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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2003년 [시-권정남] 내 수첩에서 너의 이름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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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97회 작성일 05-03-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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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첩에서 너의 이름을 지운다


누나하고 웃던 얼굴이
내 수첩 첫 장 세 번째 칸에서
광채를 내고 있구나

2002년, 8월31일, 토요일, 아침
너 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은 후
쏟아지는 빗줄기 속
맨주먹으로 하늘 문 두드려보고
금이 간 땅속까지 너를 찾았지만
불안한 뉴스는 가슴을 조여올 뿐
너의 핸드폰은 빈 울림으로 되돌아오고
이틀동안 세상 어디에도 너는 없었다

왕산국도 35번 도로 산사태 차량매몰
설마 하던 너의 이름 석자가
속보 뉴스 자막에 뜨고
루사가 양같이 순한 너를 덮쳤단다
혼미해지는 정신과 함께
우린 모두 실어증에 걸리고 말았지

억새가 가로 눕는 들판 언덕
너의 아들이
정신없이 메뚜기를 쫓는 그 옆자리
서른 갓 넘은 너를 하관하고 돌아서니
내 뼈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가을 바람 소리

아직도 퇴근하지 않는 아빠를
나팔꽃 같은 두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베란다에 매달려
너를 기다리고 있다.

누나하던 네 목소리가
수만 볼트 전류가 되어
내 온 전신을 저리게 하는 밤
내 가슴에 영원히
화인(火印)으로 찍혀있을

너의 이름 석자와 핸드폰 번호를
오늘 내 수첩에서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