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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갯배 외 10편 /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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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3-12-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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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쓰기는 '나'를 번역하고, '세상'을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번역(飜譯)'에 사용된 어휘와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아 

'오역(誤譯)'이 걱정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직도 끄적거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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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배



동쪽 청호동에서

중앙동 서쪽으로

서쪽 시내에서

개 건너 동쪽으로

그 길만 오고 가는

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남쪽 아바이 마을에서

함경도 신포마을 북쪽으로

북쪽 앵꼬치 자꼬치 마을에서

아마이 마을 남쪽 모래톱으로

마음대로 오가는

그런 배가 되고 싶었다


청초호 머물던 물길도

날마다 동해로 나가

북방한계선을 지나

통천 원산 정평 함흥을 지나

신포 단천 명천 청진으로 가는데


느슨했던 삼팔선 삭아 내리자

더 두꺼워지고 무거워진

휴전선이라는 쇠줄에

가슴 한복판을 꿰뚫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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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갯배



터지는 복장 달래려

한 번은 청호동 옹벽에

또 한 번은 중앙동 철벽에

쾅 쾅 머리만 박아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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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컵라면



프롤로그 :

24시 편의점 앞,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제1막 : 20시

야근을 마친 작업복 차림의 남자 사발면과 소주 한 병 들고 탁자에 앉는다

소주 한 잔에, 라면 한 젓가락, 국물 한 입,

카 소리와 함께 고단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제2막 : 24시

알바 천국에서 온 친구가 계산대에서 유통기한 하루가 지난 공짜 삼각김밥과

오늘 시급에서 공제될 컵라면 하나로 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의 아침은 아직 멀었다


제3막 : 02시

희미한 불빛 가로등 기둥을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가슴을 두드리는 그녀

오늘 올렸던 매상만큼 시큼한 토사물이 쌓였다

해장국 컵라면 국물과 숙취해소제 한 병을 마시고 비척대며 일어서는

그녀의 밤은 다른 이의 환한 대낮이다


에필로그 :

스며든 슬픔과 고단한 소금기로

그들은 컵라면에 수프를 반 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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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까치밥으로 남긴

언 홍시가 먹고 싶어

낑낑대며 혼자 나르던

열두 살의 대나무 사다리


초가지붕에서

양철지붕으로 바뀌던 날

빨간 뺑기칠을 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오르던

스물두 살의 나무 사다리


스무 평 5층 연립에서

서른두 평 11층 아파트로

이사 가던

서른아홉 살

사다리차의 철제 사다리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보이지도 밟히지도 않는

예순한 살

저 눈부신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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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설거지



내일

비 올 확률 70%


물이 가는 길에

낙엽을 쓸고

뒤뜰의

쓰레기들을 걷어낸다


모레

달력을 넘긴 햇수 70년


앉았던 자리를 내주고

하던 일을 물려 준다


내 삶의 어제를

설거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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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사람이 아니라

종이에 찍힌 도장을 더 믿는 시대라

인감증명 한 장 급히 필요해

늦은 밤 무인 박스에 들어갔어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부릅뜬 눈에

닳아버린 엄지를 들이밀었어


‘지문 인식에 실패했습니다’


야단치듯 명령하는 기계음 따라

몇 번이나 엄지를 들이댔어

끝내 원하는 종이 한 장 얻지 못하고

닳을 대로 닳아 버린 나는

그곳에 없었어


잃어버린 나를 찾아

문을 나서는데

기계가 중얼거렸어


‘당신 인생은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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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한다

못 한다


합평회 때마다

나의 빛나는 시어와

뛰어다니는 비유에

콩콩

잔못을 박아대던

어제의 선배


잘 못한다

잘 못한다

후배의 반짝이는 구절과

맛깔스런 어휘에

꽝꽝

대못 박아대는

오늘 나는


녹슬고 구부러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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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의 칼



웃는다


소리 없이 칼날 하나가

혀끝에 물린다

베여도 피가 흐르지 않는

쓰라려도 상처가 보이지 않는


오늘도

하회탈 같은 얼굴로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칼날

하나 날리고 있다


속을 보이는 일은

밴댕이 속 같은 일이라고

눈과 입만 말아 올리고

초승달 같은

칼 하나


너를 벤다

그리고

나도 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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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에서



구부러진 쇠 파이프

찌그러진 양은 냄비

녹슬어 가는 무쇠솥


생이 아주 끝나거나

어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절망과 희망의 갈림길에서

대기소에서 누워 있는

그들의 살아온 시간을 읽는다


글 한 번 써보지 않은

어떤 이들이

내놓은 양장본 속

대필 작가의 금 테두리를 두른

그들의 이야기보다


여기 눈이 가는 이유


냄비 구멍의 눈물과

무쇠솥 주름의 땀방울이

스며든

너덜너덜한 일기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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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을 뱉다



입 냄새를 없애려

때론 심심해서 껌을 씹는다

단물이 빠지자

무심코 퉤 뱉었다

아차 싶어 다시 줍는데

쉽게 떨어지지 않고

끝내 흔적을 남겼다


주운 껌을 휴지로 싸며

사람을 버리는 방법에 생각이 닿았다


다음을 위해 벽에 붙여 놓는 사람

미련 없이 뱉어버리는 사람

휴지에 곱게 싸서 버리는 사람


나는 누구를 뱉어버렸는지

누가 나를 뱉었는지

궁금해서 뒤적거리는


휴대폰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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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발



시장 간

할머니 손에 들려 있을

붕어빵 봉지 기다리는

손자의 뒤꿈치


차가 밀린다는 전화에

길게 목을 빼고

출입구만 바라보는

탁자 밑 들어 올려진

그대의 뒤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