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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1998년 [수필-이은자]참 아름다운 주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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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79회 작성일 05-03-2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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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찬송가 78장은 이렇게 시작된
다. 누구든 교회에 처음 나오면 제일 먼저 배우고 자주 부르게 되는
찬송가 몇 곡이 있게 마련이다. 이 찬송도 그 중 한 곡일 것이다. 내
가 이 찬송가를 처음 배운 것은 전장의 상흔이 즐비한 그때 유년 주
일학교에서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학교와 교회 그 어느 곳도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던 시절에 무척이나
자주 이 찬송가를 불렀었다. 나이 오십이 다섯 해나 더 지난 올 봄에
서야 옛날 나의 스승님과 선배들이 그 폐허 위에 서서 이 찬송을 애
창하고 우리에게 따라 부르게 했던 마음을 알게 됐다.
내 고향 교회는 실향민들이 세운 교회다. 사선을 넘어 온 그네들
이 교회 종탑을 세운 뒤 마음껏 부르고 싶었던 찬송은 과연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었겠는가.
지난 해 늦가을 나는 췌장종양이란 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년여
기간 동안 일차병원에서 간헐적인 검사와 입원을 반복하다가 결국에
10월 12일 신촌 세브란스 31병동에 입원했다.
보름 넘게 입원해 있으면서 나는 한계를 느낄 지경으로 힘든 검사
를 여러번 받아야만 했다.
주치의는 수술을 전제로 하는 치밀한 검사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
겠지만 나의 속 생각은 달랐다. 수술은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
고 다만 확실한 병명과 상태를 알고 조용히 받아들이고자 묵묵히 검
사에 임했다. 한가지 두가지 검사결과가 종합될수록 주치의의 결단
은 확고해 졌고 가족들 역시 의사의 판단에 전적인 동의를 표했다.
수술을 거부하는 내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많은 낮과 밤을
육체의 고통과 맞먹는 정신적 갈등, 고통이 병행하였으나 끝내 나는
수술을 응락할 수 밖에 없었다. 똑 부러지게‘암’이란 말을 붙히기
를 주저하는 의사진들은 은연중에 암과 그 전이 여부에 관해 많은 설
명을 들려주었다.
‘췌장암’막상 병원에 들어앉아 듣자하니 나는 만만치 않은 적수와
맞닥들린 것을 알게됐다. 직접적인 자각증이 없이 진행되므로 발견
이 쉽지 않은 관계로 사망률이 높다는 것과, 그 위치상 수술 역시 매
우 고난도 시술이 요구된다는 사실, 더 주목할 사항은 수술에서 실패
율이 높기 때문에 장애로 남게될 수도 있다는 사실들이 우리를 두렵
게 만들었다. 췌장 머리부분 3센티미터 절단, 그 연접한 간, 위의 일
부와 쓸개, 십이지장 전부를 잘라낸다. 그리고 없어진 라인들 세 군
데는 소장을 끊어 이식, 연결한다는 것이다.
내 고집대로 수술을 거부하면 일년 남짓 생존이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수술에 성공하면 다른 이변만 없다면 최소한 5년의 수명 연장
이 약속된다. 수술 도중 사망하면 유예받은 일년반 마저도 지금 당
장 반납할 수 밖에 없다. 수술이 잘못되어 장애자로 남으면…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검사는 모두 끝냈다 하고, 이제 수술에 응하느
냐 이대로 퇴원하느냐 기로에 서서 나나 가족들은 번민에 쌓여 사흘
간이나 허비했다. 가족들은 이 엄청난 선택을 놓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수도, 어느 한 조건에 선뜻 도장을 찍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렵고 아쉽고 슬펐을 것이다.
