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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1998년 [소설-윤홍렬]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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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7,869회 작성일 05-03-2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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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에 가까워지면서 오까모도가 취할 태도에 조마조마하게 신경
을 기울였는데 이제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남철의 마음은 당장 벼랑으로 떠다밀리어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에
휘말린다. 걷잡을 수없이 가슴이 울렁거린다.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김남철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대책을 궁리 했다.
오까모도가 분풀이를 단단히 하려는 모양인데,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방도가 얼른 떠오르지를 않는다. 분풀이의 형태도 궁금하다.
청색영장은 만주에서만 시행되는 제도니까 여기서는 그런 것은 없
을 것이고…… 그렇다면 필경 징용일 것이다. 그런데 아까 고무산역
에서 들은 류내현의 말대로라면 징용대상자를 뽑아놓는다 할지라도
그들을 태워가지고 갈 배가 없다는 것이지 않은가. 아닌게 아니라 지
금 이 청진항에 묶여 있는 저 여러척의 기선들만을 보아도 류내현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류내현의 말이 아니라 할지
라도 지금 돌아가고 있는 전쟁의 상황은 일본에게 무척 불리한 방향
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6월에, 일본본토의 코앞에 있는
오끼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된것도 그렇고 요즘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황군 작전상 후퇴”아니면“아군 옥쇄”등의 표현으로 일본군이 밀
리고 도망가고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기사가 보도 되고 있다
는 소식을 만주에서도 들었고 조선에서도 들었다. 다만 청진 앞바다
에서까지 미국잠수함들이 판을 치고 다닌다는 말만은 오늘 처음 들
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끼나와에서 청진바다보다는 훨씬 더 가까
운 부산앞바다는 더 말할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그리
고보니 일본배들이 발붙일 곳이 없음직도 하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의 생명, 특히 조선청년들의 죽고 사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안전을 추구할 일본관리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그들은 이판새판식으로 조선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다가 총알받이로 실어낼른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느면 좋고 침몰되
면 그만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김남철은 문득 징용으로 끌려 가는 자신의 몰골을 그려 본다. 참담하
다. 어떡하나. 도무지 대응책이 막막하다. 한참동안을 멍하니 있다가
“피하자”라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려고 하니 갑자기 정신적 언덕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그동안 약 7년간, 기관차 화부생활을
하면서“왜놈들”의 부당한 멸시도 많이 당했고 그럴적마다 주먹이
불근거리는 것을 이를 악물다시피 하면서 참은 적도 많았다. 오로지
징용이 면제된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괄시와 차별대우를 힘겹게 참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징용면제의 보장이 취소 되고 있는 과정
일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안타까운 것은 누구도 징용영장이 발급된
다는 사실을 김남철에게 앞질러 알려 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다. 오까모도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하는 방안도 떠오르기는 하였
다. 그런데 섣불리 그의 집에 갔다가 독안에든 생쥐 꼴이 되어 꼼짝
없이 끌려가는 신세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어른거린다. 순전
히 오까모도의 너그러움 하나에만 기대를 걸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형극인 데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경솔한 것인 것 같다. 역시 분
명하게 징용이 면제되는 길은 일찌감치 도망가는 방법 뿐이라는 결
론에 이다른 것이다.
“피하자. 도망가자.”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목욕은 해야 한다. 목욕을 하면서 어디로 피할 것이냐. 어떻게

피할 것이냐를 좀더 궁리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까모도와 여러
해 동안 함께 근무를 했기때문에, 대륙3005호 기관차가 청진항 간이
역에 도착하고 나서 화부인 김남철이 어디에 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오까모도가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속하게 보복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목욕할 시간 쯤은 있을 것이라는 기대지만 설령 그런 기대
를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이 석탄가루 투성이의 몰골로는 어
디고 간에 갈 수가 없으니 목욕부터 서두를 수 밖에 없다. 하여튼 빨
리 여기를 뜨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그러나 술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아무리 다급해도 아무리 불안해도 술을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정히 가지고 갈 수가 없다면 이 자리에서 모조리 다 마셔 버리고 가
면 갔지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아까, 오까모도가 김남철 몰래 술 두
병을 꺼내느라고 풀어헤쳤던 보자기를 꺼내 오까모도의 사물함 뚜껑
에 펼쳐 놓고 여섯 병의 빼갈을 가든그리어 꾸렸다.그런데 심리적으
로는 이미 자신의 신분이 철도국에서 벗어났다는 현실에서, 갑자기
불행의 구덩이로 밀려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김
남철은 자신의 육체마저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환상에 휘감긴다.
도망가자. 우선은 목욕을 해야한다.
청진항 간이역과 본역의 중간쯤에 있는 목욕탕까지의 거리는 간이
역에서 북쪽으로 약 7백여 미터쯤 된다. 걸어서도 갈만한 거리지만,
견습화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7년여 동안 단 한 번도 걸어가 본적
은 없었고 본역과 간이역 사이를 오가는 많은 기관차에 편승을 하고
다녔었다. 자신이 철도국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의 결정
일 뿐이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아니다. 빈차로 오가는 기관차에 편
승을 한들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목욕탕에 있는 예닐곱 명의 욕객들 중에 알만한 사람들이 세 명 있
다. 그러나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다. 허둥거려지는

심정이라 서둘러 몸만을 씻었다. 그러면서 오까모도의 보복행위를
기정 사실로 돌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만을 되풀이 하여 궁리하
였다.
(4)
영글을 대로 영글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7월말을 벗어나 8
월로 접어드는 초순이다. 여기석은 여름방학동안에 3일간씩 배정된
당번 근무관계로 오늘도 사흘째 학교에 나왔다. 매일 4학년생부터 6
학년생까지 3개학년에서 각 학급마다 5녕씩이 등교하여 근무하게 되
어있다. 그러니까 오늘도 3개학년 9개학급에서 45명의 남녀 학생들
이 등교한 것인데, 목적은“귀축 미영군 <鬼畜=도깨비 짐승같은 米
英軍>”들이 야만적인 공습을 하여 소이탄을 떨어뜨려 학교를 불태워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는 경비였다. 그래서 각 교실마
다 그리고 그 교실들의 바깥 앞뒤쪽에는 소이탄공격을 받았을 경우
에 대비하여 두꺼운 널판으로 짠 커다란 저수통이 있고, 불털개, 갈
고리 방화사 등이 준비되어 있다. 당번학생들은 등교하면 우선 저수
통의 물이 자연증발 된 분량을 보충해야 하는데 그 작업은 그다지 큰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 저수통에 장구벌레가 생기는 상황이 되면
한참 땀을 흘려야 한다. 그 물을 다 쏟아버리고 그 통안에 낀 이끼까
지를 완전히 닦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에 물을 다시 가득히 채워
야 하는 데, 여기석의 학급이 2층인데다가 직선거리만을 따져도 우
물에서 가장 멀다. 우물은 학교건물의 서쪽 끝에 있는데, 6학년 1반
교실은 동쪽끝 2층에 있으니, 5명의 학생이 상한 물을 퍼다 버리는
것도 수월치가 않은 데다가 서쪽 끝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날라
2층 교실복도 앞에 있는 물통을 가득히 채운다는 것은 정말 힘드는

