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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1998년 [소설-김성숙]꽃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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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4,778회 작성일 05-03-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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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수가 또 다급하게 나를 부르고 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나의 병실임이 분명했다. 잠깐
동안 낮잠 속에 빠졌었나보다. 눈을 뜨고도 나는 꽤 오랫동안 또다시
들려올 그애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잠든 사이 누군가가 다녀간 건 아니었을까? 누운 채 방 안을
휘둘러 보았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아무곳에도 없었다.
그사이 비가 그쳤는가, 커튼 사이로 햇빛이 병실 깊숙이 쏟아져 들
어오고 있었다. 참으로 여러 날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햇빛은 누운
내 몸을 밟고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거의 저녁때가 된 모양이
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다. 벽에 기
대앉았다. 여러 날을 두고 쏟아지던 폭우 끝에 찾아든 탓인가, 햇빛
은 몹시 눈을 부시게 했지만 그러나 고개를 돌려 피할 수 없을 만치
두통이 심했다. 나는 이마 위에서 신열처럼 끓고 있는 햇빛을 피해
간신히 엉덩이를 들썩이며 조금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마치 두
통의 원인이 땀에 범벅이 되어 함부로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에
있는 양, 자꾸만 손으로 쓸어넘겼다.
손끝에 만져지는 얼굴은 몹시 부석부석했다. 눈두덩 또한 더욱 두껍
게 부어올라 두 눈을 덮을 듯 내려와 있을 것이다. 여러 날을 두고 불
면에 시달린 탓임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방금 꿈속에 혜수를

붙잡고 얼마나 내가 엉엉 소리내어 울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애의 목소리는 여전히 뭉글뭉글한 질감으로 귓전에 남아
있었다.
「혜수야 어딨니?」
나는 두 손을 내밀며 보이지 않는 그애를 붙잡으려는 헛된 노력을 기
울였다. 외로움 끝에 선 아이처럼 목소리 끝에 울음기가 섞여 나왔다.
「혜수야 나의 이 모습이 보이지 않니? 아직도 나의 형벌은 끝나지
않은 거니? 이젠 제발 나를 놓아주렴.」
나는 방금 꿈속에서 살의를 품고 와 닿던 그애의 날카로운 증오와
적의를 위무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잔뜩 겁에 질린 나의 목소리만 쓸
쓸히 방 안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혜수는 아직도 나에게서 멀리 있는가. 다가설수록 손이 닿지 않는
이 방의 세계로 자꾸만 뒷걸음질치고 있는가.
혜수가 가고 나는 얼마나 숱한 밤, 특히 요즘처럼 천둥치고 번개치
며 비가 쏟아지는 밤이면, 그애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추
방당했었던가. 언제까지나 나는 그애의 끈질긴 증오와 모멸감을 가
슴에 안고, 목구멍이 막히는 듯한 공포와 피해의식 속에 시달려야 할
것인가.
문득 맞은편 벽의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가시관을 쓴 사내는 오늘
도 묵묵히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구원의 하느님이라고 하였던가?
‘주여, 제 마음에 평화를, 제 마음에 평화를 주옵소서.’
알지 못하는 사이 테레사 수녀가 가르쳐준 기도문이 입속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나 구원의 신은 내게 눈길조차 주는 법 없이 기 도소리
만 벽면에 부딪쳐 위윙 우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 이 무슨 어이없
는 희화란 말인가. 인애는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돌아올 때가 되었

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빗속을 뚫고 이틀 전에 당도한 인애의 편지는
이제 토씨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억할 수 있다.
— 영순아, 이젠 그만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니? 네가 그렇게 자학
에 빠져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있는 게 벌써 얼마 동안이니? 세상
은 지금 엄청나게 달라져가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눈치들만 살피던 대기업에선 물론, 중소기업에서도 하다못해 몇명의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도 속속 노조가 합법적으로 결성되고
있으니…… 진종일 바람 한점 통하지 않던 우리들의 작업장도 개선
되어, 바라보면 매연으로 가득한 하늘이나마 구경할 수 있지. 월급도
잔업수당도 30프로나 올랐단다. 잔업때엔 간식으로 우우와 빵까지도
나오고, 어떤 땐 야식으로 설렁탕까지 배달시킨단다. 아이들은 좋아
서 히히덕거리며 립스틱도 사고, 티셔츠도 사고, 극장 구경도 가고,
떡볶이도 사먹지만 이것이 혜수가 꿈꾸던 세상일까? 어젠 명자가 갑
자기 눈이 안 보여 우리들이 대학병원에 데리고 갔었는데, 너무 똑같
은 사물만 계속 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더
구나. 명자는 단박 1주일 동안 병가를 내었단다. 물론 휴가비와 치료
비는 회사에서 지불이 되지.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고 죽은 명혜언
니가 많이 생각났다. 그때에 비하면 너무너무 좋아진 세상이지 않
니? 그렇지만 난 왜 쓸쓸한지 모르겠구나. 지금처럼 혜수가 그리울
때가 없다. 혜수가 있다면 분명히 들떠 있는 아이들한테 뭐라고 한마
디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드는구나. 영순아, 이젠 제발 그만 자
학하고 돌아오려무나. 혜수도 그걸 바라지 않겠니? 사실 나는 기운
이 빠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고, 회사도 그만두고 싶단다. 네가
돌아오면 힘이 날 텐데……
인애는 또 말했다.
