귀를 대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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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모란 피네



붉은 붓점 봉긋하다

한 겹 한 겹  다 열리고만

노오란 속살

 

곁눈으로

가만히 지나다니며


모란이 지기까지

해마다

우린  서로 부끄러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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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신발



지구를 굴리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가

쉽지 않은 세상

바닥은 늘 안쪽부터 닳았다

 

덧대어도 덧대어도  

타협 없는 평생의 과로

끝내 기울고 마는 생애


태생이 과묵이라

몸을 떠난 신발이

비뚤어진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유언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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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



뒤뜰로 난 숲길을 지나

낮은 언덕 위

붉은 노을과 마주 서면

어깨 위를  돌아 흐르는 바람

 

저녁 산책은

늘상 은밀한 사치이지만


노을과 바람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그저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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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계



고산지대에는 수목 한계선이 있고

특별한 곳에는 출입 통제선이 있고

우리 집에는 무게 절제선이 있다

 

숨을 참고 살그머니 올라서며

오늘도 같은 생각


인내와 절제의 인생 기록

딱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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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통



바다로 숲으로

철없이 내달리던 때가 있었다

늦은 잠도 달았고

아침은 언제나 가벼웠다

 

한 계절 저만치서 오고 있는데

사이시옷처럼

비집고 들어서는 환절통


젖으나 마르나 마뜩지 않아

한쪽 슬쩍 고여도 보지만

그예

조금씩 기울어지는 흙집*


계절 지나가는 길목

어김없이 지키고 선

낯익은 인사가 불편하다


* 흙집: 흙으로 지음을 입은 사람(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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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길을 잃다



휘적휘적 걸어가다

쉼표에서 숨 쉬고

마침표에서 멈춘다

때로는 유려함에

몇 번이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갈수록 숨찬

이상의 오르막길과 난간에

힘에 부친 발걸음


마음 다잡고 다시 올라 걸어도

가파른 정상은 까마득한데

울창한 문장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아직 책 안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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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것들에 대하여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린

단추 하나

교실 마룻바닥 옹이구멍에 빠져

주인을 오래 생각했을

동그란 지우개

무릎까지 오는 개울을 건너다

떠내려 보낸 고무신 한 짝

 

기억의 지도 어디쯤에 숨어 있다

가끔 느닷없이 들이미는 낡은 거울


포기가  일상이 된 나이에 들어서야

이런 마음 앓이들이

내 한 귀퉁이를 키워왔음을 안다


노을이 붉다

떠나는 것의 뒷모습

오늘이

나를 두고 떠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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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해 달 별은

눈인사로 제 길을 가고

나무들은 선 채로 늙어 간다

 

우연이 필연이 될 줄 믿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기다림도 나이가 드는가 보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고

봄 오고 가을 가고

한 줄의 문장이 낡아간다


‘언제 한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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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열쇠



하늘 훤하고 바람 멀리 흐르니

감옥인 줄도 모르는

독방의 무기수


단 하나의 사랑


짧은 금속성 비명으로

네 안에 들어서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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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詩



높은 산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솟는다

가파른 내리막길

죽기 살기로 붙잡고 내려오는

단 하나의 주제

 

느닷없이 끼어드는 낯선 물길들 

흘긴 팔꿈치로 쫓겨난 낭떠러지

상처도 문장이 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경사와 수평의 경계에서

한 편의 詩


한 생애가  퇴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