작업이었다. 그런데다가 당번이 배정되지 않은 저급학년의 교실의
방화수통까지도 관리를 해야 하니 당번 학생들의 오전중 일과는 진
정 중노동으로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도 수업이 없다
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방화수 문제만 처리 되고나면 오후 시
간은 당번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가 보내기 방편은 단조로운 것이다. 자치기 아니면 땅따먹
기 축구경기이다.
“야!. 우리 공차기 아이 하겠음등?”
힘드는 작업을 마치고 자신들의 교실근처의 그늘을 가리어 여기 저
기 흩어져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 학생들에게 여기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수업에 지장이 없는 시간이라면 그런 제안은 누가 하던지간
에 으레히 받아지게 마련인 것처럼 여기석의 그 제안도 곧 받아들여
졌고 이웃 학급의 학생들까지 권유하여 운동장으로 몰려 나오게 했
다. 여기석이 교정의 조례대 밑에 있는“새끼말이공”을 굴려냈다. 그
곳에 있는 세 개를 모두 굴려 냈는 데도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순
전히 새끼줄을, 실패에 실을 감듯이 겹겹이 감고 또 감고하여 둥그스
럼하게 만든 공이다. 두 개는 여기석의 아버지 여선규가 만들어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학년의 누가 만들어 온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여기석이 가져온 공은 좀 특이한 구조다. 보통은 십여 발의
새끼 한가닥을 가지고 둘둘 감고 그 위에 또 감고하여 뭉쳐 놓은 것
인 데 여기석의 아버지가 만들어 준 <새끼말이공>은 그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 한바퀴 감을만한 길이로 새끼를 토막을 내서 한둘레씩 감
고난 끝을 감겨진 세끼들의 틈을 비집고 휘갑을 하곤하여 매듭진 흔
적이 두드러지지 않아 공이 매끄러워 보이는 데다가 공차기를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어느 한 가닥이 끊어져도 그 끊어진 가닥만 갈아 감
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리 하기가 쉽다.

여기석은 동아리들과 의견을 나누어 그 공들을 들고 교사뒤의 그늘
진 곳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막감은 공>을 풀어서 그 새끼를 필
요한대로 알맞게 토막을 내어 여기석의집에서 가져온 공 두개를 원
형대로 수리하였다. 그리고“축구희망자”는 모조리 뛰게 하는 것이
다. 말하자면 정원제가 아니라 희망자 수 대로다. 다만 희망자 중에
서 가장 체력이 약한 학생 한 명을 가려내어“경기심판”으로 임명하
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상 하급생들을 고르게 섞어 편을 짰다. 전원
이 짚신 신은 발에 새끼줄로 감발을 하였다. 운동화를 신은 학생이
한 명 있는 데 그 학생도 운동화를 아끼느라고 헌 짚신을 구해다가
새끼줄로 감발을 하고 끼어 들었다.
축구경기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경기 진행 시간을 정하지는 않는다.
지난날서부터 그렇게 하여 온 방식인데, 시간을 정해 놓고 차게되면
일일히 교무실에 달려가 시간을 확인하곤 해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해가 두만강 북쪽의 만주벌에 있는 스두거우령(四道溝嶺)머리 위에
서 멈칫거릴 무렵까지 계속해 뛰는 것이다. 비록 공은 진짜 축구공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걷어차는 학생들은 진짜였고“이기겠다”는 의지
또한 진심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여 차도 별로 날으지도 않고 멀
리 가지고 않는 <새끼말이공>이지만 학생들이 뛰는 것은 진짜였고
“심판의 판정”에 불평과 항의 또한 진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기
도중 가끔 진짜 삿대질과 진짜 거치른 언성이 오가는 수도 진짜로 있
었다. 그러한 결과로 선수들이 진짜로 많은 땀을 진짜로 흘렸다.
경기는 끝났다. 그들은 우물가로우르르 몰려가 각기 품앗이로 목물
을 하기도 하였고 샛발가벗고 전신을 씻기도 하였으며 동아리들이
바가지로 퍼붓는 물벼락을 맞을 때는 흑흑느끼며 고성과 기성을 지
르기도 하였다. 그들은 갑자기 시원하여진 것이다.
아까 축구경기를 할때에 오른 쪽 발끝 부분이 아리도록 아푼 것을

우선은 공차기가 바쁘니까 그것을 거들떠 볼 여유도 없이 참아왔는
데 이제 씻으면서 새삼 쓰라림을 느낀 여기석은 그제서야 아픈 곳을
살펴봤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가 찢어졌다. 제법 피가 흐
른다.
“뉘기 뽀뽀로시갈기(“노어”담배가루) 좀 어드버 올쉬 없겠음둥?”
새삼 쓰리고 아려지는 상처의 통증을 참느라고 얼굴을 찡그리며 여
기석이 외쳤다.
축구경기의 심판을 봤던 채경만이 선뜻 일어났다.
“내 교무실에 가 보겠음메”말을 마치며 급히 달려갈 태세를 취한
다. 그러자 발가벗은 채 몸을 씻고 있던 조영진이 다급하게 채경만을
불러 세운다.
“야 이 갈라새:끼야. 니 교무실에 가서 무시레 하겠음둥? 오늘 당
번이 에하라 선새미(선생) 아임? 안깐 선새 미(여선생)에게 무시기
뽀뽀로시가 있겠음둥?”
조영진이 채경만을 책망하는 투로 욱박지른다. 핀잔을 받은 채경만
도 조영만에게 반박을 한다.
“궈래 웃븐 소리 맙세. 교무실에능 안깐 선새미만 있음둥? 선스니
선새미(남자 선생)두 있음메. 뽀뽀로시갈기 아이믄 약이 있을지두
모르재임?”
“약은 없읍메. 아적나절(아침나절)에 내가 손으 다쳐서 교무실에
갔었읍메, 쇠통(전연)약이 없닥합데”
역시 벌거벗은 채로 몸을 씻고 있는 4학년생 길창식의 설명이다.
약도 없고 담배가루도 구할 수 없다면…… 문득 여기석의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낮에 남자선생 한 사람이 교무실엘 다녀 가는
것을 봤다. 어쩌면 담배꽁초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일단은 교무실엘 가보기로 하였다.