— 죄의식? 자책감? 이젠 제발 그따위 그만 하자. 누가 누구를 비

난할 수 있다는 거니? 죄인이라면 우리 모두가 죄인일 것이다. 무슨
득이 된단 말이니? 그건 네 자신을 파괴할 뿐더러 혜수의 죽음을 욕
되게 하는 일임을 똑똑히 알아두렴. 혹시 너는 앞으로 해야 할 몫이
너무 무거워 혼자만 죄인인 양 위장하며 도피하고 있는 건 아닐 테
지?
인애의 마지막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와 꽂혔다. 행여
나는 인애의 말처럼 내가 해야 할 몫이 너무 무거워 짐짓 죄인인 양
과장하며 비명지르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지새우던 불
면의 밤들, 밤마다 베개맡을 떠나지 않던 혜수의 비명소리, 보호의에
묶인 채 풍뎅이처럼 헐떡거리던 자신의 꼬락서니…… 그런 몸서리쳐
지는 어두운 시간들을 과연 과장하며 엄살부린 것으로 간단하게 치
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세차게 도리질을 했
다. 그날이 또다시 말갛게 되살아났다.
그날, 혜수는 해 질 무렵 나의 자취방을 찾아와서 느닷없이 삼청공
원에 가자고 유혹했다. 한 달에 두 번 찾아오는 휴일이었다. 모처럼
의 휴일을 오전엔 목욕과 밀린 빨래로, 오후엔 방바닥에 뒹굴면서 입
속의 사탕을 아끼듯이, 남아 있는 시간을 아쉬움 속에 야금야금 핥아
먹던 나는 좋아라고 따라나섰다.
막 지는 햇빛 아래, 개집처럼 낮은 무허가 판잣집들이 더욱 불결하
고 질서없이 드러났다. 보도 블럭이 군데군데 깨져 있는 좁은 골목
길, 함부로 뛰어노는 꾀죄죄한 아이들, 담 너머 들려오는 여자들의
욕지거리, 너덜너덜 해어진 벽보판의 낙서들, 곳곳에 넘칠 듯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길 한복판까지 나뒹구는, 그래서 발길에 발길에 툭
툭 채이는 연탄재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날마다 거기 있었을 풍경들이건만, 나는 왈칵

비애를 느꼈다. 서울에서의 10년째를 여전히 형편없이 지저분한 산
동네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서글픔 때문이었다.
10년 전, 20리 길을 멀다 않고 몇번이나 호박을 읍에 내다팔아 새
옷을 사입히며 어머니는 신이 나서 말하지 않았던가.
「호랑이 새끼는 산으로 보내고, 사람의 새끼는 넓은 대처로 보내라
는 말이 있다. 지금은 네 외삼촌이 양장점의 시다로 널 소개시킨다고
하지만, 거기서 너도 옥자년처럼 귀인 만나지 말란 법 어딨니. 양정
잠엔 부잣집 사모님들이 줄을 잇는다고 하더라. 허기사 부잣집 사모
님 눈에 못 든다 하더라도, 기술 배워 어엿한 양장점 주인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여자도 한 가지 기술은 익혀놔야 하는 세상이다. 아니할
말로 데데한 남편 만난다 해도 내 기술 있으니 훌훌 털어버리고 새출
발 할 수도 있잖겠니. 에미야 어두운 세상에 태어난 죄로 농사꾼 네
아범 만나, 그 그늘 벗어날 염도 먹어보지 못하고 한평생 요 모양 요
꼴로 살았다만…… 추석에 온 옥자년 너도 봤지? 서울물이 좋긴 좋
더라. 얼굴이 달덩이같이 훤해지지 않았디? 누가 국민학교만 나온,
술주정뱅이 홀애비 딸년이라고 하겠니. 처음엔 어느 회사 사장네 집
에 식모로 들어갔나보더라만, 애가 심성이 곱고 얼굴도 반반하니까
사장이 예쁘게 보고 회사에 데려다가 비서일을 시킨다지 뭐냐. 머잖
아 제 동생들도 불러올릴 모양이더라. 기술을 가르친다나. 남은 국민
학교만 나왔건만…… 에미가 허리 휘게 들일해서 중학교까지 가르쳐
놓은 건, 다 맏이 덕 좀 볼까 하구서였다. 심청이처럼 부모 위해 목숨
팔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더도 말고 옥자년처럼 네 동생들 서울
불러올려다가 공부나 가르쳐라.」
나는 새된 어머니의 목소리를 짐짓 외면하며 대신 그닥 신기할 것도
없는 골목 풍경에 열중한 체하면서,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가는 혜수
의 뒤를 맥살빠지게 따라갔다.