최종 결정은 본인, 내게 달렸음을 깨달은 그 밤에 나는 베개가 젖
도록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 속에서 내 양쪽 손아귀에 아직도 틀어

쥐고 있었던 온갖 애착과 연민과 욕망들을 버리고 있었다. 수술과 그
후에 예상되는 갖가지 앞그림을 그려 본 수많은
밤들이 한갖 사치였고 내 힘으로 어찌 해 보려는 것조차 불신앙이였
음을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를 인정
한다면, 내가 그분의 섭리 안에 있음이 분명할진대 나의 생존 삶이
일년이면 어떻고 오년이면 어떻겠는가, 지금이 나의 종말이라쳐도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
의 것이니까. 이제 나는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과
의사들이 하는 대로 나를 맡기고 기다릴 것이다. 끝마무리는 주께서
하실테니까.
울며 지샌 그 밤, 그 새벽이 푸른색으로 밝아올 때 그 푸른색 같은
위로가 내게 밀려왔다. 고향 바닷가에 선 것도 같고 예수님이 서 계
신 디베랴 바닷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았다.
‘은자야, 네 그물에 고기가 있느냐?’그분이 물으셨다. 나는 곧
꿇어 앉았다. ‘예수님 내 손엔 이제 빈 그물만이 있나이다’
10월 29일 새벽, 나의 침대 주위엔 담임목사님과 나의 가족들이
빙 둘러 서서 기도회를 가졌다. 송별식처럼. 목사님은 손수건을 내어
내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셨다. 그리고 오전 7시 30분경 나
의 수술이 시작됐다고 한다.
전날 밤엔 가족과 형제들이 모두 병실로 모여왔다. 나를 건져내고
야 말겠다고, 그네들이 이미 하나님을 향해 올린 기도가 믿음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내게 용기를 촉구했다. 그런 그들의 결의와는 다르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은 없으나 목욕시켜주는 손길은 수의
를 입히는 것 같고, 기도회는 송별식처럼 느껴왔다. 우리 모두는 감
정을 극도로 억제하며 그 밤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수술은 대성공이였다고 한다. 장장 8시간 이상을, 나를 위한 가족

과 형제와 전교우와 벗들의 기도를 주께서 몽땅 싸들고 하나님 앞에
탄원했음을 나는 믿는다. 나는 11월 하순에 퇴원할 수 있었고, 길지
만 내겐 행복했던 겨울이 지나갔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
가에 오셔서 숯불에 손수 구운 생선으로 조찬을 배설하시고 온 밤 허
탕치고 지쳐있던 제자들을 맞아주신 그 부활의 아침, 그 봄을 내게
도 다시금 허락하신 감격 때문에 나는 눈에 비치는 자연과 사람과 사
람들 모두가 더없이 정겹고 아름다웁다. 작년 봄에도 보던 잎새들인
데 이 봄엔 영 생경스럽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 찬송시 구구절절이 나의 간
증이요 감격이다. 아직 내 몸은 회복기에 있고 지금 내 손에는 여전
히 빈 그물만이 들려있다. 때가 되어 주께서 이 그물을 어디에 던지
라고 명하시는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 때를 소망하며 한눈 팔지
말고 이대로 있을 작정이다.
과연 그 분께서 나를 이 세상에 살려두시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
별을 유보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있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뜻대로
이루시기를 의탁할 뿐이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자식을 기르노라면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언뜻언뜻 그들에게서 비져
나와 놀라게 된다. 예민함, 결국 제 몸만 다치는 기질. 현미경 속에
서나 인지되는 작은 씨앗 속에 온 우주를 다 담게 만든 창조주의 솜
씨이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하는 중, 내 딸이 농담삼
아 던진 질문이 있었다. 한참 세월이 흘렀으나 간과할 수가 없다.
"엄마는 동화 속 주인공들 중에 누가 되고 싶어?”
"백설공주”
"난 아냐. 난 잠자는 숲 속의 미녀였으면 좋겠어. 왜 그런지 알아?”
"......”