채경만과 조용진에게 교무실엘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조용진은 승
락을 하며 서둘러 옷을 입었다.
여기석은 오늘아침에 아버지가 내주는 새 짚신을 신고 등교했었다.
헌 고무신의 바닥을 오려서 짚신창을 댄 것이기 때문에 웬만한 진땅
에서도 발바닥이 젖지 않도록 공들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축구경기
를 하고나니 짚신총이, 특히 양짝이 다 엄지총을 비롯하여 앞쪽 신총
이 많이 나갔다.
이제 다친발에 다 떨어진 짚신을 걸칠려니 바로 앞감개가 다친부분
을 문지르게 된다. 참기어려울 정도로 쓰리다. 그래서 앞 뒤 갬기만이
남아 있다시피한 떨어진 짚신이나마 오른쪽 발에는 걸치지를 못하고
발뒤꿈치로 디뎠다. 두 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여기석은 약간 엄
살이 섞인 절뚝걸음으로 교무실에 들어섰다.
“아라, 호시무라궁 도오시다노?”(어머, 호시무라군 어찌된거야?—
호시무라=星州=呂씨의 창씨 성)에하라 선생은 눈이 휘둥그래진다.
“훗도보루노 아소비오 시단데승아 아시유비니 좃도 겡아오 시마시
다”(축구놀이를 했는 데 발가락사이를 조금 다쳤습니다)
에하라 선생은 짝 소리가 나도록 합장을 하여 자신의 가슴에 댄다.
무척 안타깝고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이걸 어쩌나. 약품이 아무 것도 없어요. 소독약이고 치료약이고
아무 것도 없어요. 심지어 붕대 한 오리도 없구요.”
에하라 선생은 여기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미안하고 측
은해 하는 태도다.
“소레데와……담배꽁초라도 좀 찾아볼까요?”(그러면……)
아무리 약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석의 입에서 담배꽁
초라는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어머 담배꽁초도 이런 상처에 약이 되나요?”

“하이……”(네……) 여기석은 일단 수긍을 하여 놓고 생각을 가다
듬어 말을 이엇다. 산골생활에서 작업을 하다가 다쳤을 경우 그 상처
에다가 된장을 바르는 경우도 있고 담배가루를 바르는 경우도 있음
을 설명했다. 그런데 담배 꽁초도 없다.
교무실에서 나온 여기석은 근무일지를 정리 하였다. 그리고 조영진
에게 부탁하여 당직인 에하라 선생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자의 집으로 향해 흩어졌다.
여기석은 집으로 갈까 외삼촌네 집으로 갈까고 잠깐 망서렸다. 이
제부터 2십리길인 샛강골로 가자한들 못갈것은 아니지만 다친발이
좀 불편하다.
읍내에 있는 외삼촌네 집으로 향하였다. 여기석은 판자울타리 왼쪽
끝에 서 있는 쪽문안으로 들어섰다. 초등학교 2학년생인 외사촌 동
생 김성갑과 외숙모 손명희의 반색을 받으며 정주문 옆의 쪽마루에
걸텨 않았다. 일요일이 아니라 외삼촌은 안 왔단다.
안마당의 빨래줄에서 빨래를 걷어 들고 돌아서는 외숙모가 그제서
야 여기석의 행색을 재빠르게 휘더듬는다.
다 떨어진 짚신 한 짝은 발밑에 놔두고 한 쪽발은 맨발인채로 쪽마
루에 걸터 앉아 있는 여기석을 보는 손명희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다
급하게 묻는다.
“궈래 워찌된 것임메?”
여기석은 오늘 축구경기 과정에서 다친것을 간략하게 설명 했다. 여
기석의 설명을 듣고난 외숙모는 여기석에게 왕밤을 주는 시늉을 한
다.
“손수(너) 장난이 워찌 그리 우둔하지비?”
말을 마치며 정주문을 통해 안방으로 들어 간 손명희는 이어 갑오
징어 뼈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부엌모퉁이에 있는 두레우물에서 물

을 오지자백이 하나 가득히 떠가지고 왔다. 그것을 여기석의 발앞에
놓고 발을 씻으라고 일렀다. 손명희는 다시 정주간으로 들어가더니
또 금방 나왔다. 검은 엿덩어리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여기석은 그
것이 왕겨와 동물성 지방을 섞어 조잡하게 만들은, 물렁물렁한 세탁
비누라는 것을 안다. 손명희는 거품도 일지 않는 그 비누로 여러번
거듭하여 여기석의 발을 문질렀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
아냈다. 성갑이를 시켜서 이미 내다놓은 창칼로 오징어뼈를 긁어 그
가루를 여기석의 상처에 뿌렸다. 다시 정주방으로 들어갔던 외숙모
는 검은색의 천조각과 누런색의 헝겁쪼가리를 대고 발뒤꿈치 부분을
기운 밤색 양말 한 켤레를 들고 나왔다. 검정색 천을 지네발처럼 찢
었다.그 천으로 오징어뼈가루 뿌린곳을 감싸 지네발처럼 찢은 부분
으로 발을 묶었다. 그리고 밤색 헌양말 한짝을 오른발에 신켜준다.
남은 한짝을 건네준다.
“이거 거르마니에 여었다가 나래 신도록합세”(이거 호주머니에 넣
었다가 나중에 신어라)
비록 중상은 아니지만 상처난 발이 아무래도 불편하다. 평소에 이
렇게 외가집에 왔을 적에는 시간이 있으면 성갑이와 딱지치기든 땅
따먹기든 안마당에서 장난을 하다가 해가 넘어간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는 데 오늘은 저녁식사를 마치자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
다.
등화관제 체제가 시행중이니 전등도 못켠채로 모기장을 들치고 들
어가 성갑이와 나란히 누어 두런거리다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둘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여기석은 뭔가의 기척을 느꼈다. 누구들인가가 수
군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석은 납덩
이처럼 무거운 눈까풀을 간신히 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화다닥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비춰진 손정등불빛을 가리며
그 불빛 밑으로 상대방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실피려 하였다.
네 귀퉁이의 벽에 걸어맨 모기장끈의 마당쪽 두 가닥이 끊어져서
모기장이 늘어져 있다. 두사람인 것 같은 데 용모를 알아보기는 어렵
다. 손정등불빛이 부시다. 두명이 다 양복차림인 것 같다. 그들은 여
기석과 여전히 곤하게 자고 있는 김성갑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던 손
전등의 광선을 천장으로 돌린다. 그리고 반자지의 이음매를 세밀하
게 살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기석은 감히 그들의 신분은 고사하
고 이 방에 들어온 이유 조차도 묻지를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천장을 휘더듬던 광선이 여기석의 얼굴로 다시 달려
왔다. 그리고 낮으막한 음성이 날아왔다.
“고라.”(인마)
“……?”
여기석은 자신에게 건너오는 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판단은 하면서
도 감히 무어라 응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사람이 지까다비(일본 노동판에서 신는 간편화)
를 신은 발로 여기석의 허벅지를 툭툭 차며 다시 말을 한다.
“키사마 고다에로”(너 대답해)
여기석은 손바닥으로 불빛을 가리며 그 말하는 사람의 정체를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눈이 부셔서 얼보인다. 무얼 대답 하라는 것인가.
대답해야할 내용의 질문이 건너오기를 기다리며 불빛에서 시선을 돌
렸다.
“고꼬데 네뭇데 이다 야쓰 도꼬에 있다까”(여기서 자고 있던 놈 어
디갔냐)
그제서야 여기석은 이 사람들이 읍사무소 서기 아니면 경찰관들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이 험악한 전쟁판에 손전등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안
다. 여기석의 집이 무산읍에서 백두산쪽으로 서쪽 끝이다. 외삼촌인
김남철이 여기석의 집에 와서 술타령을 하다가 이슥하여 일어나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할아버지는, 외삼촌더러 자고 내일 새벽에
가라도 권하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지만“내일 아침의 출근 관계로
그럴 수가 없다”면서 기어히 밤길을 더듬거리며 가는 경우가 있었
다. 그럴적마다 손전등의 아쉬움이 논의 되는 수가 있었는 데 <순사
놈들이 금한다>는 말이 누구 입에서든 나오곤 했었다.
<조선독립을 꿈꾸는 불순분자들>이, 야간에 올는지도 모르는 미 영
국의 비행기에 신호를 보낼 우려가 있다고 하여 일반인들 특히 조선
사람들의 손전등 사용을 금하고 있다는 말을 여기석은 몇 번인가 들
은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손전등을 가지고 다닐수 있는 사
람이라면 우선 경찰관이거나 또는 경찰서에서 상당한 신임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지금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손전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찾는다. 징용기피자를 잡으러 나왔나보다라고 짐작을 하였다. 그렇
다면 이 집에 온 것은 잘못 온 것이라고 단정을 했다. <나의 외삼촌
은 기차의 화부니까 징용해당자가 아니고 그밖의 남자란 이제 열 살
난 성갑이 밖에 없다. 다른집에서 징용을 기피하여 도망 온 사람이라
도 찾아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잘
못 들어온 것>이라고 단정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석은 해가 지기도
전에 이 집에 들어와서 저녁밥을 먹고 성갑이하고 잡담좀 나누다가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 사이가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 데도 외숙모와
성갑이 외에 다른사람이 와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고 눈치도 못
챘다. 이 집은 전통적인 함경도식 가옥이다. 정주방이 있고 옆방과
뒷방 그래서 방이 세칸 있는 구식집이다. 뒷방문이 완전히 열려 있었