내가 혜수의 음모를 눈치챈 건, 이미 공원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인
애들을 만나고나서였다.
「너도 알지? 1반 반장, 여긴 2반 반장, 3반 반장…… 7반 반장……」
차례차례 돌아가며 그들은 악수로써 나를 환영했다.
「이제 8반 반장인 영순이까지 다 한자리에 모였어. 우린 모두 각 반
의 반장들이야. 먼저 온 사람들은 인애에게서 대충 들어 알고 있겠지
만, 우린 명혜언니를 위해 모였어. 모두들 잘 알겠지만 명혜언니는
과로로 쓰러져 벌써 두 달째 집에 누워 있어. 병원에선 악성빈혈이라
고 하는데, 치료를 받지못하면 위험하다고 해. 사장은 치료비를 보태
주기는 커녕 겨우 지난달 월급만 주었을 뿐이야. 이달부턴 월급도 줄
수 없다고 나자빠지니 어떡하면 좋으니? 명혜언니가 누구니? 사장이
청계천에서 천막 치고 미싱 두 대 놓고 자업복 수리점 할 때부터 몸
을 아끼지 않고 함께 일한 사이 아니니. 그런 언니를 나몰라라 나자
빠지다니, 그게 어디 인간이냐. 밤잠 안 자고 라면으로 저녁 때우며
돈 벌어주었을 땐 좋았겠지. 이건 명혜언니 개인에 관한 문제가 절대
로 아니야. 우리들도 어느 날 쓰러지면 아무 보상도 없이 이렇게 헌
신짝처럼 내동댕이쳐진다는 얘기야. 그래서 이번 기회에 피 흘리는
한이 있어도 보호받을 수 있게. 제도적인 장치를 하자는 거지.」
「어떻게? 무슨 수로?」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우리는 내일 출근하자마자 일제히 미싱에서 손을 떼는 거야. 그리
고 반원들을 옥상에 모이게 하는 거야. 그때 내가 자세히 취지를 설
명하겠어. 너희들이 구호를 외치는 동안 인애와 내가 사장을 만나 몇
가지 요구사항을 놓고 협상을 벌이겠어.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아무도 미싱에 손을 대서는 안 돼.」
「그럼 작업을 중지하자는 얘기니?」

누군가가 놀라서 물었다.
「물론이지.」
「그렇지만 쿠웨이트에서 주문한 ㅇㅇ건설 노무자들 작업복을 이달
말까지 납품시켜야 한다던데.」
「그러니까 오히려 잘된 거지. 사장이 얼마나 후끈 등이 달겠어. 중
동 쪽 시장을 개척하느라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만데…… 납품기일을
못 지켜봐. 국제적인 체면과 신용은 물론이고, 우리 정부 당국에도
찍힐 거 아니겠어? 손해는 또 얼마나 엄청나겠어. 그 약점을 우리가
이용하자는 거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흙빛이 된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맞아, 맞아. 우린 명혜언니를 위해서도 힘을 합쳐 싸워야 해.」
아이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빛바랜 입술로 손에 토시를 끼고, 실밥투성인 채 진종일 형광등 밑
에서 미싱의 페달이나 밟던 그들이 전연 아니었다. 해질녘의 공원의
풍경을, 막 물들기 시작한 은행잎과 단풍잎을 오랜만에 구경하자던
나의 한가한 감상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도망질쳤다.
「여기 내일 우리들이 회사에 요구할 사항들이야. 영순이 네가 한번
읽어줄래?」
마치 숨겨놓은 보물을 자랑하듯 인애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기운
차게 나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댔다. 그러나 나는 왠지 손을 내미는
대신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인애
가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첫째,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작업장을 햇빛과 공기가 통하는 곳으
로 개선하라.
둘째,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늘어나는 작업량만큼 미싱사의 수를
늘려라. 따라서 주 48시간의 노동시간을 엄수하라.

셋째, 월급은 30프로, 잔업수당은 50프로 각각 인상하라. 잔업때의
간식도 충분한 영양식으로 지급하라.
넷째, 1달에 두 번뿐인 휴일을 국가가 정한 공휴일마다 휴일로 하라.
다섯째, 과로로 쓰러진 김명혜가 다시 회사에 출근할 때까지 월급
을 지불하라. 아울러 치료비도 지불하라.
