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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2023년 [시] 산수유는 하늘을 물들이고 외 9편 / 김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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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악문우회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23-12-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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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비가 잦았던 여름을 보냈다. 지구 곳곳에서 물난리를 겪었는데 우리 고장에서도 큰 피해를 보았고 결국 재난 지역으로 선포되기까지 했다. 이런 재난이 앞으로도 계속 될거라는데 글 쓰는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 건지 답답한 마음이다. '갈뫼'가 또 한 살이 늘어나는데 식구가 늘었다. 새 식구가 들어오면 모임에 새 기운이 도는 거 같아 반갑다. 무엇보다 모두 건강하게 글 쓰고 활기차게 활동하는 모습들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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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는 하늘을 물들이고



가을 하늘을 물들인 붉은 열매

그것이 이른 봄

노란 꽃 가득 피우는 산수유였다


친구는 몸에 좋다 하고

나는 보기 좋다 하여

밭 한자리 심어 논 지 오래전


친구는 하늘로 훌훌 떠났고

산수유는 저 혼자 피어

붉은 구슬 굴려댄다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친구여

몸에 좋은 열매는

하늘을 새콤한 맛으로

뭍들이고 있구나


너는 무슨 색깔로 스며들었는가?

사방으로 뻗친 가지마다 붉은 손짓

너 보란 듯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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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수



집안에서 겨울난 행복수

마당에 옮겨 심자고 한다


가을에 다시 집안으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보다

환한 잎 신나게 키우게

걸어 나가게 하잔다


신선한 바람의 하루는

어두운 백날과도 맞먹는다


수천의 이파리들

제 빛깔로 반짝거리겠다고

가슴 속 나무들도 아우성이다


가지 끝에 다시 새 가지 내어

그 끝 보드라운 잎을 세울

꿈꾸는 나무들


모두 걸어 나가고 싶구나

나무도 행복해지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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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침회



밥으로 먹으려면

무침회가 제격이다

쌀 한 줌에 잡곡 나물 넣어 밥 짓듯

몇 절음 이런저런 회에

온갖 푸성귀 넣고

매운 고추장으로 무쳐냈다


무침회는 어우러져서 하나 되고

하나가 제각각이 되어

찬찬히 씹다 보면 살아나고

가끔은 제 성질 감출 줄 안다


두레 반에 둘러앉아

벌겋게 얼굴 달구던 식구들이야말로

초고추장 무침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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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건조장



고기를 잡아대던 그물도

가끔 햇볕 아래서 말린다

촘촘한 그물코에는

고기들이 뱉어 논

비린내 진하게 배어 있어

신선한 바람에 씻어 내야 한다


오만가지 생각의 올로 만든

나의 그물도 말리고 싶다

너무 많은 물고기 몰려오면

물고기 지나가라

바람도 지나가라


그물 건조장에는

바닷속 냄새가 날아다니고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생각도

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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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니아 나무



아로니아를 옮겨왔다

열매 따기가 힘들다고

시집 보낸 나무다


어찌나 정성스레 가꾸었는지

허투루 뻗은 가지 하나 없다

이 나무 심고 가꾸며

고운 열매는 자식에게 보냈던 사람


이젠 힘에 부친다고

한 그루 한 그루

시집을 보낸다

누구네 집에 가서도 귀염받고 살아라


단맛 쓴맛 떫은맛까지

고르게 품고 있을 알갱이들

볕 좋은 날 톡톡 튀어나오며

이런저런 얘기 들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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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 소나무



마당에 자리 잡은

한 쌍의 푸른 방석에

털썩 앉아서 쉬고 싶다


어릴 땐 화분에서 자라다가

마당에 옮긴 지 수십 년이니

집안 안팎 사정 훤하고

오가는 동네 사람들과

허물없이 인사 나눴다


웃자라지 않게 손질해

키는 무릎 아래지만

당당하고 기운차다


올해도 가지를 다듬고

잎들 가지런히 세워

푸른 수 놓았다

일렁거리는 마음일랑은

편하게 내려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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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시나무



아까시나무는 저 혼자

이 많은 꽃송이를 매달고

자축연을 펼치는구나


평생을 가시와 싸우던

밭 주인이 떠난 지 오래

사납던 아까시 기운도

묵은 가지에서는 혼자 삭힌다


그렇게 복닥대던 가슴

이런저런 사람들 흩어지고

한쪽 묵정밭에서는

순한 가지마다 흰 꽃 만발하여

눈을 시리게 한다


오월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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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방



조금은 어둡고

그러나 아늑한 이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다듬잇돌 박달나무 방망이는

단단했던 말의 힘이다


항아리마다 배어 있는 향기들이

곱게 삭아서 지난날 곱씹게 한다


귀향을 기다리던 처가 족보와

아릿한 냄새의 시집들이 내뿜는 숨소리


이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것 같지 않은 양수책상은 묵상 중


환함과 어둠이 겹치는

아늑하고 편해지는 시간


온갖 잡동사니들

불러 놓고 얘기 나누기엔

이곳이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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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머리 생각



사철나무 사이를 뚫고 올라온

기막힌 얼굴 보았다


이리저리 뻗친 가지마다

금방이라도 터뜨릴 같은

수많은 씨앗을 달고 솟구친

쑥대 하나


어둠 속에서

단단하게 스크러브를 짜고 있는

힘센 가지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바람 부는 날 몸 크게 흔들며

보아라 빗겨지지 않은 천 개의 말

온 동네로 흩날리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만의 말을 만들고 있다가

비로소 나타난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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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호암



바위섬 가운데

가장 단단한 자리를 골라

집을 지었습니다


한낮에는 눈이 부신가?

푸른 바다 위를

날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능파대

세 마리 글자로 내려와

잠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