던 것으로 보아 누구든 어디든 숨어 있으려해도 숨을 구석이 없다. <
이 사람들이 잘못 알고 들어 온 것이다>라고 거듭 단정을 하고나니
여기석의 마음이 한결 놓인다. 이제는 묻는 말에 응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을 가다듬어, 천천이 입을 열었다.
“고찌라데와 와다시다찌 후다리끼리데 네뭇데 이마시다. 호까니
다레모 오리마센데시다.”(여기서는 우리들 둘만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 외엔 누구도 없었습니다.)
여기석의 해명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받아들였음인지 그 두 사람
은 조금 수근거리더니 방에서 나갔다. 방에서 나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조용한 조선어 음성이 들려왔다.
“아주망이, 절대로 두려버 하지맙세. 죄만한 문제로 물어 볼기이
있어 그러는 것입메. 스나이(남편)돌아 오믄 주재소든 경찰서든 잠
시 들르락합세. 알겠음둥?”
“예엥”
외숙모의 낮으막한, 그래서 목구멍으로 다시 기어넘어가는 듯한 가
냘프며 떨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손전등 불빛으로 길을 더듬어 큰질
쪽으로 사라지는 그 사람들의 모습을, 여기석은 열려진 방문을 통하
여 보았다. 외숙모는 벌써부터 이 정주문밖 안마당에 나와 있었나보
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외숙모의 방을 먼저 뒤지고 이 뒷방엘 들
어 왔었던 것이로구나. 여기석은 그 사람들이, 읍사무소 서기들인가
고 생각을 하였었는 데 이제 외숙모에게(스나이 돌아오믄 주재소든
겡찰서든 잠시 들르락합세)라고 이르는 말에서 조선인 순사들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면 그 순사들이 왜 왔었단 말인가가 몹시 궁금하였
다. <저 사람들이 다른집에 가려던 것을 실수로 잘못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외삼촌을 잡으러 왔단 말인가? 이상하다? 여기석은
낡아빠진 짚신코에 발가락을 꿰어 찍찍 끌며 희미하게 보이는 외숙

모 앞으로 다가갔다.
“기석임둥?”외숙모의 조용한 음성이다.
“예엥”
“바르 다친거 어떻슴둥?”
“웬간 합소꼬망. 약두 바루구 헝거치(헝겁)로 감았구 양말으 신고
하여 웬간 합소꼬망”
여기석의 응답을 들은 손명희는 정주문앞의 쪽마루에 걸터 앉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여기석의 손목을 더듬어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앉
힌다. 이제 여기서 나간 사람들의 지나가는 기척에 놀랐나보다. 그다
지 멀지 않은 곳에서 개가 자지러질듯이 짖어댄다.
“손수(너) 놀랬지비?”그렇게 말하는 외숙모의 음성도 불안에 잠겨
있다.
“옛꼬망. 무시래 사람들임둥?”
“순사들임메. 한 사람은 이께다 형사입메”조용히 말을 마친 외숙
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이께다 형사).…… 여기석은 자신과 같은반 학생인 지수웅의 창씨
성이 (이께다)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의 아버지 지천만씨가 형사라
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얼굴도 안다. 그 뿐아니라 그 지 형사가 자
신의 아버지 여선규씨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는 것도 안다. 아버지
와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그런 인연으로 외삼촌과도 잘아는 사이라
서 세 분이 이따금씩 어울려 술과 밥을 나누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에서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보다 나
이는 두 살인가 세 살인가가 아래지만 그래도 어머니와는 이웃간에
서 함께 자랐고 무산보통학교도, 학년의 차이는 있었을 망정 함께 다
녔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의 아들과 내가 같은 학급이고…… 그랬
는데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외삼촌을 잡으러 왔었단 말이로구나.)

여기석은 지 형사가 좀 야박스러운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
러면서 어른들의 세계가 조금 아리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개
를 수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한숨을 길게 쉬고난 손명희는 <너의 외숙이 무시래 큰 재귀(실수)
르 부렸능가보다>며, 허공을 향해 독백처럼 중얼거린다. 몹시 불안
해 하는 말투다. 외숙모의 그런 태도를 보는 여기석도 무척 불안해진
다. 그도 하늘을 봤다. 흐렸나 보다. 별이 안보인다.
“이께다 히데오(지수웅의 창씨명)의 아베능 외삼촌하가 가까븐 사
이가 아이오?”
“알지비. 지형사능 손수 어이어시 (너의 부모) 하가도 가까븐 사이
고 너그 외삼촌두 나두 가까븐 사이지 마네서두 왜놈들 덕분으로 먹
구 살기때문서리 오랍사이으 (이웃간의) 정이락하는기 지키기 어려
블 것임메. 왜놈으 순사는 쇠통 왜놈이지비 조선놈의 행세할 쉬 있겠
음? 왜놈드리 시키는 대로 하재이쿠 워찌겠음? 지 형사 말은 벨일
아이라 했음매. 그러믄서 너그외삼촌이 언제 집에서 나갔능가 언제
오능가. 요지음 누구레 만나는 사람이 없었능가 뉘기 찾아온 사람이
없었능가를 물었음매”
“지금 외숙은 어디 계심둥?”
“오늘 오후에 청진에 왔을 것임메. 그래서 오나조 (오늘저녁)는 청
진에서 묵을기라고 알고 있음. 수덕구지르(술을) 마이다가 (마시다
가) 무시래 도사이르 (무슨 소란을) 부렸는지 쇠통 (전연) 모르겠읍
메…… 세상없이 수덕구지르 마이어도 조무래선 (좀처럼) 도사이르
부리거나 실쉬하는 사래미 아인데 이제 그 순사들이 온기로 보아 보
통 일은 애인 것 같습매.”말을 마치며 외숙모는 또 허공을 본다.
“순사드리 무시래 일로 왔다고능 마르 아이 합데?”
“무시래 왔다고는 마르 아이 했읍메”