싸움꾼같이 의기양양하게 읽어내려가던 인애가 이윽고 읽기를 끝
내자, 혜수가 슬픈 눈이 되어 말했다.
「모두들 두려운 마음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무엇이 두렵다는 거
니? 이렇게 돼지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사이 없이 매일매일을 보내
야 하겠니? 우리는 사람이야. 생각이라는 것도 해보고, 다가올 내일
에 대해 꿈도 가져야 하잖겠니. 재단사가 되겠다든가, 디자이너가 되
겠다든가, 대학엘 가겠다든가 하는 꿈 말이야. 시골에서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올 날을 목을 늘어뜨리고 기다리고 있을 우리들의 동생들
을 한번 생각해봐. 물론 일이 잘못돼서 다치는 누군가가 생길지도 모
르지. 그렇지만 누군가가 피 흘릴 게 두려워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가올 숱한 내일을 지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야. 내일을 꿈꾸
면서 살아야 해. 위생이 뭔지, 문화가 뭔지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일요일이면 우리도 기차를 타고 교외로 살아 있는 것을 만나러 갈 수
있어야 해. 강의노트를 끼고 원하는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할 수 있어
야 하고, 음악도 미술도 감상할 수 있어야 해. 탁구도 칠 수 있어야
하고, 연극도 오페라도 구경갈 수 있어야 해. 그러자면 당연히 누군
가가 피 흘려야 하잖겠니.」
혜수의 목이 메는가 싶자 모두들 숙연해졌다. 갑자기 혜수의 목소
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우리를 보고 뭐라고 부르고 있니? 공순이, 공순이라고 부르지 않
니?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우리가

만든 티셔츠를 입고, 우리가 만든 신발을 신고, 핸드백을 들고 립스
틱을 바르고 다니면서, 또한 우리가 만든 라면과 소시지를 맛있다고
먹으면서, 깔보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대명사로 공순이라고 서슴없이
비아냥거리다니…… 우리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래서 사람
답게 생각을 하고 교외에도 나가고 공부를 한다면 그때도 우리를 보
고 공순이라고 비아냥거릴까? 노조를 만들어야 해. 힘이 없는 자들
은 뭉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권리를 찾아야 해.」
혜수의 목소리엔 생활의 흐름을 바꾸고자 소망하는 절심함으로 가
득했다. 그러자 나의 내부에서도 소리 하나가 분명하게 고개를 쳐들
었다. 혜수에게서 전이된 열기 탓이었을까.
‘네 꼬락서니를 한번 똑똑히 내려다보렴. 평생을 두더지처럼 흙만
팔 줄 알고 사는 네 어머니 인생과 무엇이 다른 거니? 그렇게 인생을
마감할 거니?’
그 소리는 퇴근을 서두르며 양손의 토시를 벗을 때, 몸의 실밥을 뜯
을 때, 화장실 거울 속에서 우는 듯한 얼굴 하나와 마주쳤을 때, 늦은
귀가길에 자꾸만 땅 밑으로 주저앉는 몸뚱이를 추스르며 산동네를
향할 때 문득, 문득 내가 들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열기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래 우리 모두 뭉쳐서 싸워야 해. 흥, 뭐라더라…… 여러분
은 발전하는 국가와 세계를 위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따라서, 사회
의 주역으로 미래의 운명을 짊어질 역군이니 자부심을 가지십시
오…… 사회의 주역, 좋아하시네. 사회의 주역을 그래 겨우 이따위로
대접하는 거야? 우리 그런 작자 눈곱만치도 생각해주지 말자구. 걸
핏하면 세금 때문에 못해먹겠다, 인건비로 다 나간다 엄살하면서도
누가 모를 줄 알고…… 해마다 늘어나는 건 빌딩이고 땅이라더라. 우
리가 다리 퉁퉁 부어서 벌어주는 돈 아니니? 그런 돈으로 영계하고

놀아나고, 골프 치고 스키 타고 룸살롱에 가고… 당연히 우리에게도
정당하게 분배가 되어야 해. 사실 명혜언니를 그렇게 외면만 하지 않
았어도 중동에서 주문한 작업복은 끝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개자식
사정 눈곱만큼도 봐줄 필요 없다구……」
아이들이 갑작스런 나의 돌변함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어느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어느 틈에……
나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피잉 현기증이 일었다. 벽을 짚으며 창가로 다
가섰다. 창에는 여전히 네 개의 둔중한 창살이 버티어 있다. 창살만큼
나를 정신병동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또 있을까.
병원 뜨락을 내려다보았다. 인부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창
삽질로 분주했다. 그러고보니 머잖아 꽃 피울 화초들이 온통 뿌리가
뽑히고 줄기가 부러진 채 흙더미 속에 깔려 있다. 무성하던 장미나무
들도 더러더러 밑둥이 쓰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지독한 폭우
였다.
