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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이곳에 들어서거든 외 9편 / 채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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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8회 작성일 23-12-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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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우리 집 텃밭가에 있던 노간주나무 그늘에 앉아 마당에 마음을 적었던 날들이 있었다. 가을이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가을에 관한 동요를 부르던 기억도 있다. 다섯번째 시집을 내고 그런 마음들이 시집에 담겨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 100채를 담은 시집을 세상에 내보내고, 내 눈길은 숲으로 가고 있다. 숲의 소리를 듣고, 숲에게 질문하며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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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들어서거든

― 집 85



눈여겨보는 이들 유난히 많은 집

미술관 지나 도서관

박물관에서 시집까지

이곳에 들어서거든

들판의 귀로 들어라

모든 집이 말하고

모든 집이 말이며

모든 집이 전하려 하는 것을


고요한 떨림으로 가득한 그 집에서

눈은 감고 마음으로 들을 일이다

무심히 스쳐 간 날들 되새기며

한결 깊어질 그댈 만나러

그곳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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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날 아침

― 집 86



앙상한 벚나무 위로 눈발 날리는 대한 날 아침


옮겨 놓는 다리가 무거운 영랑호 청둥오리


죽기 살기로 발 옮기고 옮겼을 테지만

물닭 두 마리 까맣게 얼어 있다


다른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 엄동설한을 겪고 있나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집 밖 내다보는 이 아무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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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발자국

― 집 87



할머니 얼굴 밀랍 인형처럼 매끄러웠다


모닥불 앞에 동네 사람들 몇몇 모여

새가 된 망자 얘기를 했다

대문 밖 그릇 속 생쌀들,

전부 새 발자국인가


장례 기간 중

돼지 두 마리 잡을 정도로

많은 자손 두고 떠난 할머닌

무슨 새가 되었을까


대학 간 손녀 준다고 떡이며 앵두를

한지에 고이 싸둬

곰팡이 생긴 게 다반사였다고


시 즐겨 쓰고 훈장 하던

할아버질 닮았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더니

임종 전 내 이름 부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고


오래 머물던 집 두고

꽃상여 타고 간 그 길

진달래, 진달래 꽃사태


봄날이 통째로 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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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적었던 날들

― 집 88



집 그림자 길어질 즈음

그 그늘에 기대어

먼 산을 바라봤다

텃밭 가장자리 노간주나무 그늘에 앉아

땅바닥에 마음을 적었던 날들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먼 들녘을 한참 바라본 적 있다

세상살이 벼랑인 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가는 시간


수북한 생각 비우고

드센 바람 가르며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 유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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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피어나는데

― 집 89



집 안에 갇혀

집 밖의 날들을 생각한다


사회적 간격마다 나를 세워 놓고

어떤 얼굴로 있어야 하나

모두에게 숨기고 싶은 것들

동선 공개해야 한대서 말해 놓고

오늘은 또 무엇을 잃게 되나


문 열고 나가

나무 그늘 아래서 얘기 나누던 때 언제였나

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입을 막는 시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날들이 가고 있다


마음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들 그리운 날이다


봄꽃은 피어나는데

마스크 안에서 혼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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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무인가요

― 집 90



비라도 내릴 듯 낮아진 하늘

이런 날이면

집 곳곳에 자리한

나무를 찾아간다


연못가 수양버들

내 슬픔을 읽었는지

눈을 들여다보며

푸른 가지를

팔에 슬며시 얹는다


그동안 세상에 떠 있느라

구멍 숭숭 뚫리고 줄기도 없이

헛발질의 시간 보냈으며


사막 덤불로

바람 따라 모래언덕 올라가기도 하고

굴러떨어지기도 하던 날들


오늘, 그대는

나무 울타리에 섞여 들어가 살고 있는

산사나무인가요


울타리가 된 탱자나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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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집 91



누가 부르나 밖으로 나가니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어디서 복사꽃이 피어나고 있는지

봄빛 한층 환하다

세상은 말 뱉느라 너무 시끄러운데

마당 끝에선 꽃다지 돋아나고

마루에 읽다 만 책장 넘기는 봄바람


밥 안치는 것도 잊고

하염없이

집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고 도는

봄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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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 집 92


최근 100억 마리 꿀벌이 사라졌다


지난밤 꿈길에 헤매던 오월의 숲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 헤매다 잠에서 깼다


현재 야생벌 40% 멸종 위기

2035년, 꿀벌이 멸종할 거라는 뉴스 끝에

식량난 걱정 이어지고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가 멸종한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


대책들 쏟아내지만

집집마다 아기 웃음 소릴 들은 지 오래


강원 인구 소멸 지역

강릉 동해

 태백 삼척

  양양 고성

   홍천 횡성

    영월 철원

     양구 화천


이 나라의 미래 몇 태운 스쿨버스

덜컹이며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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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녘에 새겨진

― 집 93



집에서 아주 오래 살아왔다

이제 저쪽 집으로 들어간다


고독이란 자처한 것이니

그대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유독 고독한 날이면

마음 다잡고 창가 쪽으로 책상을 옮길 것이다


그 집으로 들어갈 때 챙긴 것은 마음 하나뿐

빛이 잘 들어오도록 커튼을 묶는다


이곳에선 누구의 기별도 기다리지 않는다

짤막한 편지를 쓰는 날은 더러 있다


허겁지겁이라는 말은 버린다

창밖 풍경을 슬몃 들여놓기도 한다


마음의 가녘에 새겨진

지독한 봄날을 내놓는다


이 편지가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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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켜 놓은 빈방

― 집 94



집과 집 사이

수수꽃다리 향기로운 집

대추가 붉어 가는 집

고양이 발자국 찍힌 집

치매 어머니 세상 떠난 지 삼 년인데

아직 빈방에 불 켜 놓은 집


길과 길 사이

살구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집

유난히 새들 지저귀는 소리 가득한 집

개 짖는 소리 정겨운 집

첫돌 아기 재롱에

웃음소리 담장 넘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