방안에서 괘종시계 종소리가 울려온다. 여기석은 그 종소리의 수를
머리속으로 또박또박 세었다. 열 한시다. 그리고 보니 그다지 늦은
밤은 아니다.
“방금 몇시르 때렸읍메?”
여전히 나직한 음성으로 외숙모가 물었다.
“열 한시옜꼬망”
외숙모가 조용히 일어서며 나직히 말한다.
“궈래(너) 성갑이랑 오솜소리 자고있읍세. 나는 얼피덩(얼른) 순수
집(너의집)에 다녀와야겠읍메. 간장이 타서 이렇게는 몽있겠읍매”
비장한 결단을 내리는 것 같은 외숙모의 말씨는 결연하였지만 태도
는 침착하였다. 이에 여기석은 벌떡 일어섰다. 이 한밤중에 외숙모가
왜 자신의 집에 가려는지를 여기석은 안다. 외숙부가 뭔가의 사고가
있어 피신을 하였다면 반드시(누님댁)에 가 있으리라는 단정에서다.
그렇더라도 여기석 자신이 가야한다고 믿는다. 외숙모의 앞을 가로
막으며 나지막하게 그러나 빠르게 말을 하였다.
“아이 되오. 우리집으능 내가 가야지비. 아주망이가 가믄 아이되
오. 이 어두분 밤에. 내가 빠르지 않겠음? 내가 뛰막질 (달음박질)로
다녀오겠소꼬망. 무시레(왜) 가능지르 말이나 합세. 만일에 외숙을
만나면 무시래 마르 전해야 하오? 어서라(어서) 마르 합세”
외삼촌의 신상에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짐작에 여기석
도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그래서 허둥거리며 짜증스럽게 외숙
모의 의사에 반대했고 전달할 내용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뒷방문앞
엘 갔다. 아까 들어와서 풀러 놓았던 새끼줄 토막을 찾아 들고 나왔
다. 짚신 총이 여러 오리가 끊어져 헐렁거리는 것을 그 새끼 토막으
로 감발을 하였다.
“이 어두븐 밤에 궈래가 어찌 다녀 오겠음등?”

손명희는, 어른들도 감히 나서기 어려운 어두운 밤길, 자그마치 왕
복 4십리길이나 되는 곳엘 갔다 오겠다는 여기석의 성의와 용기가
기특하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남편
의 신상에, 뭔가 감겨들고 있는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촌각
을 다투어 남편을 빨리 만나봐야겠다 그렇게해서 경찰에서 찾고 있
는 이유를 후련하게 알아야겠다. 비록 여기석이 시누이의 아들이라
고는 할망정 한치건너 두치다. 제 삼자를 내세울 수 있는 마음의 여
유가 없다. 남편이 정히 몸을 피해야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
다면 틀림없이 샛강골에 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남편이 숨을 곳
이라고는 <이 세상 천지에 샛강골, 누님의 집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손명희는 어서 빨리 샛강골에 가야한다고 의지를 다진다. 거기에 가
면 틀림없이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촌각을 다투어 남편
의 모습을 보아야겠다. 별탈없이 잘 있더라라는 다른 사람의 전갈이
아니라 손명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겠다는 의지다. 또 경찰이
찾아다니는 문제에 관해 대책을 신속히 상의 하기 위해서라도 손명
희 자신이 가야겠다는 결심이다.
“궈래는 닷서 성갑이 하가 자고 있읍세. 내가 얼피덩(빨리) 다녀 오
겠읍메.”
“…………”
여기석은 외숙모의 지시가 마땅치 않았다. 어찌할 바를 분간치 못
하고 우물거리고 있는 데 외숙모의 짜증섞인 독촉이 건너왔다.
“어서라 방에 들어갑세”
손명희는 말을 마치며 나가려 한다. 여기석은 재빨리 외숙모의 팔
을 잡았다. 그리고 앞을 가로 막았다.
“아주망이 가믄 아이 되오.”
손명희는 여기석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겠어서 그를 짜증스레 바

라 보다가 묻는다.
“손수 무시래 말이지비?”
“만약에 말입꼬망. 이제 다녀간 순사드리 아주망이으 행등으 보려
고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두 모르재이요? 나라믄 가다가 그 순사드르
게 들킨닥 할지라도 집에 간닥하믄 마리 되겠지마네서두 아주망이능
앙이되오. 이 깊은 밤에 어디르 간다구 하겠소꼬망? 샛강골에 간닥
하는 말은 몽할기 애이겠음?. 그라믄 이 무산읍내 뉘기네 집에 간닥
해얄끼 아임등?. 그랬을 겡우 그 순사드리 함께 가보작 하믄 어찌겠
소꼬망? 아주망이가 그 순사드르 데불고 뉘기네 집에든 가얄것 아이
갰음? 얼리뿌제이(거짓말)가 아니락 하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설라무
니 말이우다. 그런데 이 깊은 밤에 그 순사드르 데불고 뉘기네 집에
가겠소꼬망?”
여기석은 일단 말을 마치며 외숙모를 빤히 본다. 그의 답변을 기다
린다.
“…………!”
듣고 보니 그렇다. 여기석의 총명함에 손명희는 새삼 감동한다. 얼
른 댓구를 못한다.
“아주망이능 아이되오. 내가 다녀 오능기가 빠르오. 우리 부미(부
모)에게 알겨줄말이 무시기오.”
손명희는 어린 여기석의 슬기로움에 감동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
렇다. 교활하면서도 능글맞은 일본 경찰이라는 말이 있다. 물러서는
듯 하면서도 절대로 실속없이 물러서는 법은 없는 것이 일본 경찰이
라고 들었다. 지금 여기를 다녀간 그 사람들도, 여기석의 말처럼 지
금 어느 길목에선가 (우리)의 움직임을 엿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역시 여기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남편에게든 여기석의
부모들에게든 전해야할 내용은 뻔하다. 순사들이 밤에와서 가택수색