인부들은 잽싸게 손을 놀려 쓰러진 꽃나무의 뿌리를 일으켜 세우며
흙을 털어내는가 하면, 꺾여진 가지와 이파리들을 가차없이 낫으로
쳐내기도 했다. 하긴 부러진 것을 그대로 두었자 말라죽을 건 뻔한
이치이고, 또한 연한 곁가지여서 꽃을 본대도 그닥 신통할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방금 낫으로 쳐낸 자리에 생진이 맺히는 것이
언짢게 떠올랐다.
창문을 마저 활짝 열었다. 나는 바짝 창살에 매달렸다.
여러 날을 두고 퍼붓던 비가 말끔히 갠 탓일까, 목욕 후처럼 사물은
투명했다. 공기마저 하도 투명하여, 하늘을 향해 뿜어져 올라가는 공
기의 입자들마저 아른아른 보일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둔중한 네 개의 창살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
린다. 그리고 어느새 신발끈을 조여매고 아직도 사납게 물살이 일렁

이는 개천의 좁은 다리를 지나 세상 밖으로 달려나간다.
화단가를 돌아 수녀 두 사람이 바삐 지나갔다. 카톨릭 교회에서 운
영하는 이 병원에선 날마다 대하는 모습들이었다. 수도복의 허리에
길게 늘어뜨린 로사리오 십자가가 햇빛에 반짝 빛났다. 빛나는 십자
가는 살아 있음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둔중한 창살마저도 햇살에 부
딪쳐 반짝 금속성 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한때 나는 살아 있는 것, 생
명있는 물체에 대한 반감으로 침대 모서리에서 테레사 수녀의 깨끗
한 손을 발견할 때면, 사납게 그녀의 손등을 물어뜯고 싶었었지.
시선을 좀더 먼 곳으로 보냈다. 개천을 사이로 마주보이는 도심지가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내가 두고 온 곳일까? 그런데 왜 이리 꼭 이
야기 속에 나오는 세상, 알지 못할 세상으로 아득하게 보일까.
영영 이대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화살처럼 지나갔
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왈칵 몰려들었다.
다시 헤매는 눈길 속에 택시 한 대가 뛰어들었다. 택시는 급커브를
돌아 개천 위의 좁은 다리를 익숙하게 건너온다. 이 며칠 동안엔 영
업용 택시도, 승용차도, 이 병원의 앰뷸런스조차도 폭우에 발길이 멎
었었다.
병원의 정문을 들어선 택시가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기다리고 있
었던 듯 현관 안에서 남자 간호사 둘이 쏜살같이 달려나왔다. 뒷문이
열리고 늙수그레한 여인 둘과 단발머리 소녀가 차례로 내렸다. 남자
간호사들이 각각 양쪽에서 소녀의 어깨를 깍지끼었다. 잔뜩 두려움
으로 일그러진 소녀가 순간 몹시 뒷걸음질치려 해보였던 건 나의 환
시였을까. 늙수그레한 여인 중 하나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
을 터뜨렸다. 다른 쪽도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는 기색이었다. 그들
은 곧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이 병원에 도착하던 날의 풍경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새삼스러운 풍경도 아닐 텐데 호미질을 하고

있던 인부들이 힐금힐금 곁눈질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은밀하게 속삭
이고 있을 것이다.
시상에 아직 시집도 안 간 어린 처자인디 쯔쯧…… 어느 못된 놈이
애라도 배게 하고 도망질쳤는가베. 요즘 시상에 그런 일로 미치는 처
녀 봤는가? 그럼 뭣 땜시…… 누가 아능가, 그 사정을……
— 영순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에미가 잘못했다. 서울로
보낸 에미 잘못이다. 그저 흙 안 묻히고 깨끗하게 살아보라구 한 짓
이었는데…… 누가 널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제발 정신 좀 차리
려무나. 보이긴 뭐가 보인다고 이러느냐, 그애가 그렇게 된 건 저 좋
아 택한 길 아니었냐. 아이구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 서울 좋아하다
딸년 신세만 망쳐놓았으니…… 1년 내내 흙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려
도 추수해봤자 농협에서 꿔다 쓴 비료값이며 농약값은 그대로 자빠
져 있고, 빚진 죄인이라 농협에서 나온 직원 그림자만 봐도 가슴이
덜컥덜컥, 그저 그런 에미 신세보담은 나으려니 했지. 그런데 이 꼴
이 대체 웬 말이란 말이냐?
어머니는 줄곧 택시 속에서도 나의 팔을 움켜쥐고 흐느꼈었다.
