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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쥐, 잠 못 이루다 외 9편 / 권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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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23-12-1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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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세계에 갇혀 있던 혈육들이 내 안에서 싹을 튀운다. 뿌리라는 원초적 이미지들이 칡넝쿨이 되어 나를 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단기 4283년 4월에 출간된 아버지가 공부하던 책이 책꽂이에 있다. 책갈피마다 아버지의 지문이 체온으로 전달이 된다. 70년 빛바랜 아버지가 딸의 가슴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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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잠 못 이루다



종아리 근육이 뭉쳐서 저리다

낮에 긴장한 탓인지 다리에 쥐가 났다


오래전 농가 주택에 머무른 적 있다

추워진 날씨 때문에 한밤중 쥐들이

천정을 쏘다니며 찍찍댔다

그날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매월 25일 쥐 잡던 어느 날

쥐덫에 걸린 몇 마리 쥐가 처마 아래

잘린 다리와 꼬리를 남기고 도망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순간, 정신이 아뜩했다


그 쥐들의 원혼이 오늘 밤

내 다리 근육을 당기다가 탱탱 감아서

돌아누울 수가 없다


쥐, 잠 못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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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책



칠십 년 책꽂이에 서 있던

아버지를 내린다


빛바랜 뒷모습에

손때가 묻어 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나뭇잎 같은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책갈피마다 밑줄 그으며

써 내려간 잉크 빛 글자들

숲처럼 빼곡한 말 없는 말들이

한 권의 묵시록이다

딸에게 하지 못했던 이승의 말들이

아버지 눈빛이 되어

웃는 듯 우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까슬한 손을 잡듯

책 속의 지문을 어루만진다

울컥 체온이 전달된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얼굴과 목소리들

피가 되어 내 몸을 타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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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그릇을 닦다



보름달을 닦는다


달 속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할머니가

버선발로 웃으며 걸어 나온다


집안이 축제처럼 들썩이는 날이면

식구들은 멍석에 꿇어앉아

기왓장 가루를 지푸라기에 묻혀

기도하듯 달을 닦고 또 닦는다


종갓집을 지켜온 고방 속 놋 제기들

그 형형한 눈빛이

터줏대감의 꼿꼿한 자존심이고 사리다


오늘도 보름달을 닦는다

놋그릇에 비친 내 얼굴에

아버지와 엄마가 마주 보며

걸어 나온다


발자국마다

달의 살점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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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 나무 두 그루



버스 앞자리

반바지에 모자 쓴 나무 두 그루

가지를 움직이며 쉼 없이

떠드는데 소리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인 듯

두 나무는 서로 손을 폈다가 접으며

소리 없는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다

눈빛과 표정이 바뀔 때마다

손가락 끝에 매달린 언어들이

춤추듯 울다가 웃는데

버스 안은 물밑처럼 고요하다


번쩍이는 소리로 가득한 세상을

열 손가락으로 타진하며

자기 몫의 삶을 끌고 가는

눈이 맑은 나무 두 그루


어느 봄날

깃털처럼 날려 버렸는가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노래여

슬픈 언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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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커피를 내리다가



컵 안에 흔들리는

검고 윤기 나는 흑진주

13세 소녀 와리스다리*의 눈빛이다


낙타 다섯 마리 받고

예순의 할아버지한테 팔려 가기 싫어

캄캄한 사막 짐승 소리를 밟고

소말리아를 탈출하는 그녀


쏟아지는 별들 갈 곳이 없다

삶의 이정표는 오로지 북두칠성뿐


가난이 싫어 성적 학대가 싫어

암흑 아프리카를 벗어나

밝은 세상 자기를 찾으려고

불땡볕 사막을 맨발로 걷고 또 걷는다


케냐 커피를 내리다가

컵 안에 출렁이는 뜨거운 눈물

사막의 꽃

와리스다리*의 검은 눈동자다

그녀의 체취가 입안에 번진다.


* 와리스다리 : 소말리아 출신 모델 겸 방송인, 사회운동가, 작가. 체험소설 『사막의 꽃』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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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백*을 마시다



달빛을 우려내다

겨자 빛 선하고 맑은 영혼

차방 가득 은은한 파문이 인다


초사흘 달이 만월로 피어나는

선한 둥근 미소

고요한 우주의 소리

내 안에 잉태된 달의 노래다


찻잔 속 멈춘 듯 흔들리는 달빛

만삭이다.


* 월광백 : 보이차 종류 중의 차로 달빛에 말린 차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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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火氣



한밤중 열을 잰다

사십 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 밖으로 해소하지 못한 묵은 원願들이

나를 들볶아 몸을 달구고 있다


일본 여행에서 화기火氣를 품은

산봉우리를 본 적이 있다

방금이라도 화산이 폭발할 듯

연기 따라 불씨들이

산등성이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랫동안 삭이지 못한

내 안의 화火들이 불씨가 되어

내 몸에 다홍빛 배롱꽃이 되어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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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 갇히다



스페인 여행길에서 사 온

명자꽃 문양 부채꼴

작은 도자기 시계가 멈추었다


알함브라 궁전을 두고 떠나야 했던

무어족들의 아픔과

론다 누에보 다리 막막한 협곡

집시 바이올린의 베사메 무초 음색 따라

명자꽃 노을이 무장무장 피어나곤 했지


불 땡볕 이국의 시간들이

부채꼴 도자기 시계에 갇혀 있다

낯선 거리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침과 분침이 되어 서성이던 내가

멈춘 시간 속에서

꿈틀거리며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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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구두를 신지 않기로 했다



젊은 날 높은 구두 신는 것을 좋아했다

반듯한 허리와 키가 커 보이는 만큼

내 오만은 한 치씩 자랐다


나무처럼 빽빽한 사람들 틈새로

자작나무처럼 높아지고 싶어

도시 거리를 걷다가 보면

긴장의 늪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절뚝이며

세상을 몇 바퀴 돌아온 지금

이젠 높은 구두를 신지 않기로 했다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스스로 낮아지니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오고

아프게 걸어온 내 길들이 선연하게 보인다


더 낮아져야 한다고

지나가던 바람이 내 정수리를 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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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하는 가방



누구를 만나고 어딜 가야 될지

내 스케줄을 가방이 결정한다


대부분 가방의 디자인과 로고를 보고

그 가치를 흥정하며 수군거린다


외출하는 내 신발과 옷차림을

꼼꼼히 챙기며 말할 때도 조신하라며

명품 가방이 나를 간섭한다

귓속말로 다른 가방도 주시해 보라고

당부하길래


사람한테는 바코드가 없어서

모두가 명품이라 해도 들은 척 않는다

끈으로 어깨를 짓누르며 내 몸과 생각을

자기 멋대로 끌고 다닌다


가방이 무겁다 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