을 하고 갔다는 사실을 알리면 된다. 그리고 <스나이(남편)가 오믄
경찰서에든 주재소에든 잠시 들르라>고, 이르고 갔다는 사실만 알리
면 되는 것이다. 손명희는 여기석을 끌어당겨 얼싸안고 머리를 쓰다
듬었다. 그리고 떠나 보냈다.
등화괸제 체제하이기 때문에 가로등은 물론이고 주택가에서 흘러
나오는 이삭불빛조차도 없는 캄캄한 밤길이지만 여기석은 방향이나
속도에 지장도 차질도 없이 샛강골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발걸
음소리를 죽이느라고 신경을 쓰면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살펴야하는 경계성은 늦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개의 청
각이나 후각은 속여지지 않나보다. 발걸음소리를 죽여가며 주변의
동정을 샅샅이 살핀다고 신경을 쓰면서 부지런히 걷고 있는 데도 오
른 쪽 골목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온다. 조금전에 짖었던 그
개소리인 것 같다. 개짖는 소리가 순사들을 불러오는 신호나 되지 않
을까 하여 여기석은 등골이 오싹거릴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다.
역시 통학하느라 5년여의 세월을 심으면서 아침저녁 두 차례씩 밟
고 다녔던 길이라서인지 불빛이야 있건 없건 눈을 감고도 걸을 수있
을 정도의 그런 노면이지만, 여기석은 생소한 고장의 밤길을 걷는 것
처럼 될 수 있는대로 조심을 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이제는 겅성드
뭇하게 나타나 까만하늘에서 꿈벅거리고 있는 별빛이 우려져서인지
아니면 걸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하여져서인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길 앞은 계속해서 뿌옇게 길이 보인다. 아주 다행스러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의 이정으로 보아 그리고 희마
하게 보이는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십리가 넘게 걸어 왔다는 것을 안
다. 아직도 십리남짓 더 가야한다. 여기서부터 샛강골까지 가는 길섶
에는 인가가 전연 없다. 한길에서 갈라져 들어간 산자락에 농가가 두

어 서너채씩 박혀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을 따름이다. 노면이 지금까
지보다는 훨씬 더 거칠은 데다가 숨가쁜 오르막과 한숨돌리는 내리
막길이 몇 고비 있다.
무산주변에서나 마찬가지로 백두산 주변 일대에서도 3십여 년 동
안 계속해서 대대적으로 벌목을 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석은 안
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를 실어내기 위하여 벌목을 시작하던 초
창기에는 우선 뗏목을 만들어 압록강에 띄워서 신의주로 가져가면서
그 목재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면서 뗏목을 띄울 수 없는 지역, 이를
테면 백두산주변에서 부터 시작하여 무산 회령 종성 온성지역으로
이어지는 두만강유역의 목재를 실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자동차길을
닦아 트럭으로 목재를 실어 냈었다는 것이다. 그 압록강 두만강 주변
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목재를 팔아 조달된 자금으로, 이번에는 보
다많은 양의 목재를 보다 신속하게 실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철로를
깔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대부분의 목재를 기차편으로 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석도 알고 있다. 지금 무산읍에서 서쪽으로,
그러니까 백두산이 있는 방향으로 샛강골을 지나 홍암을 거쳐 삼산
포로, 다시 허항령으로 통하는 신작로도 원래는 목재를 실어내기 위
하여 만들어진 길이었단다. 그후 기차가 다니게 되면서 부터는, 중요
한 화물인 목재를 기차에게 빼앗긴 트럭이 사라지게 되자 어쩔 수 없
이 폐도나 다름없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 그 신작로들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무산읍에서 샛강골로 통하는 길을 보아 다른 신작로들도
다같은 상황이라고 여기석은 들었다.
장마철때마다 이골짝 저골짝에서 폭포처럼 내리 쏠리는 물줄기에
의해서, 그리고 겨울동안 몇 미터씩의 두께로 쌓였던 눈이, 봄철로
접어들면서 반드시 녹아내리게 마련인데,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지기
라도 할라치면 마치 장마철의 홍수를 방불하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수량이 골짜기마다에서 쏟아져 내린다. 이런 때, 화전을 비롯하
여 신작로든 산모퉁이든 가릴 것 없이 물줄기가 부딛히는 곳마다 패
이고 끊기고 한다. 화전은 삶의 근거지이니까 온가족이 동원되어 원
상으로 복구를 하여 놓지만 훼손된 신작로고 끊기어나간 산모퉁이
따위는 손질하는 것을 여기석은 본적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산모퉁이
는 홍수에 쓸려 내려가 다른곳의 언덕이 되기도 하고 동강난 길은 새
로운 너덜겅이 되는 경우도 있다.그래서 장마철이 지나면 노면뿐만
이 아니라 길의 형태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직선이 곡선으로 곡선이
직선으로 또는 길이가 당겨지는 수도있고 멀리 돌아다니게 되는 경
우가 가끔씩 생긴다. 그러다가 또 장마 한 철을 겪고 나면 몇 년전의
길이로 되돌아 오는 수도 있고.
도대체가 이 길을 개설하는 목적이 임산물반출에 있었던 것이지 지
역주민들의 생활편의라든가 문화발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하기야 생활향상이고 문화발전이고를 누려야할 주민이 몇
명 되지도 않는다.
당장 샛강골을 중심으로 하여서만 본다 할지라도, 한길을 사이에
두고, 남 북으로든 동 서로든 십리 안팎에는 모조리 화전민들만이 사
는 데 그 주민 수라는 것이 겨우 다섯 세대에 2십2명이다. 그나마도
한 골짜기에 두서너 집 정도로라도 모여 사는 곳은 한 군데도 없고
그야말로“단독 세대에 단독 마을”이다. 그래서 이웃과 이웃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몇 백미터고 좀 떨어졌다 하면 몇 키로미터다. 그런
처지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끼리 평소에 마실을 다닌다든가 오다가다
잠깐 들른다든가 하는 경우란 전연 있을 수 없고 품앗이를 해야할 정
도의 넓은 농토도 없고 하니 이래저래 주민들간에 한 길로 다녀야할
왕래는 별로 없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몇 십년래에 이 가구수는
전연 변화가 없이 이어져 왔고 주민수 만이 2~3명 정도가 늘었다