혜수의 망령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몇줌의 재
로 변해버린 혜수의 육신을 어이없이 그애 고향의 강물에 띄워보내
고 돌아온 후,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고 기억된다
아침부터 몹시 비가 쏟아졌었다. 천둥과 번개와 바람마저 동반한
지독한 폭우였었다. 심한 자책감에 빠져 흐르는 시간은 물론, 잠잘것
도 먹을 것도 잊은 채, 나는 그저 멀거니 앉아 사흘째를 보내고 있었
다. 머리는 텅 비고 몸속의 피는 다 말라버린 듯 허허했다. 누군가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그 자리에 폭삭 재가 되어 삭아내릴 것 같았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설핏 잠이 든 것은. 문득 유리창 밖에서 숨이 넘
어갈 듯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혜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창 밖은 어둠으로 깊었고 창틀을
때리는 빗줄기는 더욱 사나웠다. 그 속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피로 범벅인 혜수가 마구 피묻은 손으로 유리창을 긁어대고 있었다.
「영순아, 영순아, 나 좀 들어가게 해줘. 영순아…….」
나는 너무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혜수는 죽었는데, 혜
수는 분명히 12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우리들은 눈물 속
에서 화장한 혜수를 강물로 띄워보냈는데…….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어지럼증과 혼미 속에 빠져들었다. 창 밖에선
혜수가 피묻은 손으로 금방이라도 창문을 열어젖힐 듯 유리창을 긁
어 대고 있었다.
인애의 말은 거짓말이었나? 혜수는 평온 속에 죽어갔을 거라고 말
했었는데…….
‘똑똑히 들어둬. 우리가, 우리 모두가 혜수를 죽인 거야. 우리들의
비겁함이 혜수를 죽게 한 것이라구. 알량한 밥줄이 떨어찔까봐 너희
들이 우왕좌왕하지만 않았던들, 약속대로 굳게 밀고만 나갔던들 혜
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았을 거야. 지금쯤 우리들은 승리의 노
래를 부르고 있을 테지. 그런데 이게 뭐야? 어떻게 얼굴을 들고 태연
하게 살아간단 말이니. 엉엉……. 별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테지? 아
주 평온해 보였어. 얼굴은 터지고 부풀어올라 전연 혜수 같지 않았지
만 그러나 고통스러워 뵈진 않았어. 하긴 떨어지는 순간 육체의 모든
기능은 이미 일시에 정지됐을 테니 고통 따윈 느낄 겨를도 없었을 테
지. 그렇지? 왜 말들이 없니? 모두 벙어리가 된 거냐? 엉엉……’
용서해줘. 혜수야. 용서해줘…….
나는 창유리를 문질러대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옆방에서 잠자던
아이들이 놀라서 속옷바람으로 달려왔다.
그 후부터 나는 걸핏하면 목이 부러져 대롱대롱하는 혜수의 망령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그런 혜수의 끔찍스런 몰골에 벌벌 떨며 이불
속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어느 날은 피투성인 채 독기 서린 저주를
퍼붓는 혜수와 방 안의 집기들을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며 필사
적으로 대적하기도 했다. 영세민들을 위한 자선병원이기도 한 이 병
원의 정신병동에 와서도 나는 얼마 동안 끈질기게 나타나는 혜수의
망령과 부딪쳤다. 그런 날이면 여지없이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이 쿵
쾅쿵쾅 복도를 울리며 달려왔고, 곧 나의 몸은 침대 위에 꽁꽁 결박
당해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맑은 눈이 되어 바라볼 때면, 부패되어가
는 한 점의 고깃덩이를 바라볼 때의 참담함으로 나의 팔뚝에는 자디
잔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내가 왜 아직도 그 기억 속에 갇혀 있는가.
그건 단지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일 뿐인데……. 흑판에 가득 쓰인 글
씨를 지우개로 쓰윽 지우고 탁탁 털어버리면 다시 말짱해지듯, 그렇
게 머릿속의 기억쯤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지. 아주 간단한 일이야.
선반 위에 내려앉은 먼지의 켜를 후욱 불어버릴 때처럼 그렇게 아무
런 감동 없이 불어서 날려보내면 그만인 일이야. 그런데 내가 왜 아
직도 그 기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햇살은 이제 뜨겁게 콧등에 괴어들어 있다. 마치 날카롭게 파고들
어 우리를 얼어붙게 하던 그날의 혜수의 눈빛과도 같다. 나는 혜수의
눈길을 피하듯 손을 들어 괴어드는 햇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햇
살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병원 뜨락엔 수녀들도, 여자를 싣고 왔던 택시도 떠나고 없었다. 인
부들만이 아직 땀을 뻘뻘 흘리며 꽃나무의 뿌리를 일으켜 세우고 있
었다. 머잖아 인부들도, 콧등에 뜨겁게 괴어드는 햇살마저도 흔적없
이 떠나고 말 것이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뜨락엔 적막만이 내려앉을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또 애써 적막 뒤에 숨어 나직하게 끓어오
르는 소리 하나를 가려내려 할 테지.

