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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고요 일기 58 외 9편 / 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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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64회 작성일 23-12-1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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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다.

더운 여름만큼 일도 많아 뜨거웠다.

뜨겁게 산 만큼 열매도 당차길 바란다.


내게 온

보랏빛 작은 꽃과 큰 나무와 새로운 길에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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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58

― 떠나지 않는 갯배



오늘도 갯배는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줄에 몸을 걸고

가는 그리움 오는 그리움 실어 나를 뿐

떠나온 그리움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게 오라고 당기면

줄 따라가 버리고

가만히 놓아주면 나를 두고

좁은 바다를 건너가기만 합니다


통통배도 갯배를 넘어

바깥 바다로 나가

돌아갈 이들의 말씀을 던져

두고 온 이들의 곁을 지난 체온을 싣고

만선으로 돌아오는데


오늘도 갯배는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숙명 같은 쇠줄을 따라 일렁이는

먼 얼굴들을 흩뜨리며

그리움만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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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5

― 노래 ‘빨간 구두 아가씨’ 오마주하다



누워 있는 자리 밑으로 출렁이는 빗줄기 하나씩 세워 울타리를 만든다

좋은 인상을 위해 지낸 밤낮이 서러운 문패

오십천 너머 던지고

삶이라 불리는 어설픈 미로 속으로 빨간 구두를 둔다

또옥 또옥또옥 분명히 소리 내는


왜 시를 쓰는가


시가 사람이 될 줄 몰랐다

사는 길이 될 줄 몰랐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일이 눈을 빛나게 할 줄 몰랐다


자신에게 저항하며

지금의 길 환히 보이도록 별 하나씩 붙인다

미로美路 그 끝에 걸어갈


빨간 구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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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6

― 참외



엄마가 좋아하시던 과일을 뒤늦게 좋아하게 된 건

까닭이 있어서일 게다

분명


탱그르르한 씨앗들을 흐트러짐 없이 품은 속살

사각거리는 날렵한 단 한 번의 칼질에

서슴없이 엄마 향기가

나를 쪼갠다


평생 몸으로 가르치신 말씀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은은함도

설익은


칼로 쓱쓱 긁어내야 할

발효되지 않는 말과

그 끝에 떨어져 나가는 힘 없는 살점이 있을 뿐


돌아가셔도

자식이 염려되시나 보다


뒤늦은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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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7

― 꽃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 받쳐 주는

담 밑을 지나는데

무단히

어깻죽지로 담痰이 내려앉는다


몰랐다

내가 꽃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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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8

― <희망은 우리를 내려놓지 않는다>*


희망을 품지 않겠다고 시 쓴 후 그림 한 점이 없어졌다

<희망은 우리를 내려놓지 않는다>

까다롭기는 그깟 말에 삐치다니

두 손 넣어 기억 속을 헤집어도

그림을 들고 다니던 무게만 잡힌다


어느 가슴 속으로 갔을까

콘크리트 바닥에 시린 손끝으로 그리던 꽃일까

찢어진 고요 사이로 건반 그림자 마구 쏟아 내는 녹턴일까


더 이상 찾지 않겠다

희망을 품지 않겠다고 해도 우리를 내려놓지 않을 거면서

삐치기는 치이


* 지영희, 72.2×90cm 순지에 분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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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69

― 푸른 비



소나기 한 줄씩 끊으며 새들이 아이들인 양 떠든다


슬픔이 가마솥 베보자기에 싸여 푹 익을 즈음 들리는 목소리

밥 먹고 학교 가야지

그녀는 소나기마저 덮칠 울음을 어떻게 삼켰을까

부엌에서 들리는 노래 어쩜 저리 매일 즐거울까 했더니만 했더니만


세상을 날아다닌다는 말의 분명한 답이 급하던 시간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젠 천천히 걷고 싶어진다 지난 길들이 등을 들고 골목 어귀에서 기다릴 때 눈에 차오르는 물이 먼저 등을 맞이한다 길게 흔들리어 버스 타고 지나는 가슴에 별빛으로 여울질 한밤


겹쳐진 꽃에 색을 얹는데 꽃잎 위로 푸른 비가 내린다

꽃잎 뒤에 앉아 빗소리 따라 부르는 새들의 허밍


내 노래가 따뜻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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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70

― 길 내기



굳어진 아픔에 의구심이 들 때는

지느러미 펼쳐 햇살에게 길을 묻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구름이 떠 있는 세상은 물속이었다


투명한 물속

은은한 물풀 몇 그루 사이로

집들은 사람 말소리 몇 마리 풀어 놓고

고요히 오가는 물길에 문을 연다


맑은 세상이었구나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

얕은 것 같아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


막힌 길에 의문이 들 때는

지느러미를 펼쳐

하늘빛 모세혈관을 바라보아야겠다

이 땅이 어쩌면 물속 바닥이어서

길은 내 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굳어진 기억의 비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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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71

― 맨발 걷기



오래 묵힌 땅의 속내를 한발 한발 두드리며

숲길 걸을 때

양손 신발에 담기는

꿈틀거리는 잔돌의 말들


부서져야 땅이 된다


부서지지 않는 말들

유리 조각으로 남아

언제고 날 세워 맨발을 찌를지도 모를 일


맨발로 숲길을 걷다 보면

뜬금없이 나무면 좋겠다 하다가

생각 없는 잎이 되어 모기에게도 살 자리를 내주고 싶어진다


땅의 속내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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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72

― 꽈리



뒷방에 살던 순자 언니는 꽈리를 잘 불었다

마당 끝 꽈리꽃

웅크리고 있는 햇살 꼭지를 바늘 끝으로 파내어

비밀을 주워 담은 듯

입 안에 넣고 또르륵또르륵 암호를 보내던 그녀

한때는 속초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아이를 안고 인사 왔던 어느 여름날 이후

한때의 일로 꽈리 소리만 길게 남겼다


별처럼 벗겨지던 빨간 주머니

반짝이는 손가락이 아름다웠던 그녀

잊고 지낸 시간만큼 꽈리꽃도 본 적이 없다


정지된 기억 같은 꽈리들이 매끄러운 화면에 살아 있는 척하지만

온전히 꽈리 비밀을 알아낸 적 없기에

해득할 수도 보낼 수도 없는 암호


나이를 먹지 않는 여름 햇살을 입에 넣고 불어 본다

헛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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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일기 73

― 꽃이 말을 걸어왔다



꽃에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있는지

가슴을 열고 함께 꽃이 되어 본 적이 있는지


반백 년 훨씬 넘도록

꽃이 봉오리에서 서서히 피는 걸 지켜본 적 없다


한 뼘 되는 숲길

이슬 갓 털어 낸 엄지발톱만한 꽃

발등에 보랏빛 몇 점 뿌리고 얼른 제자리 앉는 걸 보았을 뿐인데


설거지통에도 가득 피고

숟가락 따라 입안도 꽃이다


꽃이 말을 걸어온

아침 산책길


나도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