줄었다를 되풀이 하여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다만 큰일이 있을 때만은 다르다. 환갑잔치나 혼인잔치가 있는 경
우인데 이 고장 주민 남녀 노소가 거의 다 모여서 밀렸던 환담을 나
누기도 오랜만에 별식을 즐기기도 한다. (여기석의 집을 제외 하고
는) 가축은 없는 고장이니, 육류는 반드시, 멧돼지가 아니면 노루 백
두산사슴 등 야생동물을 잡아서 쓴다. 물론 이런 야생동물을 잡아먹
는 것은 대사가 있을 때만은 아니다. 관청의 단속이 엄하여 자주 잡
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잡는다. 산중생활이 좀 한가로워졌다든
가 고기가 좀 먹고 싶어졌다든가 하면 동작이 민첩한 사람들끼리 연
통을 하여 사냥을 한다. 이런경우의 포획물은 반드시 균등 분배한다.
사냥꾼대열에 끼이지 못하였을 지라도 동량의 고기를 배당 받는다.
6십세 이상의 노인이 있는 집에는, 노인 한사람당 한 근씩을 더 준
다. 여기석의 아버지는 단골 사냥꾼인데다가 6십세가 넘은 할아버지
와 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배당량이 넉넉하게 돌아온다.
대사에 쓰는 술은 대부분 머루주 또는 들쭉나무 열매로 담근 들쭉
술 더덕술 따위들이다. 여기석이 들은 바로는 아주 맛이 좋다는 것이
다. 몇 년만에 어쩌다가 있는 그런 기회가 주민들끼리의 얼굴도 익히
고 정도 나누고 하는 아주 즐거운 기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 환
갑나이를 사는 노인이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열네 살이된 여기석이
지금까지 그런 잔치에 두번 참석해 봤는 데, 한번은 자신의 할아버지
환갑 때였고, 또 한번이 한나절이나 걸려서 갈 수 있었던 봉바위골의
진씨 할아버지 환갑때 였다.
혼인은 화전민들끼리만 하고 있다. 외지의 농촌에서 화전민에게 시
집을 오겠다는 여자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고, 반대로 이고장에서 딸
을 가진 부모들은 외지의 농촌에서 사위를 맞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지만 그 뜻 또한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다. 그런데 딱 한 번 예외의 현상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다>
라고 여기석의 동기간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은근히 내세우고 싶어 하
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일때의 화전민들 사회에서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오직
(우리들의 아버지뿐)이요, 보통학교를 졸업한 시체여성인 데다가 개
명한 도시 무산면사무소 소재지 출신이기도한 여인을 어머니로 모신
(아이들 또한 우리들밖에 없다)는 것이 여기석 동기들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자부심이요 긍지였다. 물론 그런 기적과도 같은 상황
이 빚어지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그 첫째가 여선규의 아버지 혁룡씨가 두만강 건너 2십리 북쪽에 있
는 만주땅 리운골이라는 데를 드나들며 약 2천평가량의 논농사를 짓
고 있었다. 말하자면 도강영농이라는 것이었는 데 이때문에 화전에
서 나오는 수확만 가지고 생활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는 경제적
여유가 상당히 있었다는 점이고, 그래서 그 여유로운 경제력으로 외
아들인 (선규)를 대처의 여느 아이들처럼 공부를 시키겠다는 의욕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며, 여선규네 집이 무산읍내에서 2십리밖에 안되
는 거리여서 무산보통학교를 통학하기에 별로 무리가 안된다는 점
과, 그리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는 여선규의 강렬한 의욕이 보태지
고 하여 결국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왕복 4
십리길을 6년간 부지런히 다녔고 끈질긴 노력을 하였다. 그렇게한
결과로 6년간의 연속 우등상과 6년간의 개근상장까지 거머쥔 졸업장
이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석은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함경북
도 도청 소재지인 청진에 가야하는데 여혁룡씨의 경제기반이 약간
취약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더 주요한 이유는 (어린아이)를
그 것도(단지든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수 백리 타향에 보내기

에는 여혁룡씨의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떡하든지 (화
전민들 대열)에서는 벗어나게 하겠다는 여혁룡씨의 염원과 집념이,
그리고 여선규의 소문난 자질이 인정되어 무산군청 소사로 취직이
되었다. 거기에서의 근무자세 또한 군청직원들의 인정을 받았었고
그 인정의 보상성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열아홉살 되던 해 봄에 무산
면사무소 임시직 서기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군청의 사환으로
들어갔을 때나 마찬가지로 큰 발전이고 출세라고 친분있는 사람들의
많은 찬사를 받았다.
면사무소에서도 사무능력과 대민관계가 적절한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2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정식 서기로 승진되었다.
앞으로 군청서기로 발탁될 것이라는 여망을 받는 가운데 3년째의 면
서기 근무가 계속되고 있던 가을에 혼인을 하였다. 무산보통학교 선
배이자 읍사무소 선배직원인 김두룡 서기의 중매로 그의 사촌 여동
생인 김서분을 맞은 것이다. 하기야 김서분과 여기석은 무산보통학
교 동기생이었다. 그래서 그들 둘은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은
물론이고 장난도 많이 하였고 몇 번인가는 싸운적도 있었다. 보통학
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여기석이 계속 무산군청과 무산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들 둘은 노상에서 우연히 만나는 기회가 더러
있었는 데 그럴 적마다 그들은 아무런 스스럼없이 반갑게 인사를 나
누곤 하였지만 혼담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는 서로 눈인사만 나누
는 데에도 얼굴이 빨개지며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곤 하였다. 그렇게
하여 화전민의 아들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혼인이 아무러한 파문도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무산면사무소에
근무하니까 우리 어머니와 결혼할 수 있었지 샛강골에서 화전이나
일궈먹고 사는 처지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은 여기석
동기들 뿐만이 아니고 샛강골 주변의 화전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일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여선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전민 이외의 남 여와 혼인을 한 사람이 전연 없다. 모
조리 화전민들 끼리끼리의 혼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산등성이 넘
어가 친정이요 처가다. 남 여가 친정엘 가든 처가엘 가든 또는 아이
들이 외가엘 가든 등성이 하나만 넘으면 나드리가 끝나는 것이다.
장례때는 조금 다르다. 혼인잔치나 환갑잔치는 예정된 행사기 때문
에 상당히 오랜기간을 두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인근 주민들에게 미
리 알릴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초상은 갑자기 당하게 마련이다. 아
무리 중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떠나는 시간)을 예정하
지는 못하는 것. 더불어 미리 부음을 전할 수도 없는 것이니 운명을
한 다음에서야 인근 주민들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마련인데 산을 넘
고 재를 넘고 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밤중에 당하는 경우는 더
욱 그렇다. 그런경우 부음을 받고, 자기나름의 긴요한 일이 있어 조
금 지체를 하다가 상가에 도달하여 보면 이미 풍장이 끝난 뒤였더라
는 말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옥수수 감자 기장 등의 식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거의 자가생산 하다시피 한다. 봄철부터 가을철에 걸쳐
채집했던 약초들을 무산장에 내다 파는 데, 양이 많으면 자신이 짊지
고 가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른 인편에 위탁하여 보내는 경우가 흔하
다. 그 약초를 판돈으로는 약간의 소금과 자반 고등어 몇 손 사오는
경우가 많고, 평소에는 등잔불을 안쓰고 등화용으로는 토담벽을 조
금 후벼내고 그곳에다가 관솔을 태워서 얻는 고콜불을 쓰기 때문에
좀처럼해서 석유를 사는 경우도 없다. 양초 두자루면 몇년 동안 물려
가면서 제사때나 명절 차례때 두고두고 쓰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가 인조견 또는 광목 몇 마,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임신부가 있는 집
에서는 미역 몇 오리를 곁들이는 경우가 있는 데, 이런 정도가 일년