‘이 고통을 견뎌나가는 것만으로도 너는 네 몫을 충분히 치르고 있
는 것이야.’
테레사 수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 같기
도 하고, 스스로를 위무하고자 수없이 되뇌었던 자신의 목소리 같기
도 한……. 그러나 나는 별반 위안을 받지 못할 것이다. 허청허청 귓
전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매양 암울하고 음흉한 목소리로 검게 솟
아 울랐기 때문이었다.
나의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혜수의 뵐 듯 말 듯한 웃음기
가 느껴져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찾아들
었다.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아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짙은 반
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용기를 내어 웃음기를 머금고 혜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넌 나를 조롱하고 있구나,
비웃고 있구나.
그애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을 테지. 그애의 어깨를 안고, 네 말대로
우리 높은 곳으로 향하자, 그래서 우리도 사람답게 노래를 부르자꾸
나 하며 내가 지껄여주기를…….
몇겹의 견고한 포장을 끄르고 그 속의 내용물을 손끝에 집어올리
듯,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숨어서 끈끈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애의
죽음을 뒤진다.
우리는 예정대로 옥상으로 향했었다. 짐짓 태연함으로 가장하고 있
었지만 모두의 등에선 불안이 차갑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막 작업실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불현듯 목구멍 안쪽이 뻑뻑하게
막혀왔다. 막연했던 불안감이 좀더 확실한 공포와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와 한꺼번에 목구멍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만 문을 밀
고 그들의 뒤를 따라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영순아 뭘 하니? 모두들 기다리는데.」
나의 기대가, 아직 달아날 수 있을 것이라던 모든 행위가 일시에 차
단되어버렸다. 나는 마치 어두운 수풀 속으로, 수풀 속으로 유인돼
가듯 간신히 가파른 계단을 마지막 밟고 옥상에 올라섰다.
─임금을 인상하라, 복지기금을 신설하라.
─김명혜 동지의 월급과 치료비를 지급하라.
구호가 담긴 아이들의 어깨띠가 바람에 펄럭였다. 또 한차례 나의
눈이 아뜩해왔다. 혜수의 손에는 핸드마이크까지 들려 있었다.
우리들이 공원에서 채택했던 결의문을 혜수가 막 낭송하고 났을 때였
다. 느닷없이 하나의 풍경이 나의 눈길 속에 뛰어들었다. 맞은 편 제화
공장으로 경찰 10여 명이 곤봉을 휘두르며 몰려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경찰이다,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래져 어디야, 어디, 하며 옥상 끝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곧 제화공장 아이들이 멱살을 잡히고 머리채를 끄들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제화공장에도 파업이 일어났나봐,」
누군가가 간신히 말했다.
경찰들은 눈을 부라리며 곤봉으로 아이들의 어깨를 내리치는가 하면,
배와 가슴을 함부로 쥐어지르며 대기하고 있던 닭장차로 몰고 갔다.
‘다음엔 우리 차례다. 이건 무모한 싸움일 뿐이야. 달아나자, 달아
나야 해.’
예기치 않았던 배반의 소리가 느닷없이 격렬하게 충돌질했다.
‘두려워하지 말자, 비겁해지면 안 돼.’
입술을 사려물고 나는 자꾸만 타일렀다. 그러나 나의 타이름은 이미
열화같이 번지기 시작한 내 안의 배반을 다스리기엔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 드디어 나는 비틀비틀 뒷걸음질쳤다. 혜수가 앞을 가로막으
며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안 돼 영순아, 흔들리면 안 돼. 다 죽는 일이야.」
「이건 무모한 싸움일 뿐이야, 틀렸어. 난 내려갈 테야.」
나는 징징 울며 헛소리하듯 되풀이 말했다. 그리고 무슨 악력에 떠
밀리듯 혜수를 사납게 밀어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이들 몇이
따라나섰다.
정신없이 서너 개의 층계를 한꺼번에 곤두박질하듯 뛰어내리기 시
작했을 때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날아와 칼처럼 깊숙이 나
의 등판에 꽂혔다.
「혜수가 떨어졌다. 혜수가 뛰어내렸다.」
─이로 인하여 너희들은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대저 여호와
의 맹렬한 분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창틀에 빰을 댔다. 사위어가는 햇살과는 달리 창틀은 뜨겁게 달아
있다. 그렇건만 나는 한기가 느껴져 그만 흑흑 흐느껴울고 싶어졌다.
아직 내가 어렸을때, 꿈과 희망으로 빛나던 내일, 내일들에 겨우 이
런 모습으로 당도해 있다니…….
눈물이 괴었다. 눈물은 이제 볼을 타고 축축히 흘러내렸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헐렁한 환자복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으며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다.
테레사 수녀가 활짝 웃으며 들어섰다. 남자처럼 귀밑까지 커트한
머리에, 여전히 물바랜 검정색 몽당치마를 껑충하게 입고 있다. 수녀
의 상징인 십자가 목걸이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녀에게서 특별한
세계에 속해 있는 수녀라는 느낌도, 권위있는 정신과 박사라는 느낌
도 받지 못한다. 그녀가 파놓은 함정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봄날이었던가. 뜰에서 옆 병실의 여자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검정치마를 껑충하게 입고 겅중겅중 옆 병동으로 뛰어가는 테
레사 수녀를 보았었다. 품위라곤 찾아볼 데 없는 그녀의 옷차림을 향
해, 왜 수녀가 수도복을 안 입을까요? 하고 나는 비난조로 말했었다.
「그것도 모르세요? 수도복이라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하고 성스
러워 뵈긴 하지만 우리같이 위안을 받고 싶은 정신질환자들에겐 다
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리감과 이질감만 불러일으킬 거
예요. 특별한 경우엔 수도복을 안 입어도 된다는 조항이 수녀원 규칙
에 있대요.」
그 여자는 신이 나서 말했었다.
「기분이 좀 어때요? 회진은 아니고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그녀는 불쑥 장미꽃 한 송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기쁜 소식이라
니……. 나는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예쁘죠? 비바람에 가엾게도 온통 쓰러졌더군요. 꽃이 피기까지도
꽤 시련이 심하지요? 그렇지만 참 다행이예요. 뿌리까지 상하게 하
진 못했으니……. 꽃을 피우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을 거예요. 오
히려 잘려진 자리에서 훨씬 더 무성하게 새순이 나올 테죠. 그리고
꽃을 피울 테죠.」
나는 견디지 못해 침대 모서리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그녀는 결코
우회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녀가 구석의 의자를 옮겨와 마주앉았
다. 소리없이 나의 눈을 응시했다. 왜 이리 벌거벗고 서 있는 느낌이
들까? 마치 일거일동을 샅샅이, 마음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어름어름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회복이 참 빨라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주쯤엔
퇴원해도 되겠어요.」
영원히 해독할 길 없는 암호문을 들은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달싹
거리는 듯한 그녀의 입술을 그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쁘지 않으세요?」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전 두려워요.」
「뭐가 두려우세요? 친구들을 만나기가 두렵다는 얘긴가요?」
「수녀님은 모르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울음이 터지려 했다. 좁은 공간에 가두어놓고 지극히 정당한 표정
으로 달라붙어서 나의 모든 행위와 사유를 가로막고 있는 그애가 아
닌가. 어떻게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녀가 가만히 나의
손을 잡았다.
「이젠 돌아가야 해요. 언제까지나 피하면서, 도망다니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돌아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 속에서 더불어 살며 극복
하도록 애쓰세요.」
나는 기어이 그녀의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수녀님 전 무서웠어요. 우리 또한 제화공장 아이들처럼 붙잡혀 갈
건 뻔했어요. 지독한 매를 맞을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병신이 될지
도 모르는 일이고, 직장에서도 해고될 테고, 그렇게 해고된 사람은
어딜 가나 불순분자 꼬리표가 따라붙게 마련이어서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사장이 조회 때마다 으름장을 놓았었거던요. 그
리고 새봄에 막내 아우를 꼭 교육대학에 보내준다고 약속했어요. 적
금을 붓고 있었거던요. 선생님이 되는 게 소원인 아우가 얼마나 실망
을 하겠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도 대학생이 탄생된다고 들떠 있는 어
머니의 실망은 어떡하구요. 그래서 그만…….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
어나리라곤……」
나는 더욱 그녀의 손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아무도 자매님을 비난하지 않아요. 죽은 친구도 자매님의 이런 모
습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요? 그는 거름이 된
거라구, 훨씬 더 무성하게 새순을 돋게 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 거름

노릇을 한 거라구요. 돌아가서 자신이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몇번인가 더 다정스레 나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그리고
소리없이 병실을 빠져 나갔다.
나는 오랜 후까지 침대 위에 엎드려 귀가 멍멍해지도록 흐느껴 울
었다. 방을 가득 채운 혼돈은 여전히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
열린 창에서 신선한 바람이 한차례 몰려들어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의 울음이 아주 무기력하고 터무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돌아와야 해. 넌 비겁하게 도피하고 있어.
어디선가 인애가 다가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그래 돌아가자,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자. 결코 우회하는 일 없이 익
숙한 눈길로 모든 기억들을 응시하며 내가 해야 할 몫을 찾아보자.
나는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인부들이 땀 흘리며 일으켜 세운 꽃
나무들 위에 어둠이 희끗희끗 내려앉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잠시인 듯싶지 않게 초록빛 잎사귀들은
저마다 피어나고자, 더욱 피어나고자 번쩍거릴 테지.
나는 폐에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번, 다시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