에 무산읍내 장에서 사야하는 물품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고장의 중요한 <무역행위>다. 이 지역 주민들의 일상생활형태가
이러하니 오솔길에서고 신작로에서고 간에 노상에서 지나다니는 사
람을 만난다고 하는 경우란 좀처럼 있기가 어렵다.
그런 정도이니 트럭이 부지런히 다니던 지난날이나 기차가 억척스
럽게 달리는 오늘날이나 주민들에겐 그다지 긴요한 신작로도 아니었
고 철길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작로든 오솔길이든 파손된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
는 능력이 몇 사람 안되는 주민들에게는 애당초 없는 것이고 관청에
서는 필요성도 애착도 없고하니 이런 저런 무관심에 밀리고 채이면
서, 장마와 눈녹은 물의 위력에 시달리어 현대판의 천지개벽 상태로
방치될 수 밖에 없다. 잡초마저 우거질대로 우거져 있는 데다가 몇
군데에는 어린 잡목들, 오리나무와 싸리 떡깔나무 자작나무들이 무
더기 무더기로 제법 숲을이루며 자라고 있는 곳도 몇 군데 있다. 여
기석의 동기들이 통학하는 데에 정히 지장이 있겠다고 짐작이 되는
곳은 그들의 아버지가 조금씩 손질을 한 곳은 있다.
별빛에 의지하여 간신히 더듬어 가는 길이라 힘이 더 든다. 고산지
대의 밤길이라면 웨만한 더위는 기세가 많이 수그러졌을 법도한데,
바람한점 없이, 8월로 접어드는 초순의 밤이라서인지 더위는 여전히
끈질기게 기승을 부린다. 더위를 타고 찾아왔는지 개똥벌레가 몇 마
리씩 어울려 연약한 불빛을 깜박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이 이따금씩
보인다. 집에서라면 두 손을 우묵하게 우그리어 퍽퍽소리가 나게 두
드리며 입으로도 뻑뻑 소리를 내며 반딧불이를 따라다니면 한 두 마
리는 잡는다. 그 것의 꼬리의 발광부분을 동생들에게 보여주며 가장
잘 아는 체하였던 기억을 더듬으며 여기석은 빙그레 웃는다. 그러나

지금은 발자국소리 마져도 죽여가면서 걷는 처지니 반딧불이를 잡기
위해 손벽을 친다든가 입으로 뻑뻑소리를 낸다든가의 생각은 감히
가질 수가 없다.
여기석의 얼굴과 등허리에는 계속해서 땀이 줄줄 흐른다. 부지런히
걷는 발걸음이 오르막에 접어들은지도 한참동이 지나가니 흐르는 땀
이 주체궂을 지경이다. 여기석은 무명 양등거리를 벗어 허리춤에 질
러차면서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이제는 두번째 오르막의 고비
를 넘기고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부터는 부드럽게
왼쪽 방향으로 휘어져 한참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뻗혀 있는 길목이
라는 것을 잘 안다. 작년 장마때에 노면이 많이 패였던 곳인 데다가
지난장마에 또 여러군데가 잘리고 더 패여 나갔다. 여기석은 여전히
노면에 신경을 쓰면서 잡초와 잡목을 피하고 제치며 조심스럽게 더
듬어 걷는다.
“………?”
여기석은 자지러지게 놀랐다, 불빛이 보인 것이다. 뜻밖의 장소에
서 뜻밖의 불빛이 보이는 것이다. 외가에서 떠나올때의 시간이 열 한
시 조금 넘어서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아무래도 한 시간
반은 더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볼때 지금은 분명히 자정이 넘었을
시간인 데, 이 후미진 산속에 어쩐 불빛일까, 여기석이 이 길을 한밤
중에 다녀 본 경험은 없다. 학교에서 방과후 장난꾸러기들과 어울려
놀이에 열중하다가 그만 해를 놓치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너무 늦었
을 경우에는 외삼촌네 집에가서 목물을 하고 자는 경우가 가끔 있었
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해가 꼴깍 넘어간 땅거미 무렵에 이 길을 달
리다시피 하여 집으로 간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랬었건만도 이 길을
달리는 도중에 누구를 만났다든가 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낮에
도 그랬다. 등교길이든 하교길이든 오로지 여기석의 동기간들 끼리

만이 어울려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일년에 몇 차례정도 등교
길에 이웃 골짜기의 아저씨들 중의 한 두분과 함께 걸어본 기회가 있
을 정도다. 그 것도 무산에 장이 서는 날에만 겪었던 일이었고 하교
길엔 그나마의 동행도 전연 없었다. 여기석의 동기들이 날마다 등 하
교하는 시각은 대부분 밝은 낮이든가 때로는 침침한 새벽녘 아니면
땅거미질 저녁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이리저리 길을 골라 밟느라고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처지였는데, 이렇듯 깊은 밤에 이렇듯 깊은 산
골길에 들어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연 뜻밖이며, 그래서 있기 어려
운 수상쩍은 일이라고 여기석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우선 허리
를 구부리며 불빛의 정체를 살피기로 하였다. 도깨비불일는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다. 도깨비불! 도깨비불! 말은 많이 들었다. 그 정체는
수수빗자루에 쇠피를 발라 밖에 내버려두면 그게 도깨비가 되고 그
도깨비가 들고 다니는 빗자루가 도깨비불로 변한다고 들었다. 그런
데 이 무산땅에서는 수수를 심는 사람이 별로 없다. 두만강 건너 만
주에서는 많이 심는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태어난 도깨비가 건너온
것인가? 도깨비불은 파아랗다고 들었는 데 지금 보이는 것은 희다.
어떻게 보면 희다기보다는 약간 누르무레하다. 여기석의 가슴은 걷
잡기 힘들 정도로 불안하게 두근 거린다. 도깨비는 사람을 홀린다던
데 어떻게 홀리는 것일까. 도대체 홀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홀린사람
은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사람으로서의 혼은 쑥 빠지고 도깨비가
시키는대로만 행동을 하는 것이라던가? 인간으로서의 아무런 분별
능력이 없이 산이고 강이고 도깨비에게 이끌려 다니다가 기진맥진하
여 쓰러져 죽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러니까 도깨비에게 홀리기만 하
면 일단은 불행한 것이고 심하면 죽는 것이다. 무섭다. 그런데……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도깨비불이 아닌 것 같다.
“…………!”

그렇다. 도깨비불이 아니고 손전등불빛이다. 손전등은 하나고, 그
리고…… 사람은 둘이다. 자전거도 보인다. 두대다. 자전거를 고치는
모양이다. 손전등을 들고 서서 불빛을 비쳐 주는 사람이 있고, 앉아
서 그 불빛을 받아 자전거를 손질하는 사람이 있다. 우선 도깨비불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감을 느꼈다.
“…………!”
순간 여기석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