"그 애가 한 일이란 잠을 원없이 잔 것 뿐이야. 잠 많이 잤으니 얼
굴은 뽀야니 예쁠거고 깨자마자 갈등할 겨를도 없이 왠 멋진 왕자의
프로포즈를 받았어. 그보다 더 기막히는 사실은 실컷 자고 났어도 주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잠들 당시 그대로 있다는
것이야. 달라진게 전혀 없어”
나는 속으로‘아 그것이였구나’했다.
내 딸은 베이비붐 세대다. 입시경쟁이 가장 치열한 세대에 청소년
기를 살아왔다.
너무나 자주 가위 눌리는 일이 생기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열에 시달
리곤 했다. 입시지옥을 넘어서 대학생이 되서도 가위눌림은 가끔 그
를 괴롭혔고, 직장생활 초기만해도 연휴나 공휴일에 편히 쉬지 못하
는 눈치였다. 새벽 학원가를 끊임없이 기웃거렸다. 쉬는 것이 안되
는 그 아이를 볼 때, 대책없이 낳아주어 미안하다는 농담으로 그를
위로하는게 고작이었다.
가위눌림, 그 뚜렷한 실체, 검은 중절모의 큰 사내, 가슴을 내리 누
르며 되풀이하는 강요. ‘포기해, 포기해…’
어느 날 밤엔 엄마방 문고리까지는 나와서 잡았는데 속수무책으로
질질 제방에 도로 끌려 들어가 밤새‘포기해, 포기해…’그런 다음
날 아침엔 기운이 빠져 등교하기 조차 힘들어 했다.
대학 3학년 여름, 유럽여행 중 호텔방에서 자기 룸메이트도 함께
보았다는 그 정체.
가족들은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기도해 주고 담력을 가질 것을
종용하는 그 정도 밖엔. 어느날 밤에 닥칠지 모르는 그 아이만의 고
통을 덜어 줄 수 없어 가엽기만 했다.
우리는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게 됐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개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 딸은 그 중에도 으뜸이다.
상명여고 시절, 가파른 언덕길 주변 상점의 개들이 줄줄이 몇마리
씩 딸아이를 학교까지 따라와 애들이 황당해 했던 일도 있었다.
대입 시험을 보러 갈 때도 수험표와 나란히 강아지 사진을 놓고서
야 마음이 안정되고 따스해져서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있었다는
애다.
우연의 일치인가!
개는 악귀·잡귀를 물리치는 기가 있다는 속설이 있으니 말이다.
강아지를 기르고 그 강아지를 자기 방에 재우면서부터 그 가위눌림
은 사라졌다.

요즘 세대는 영특하다 못해 영악맞다. 구체적이고 합리적다. 내가
자라던 세대의 덕목은 사람만 좋으면 성공한다고 믿었다. 신분상승
의 기회도 허술했었다. 내 아이들이 사는 지금 사회는 뚫고 일어날
여백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보이지는 않지만 계층간의 금이 그어지
고 있다. 공채로 입사한 그 뒤로도 성차별적 분위기며 승진의 기회
를 균등히 보장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주 분해하고 좌절했었다.
그래서 일터에선 독하게, 아얏소리 안지르며, 여자이기 때문에 일에
열등하다는 소리 안듣게 하는 모양이었다. 집에 오면 파김치가 돼도.
가끔 다른 일터를 넘겨 보기도 하고 이력서를 작성하기도 하는 눈
치였다. 구성원들 간에는 인정도 받는 것 같은데 새벽학원을 여전히
기웃거리는 내 막내.
잠자는 동안 주위의 동료나 경쟁자가, 아니면 미지의 그 어떤 실력
자가 있어 자기가 추월 당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일 것이다. 이 아
이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그 정체는 지고선 못사는 자기 자신이였을
까, 아니면 일찍 세상을 보는 눈을 떴음일까?
잠 실컷 자고 난 것 뿐인데, 아무런 노력도 한 것이 없는데 눈부신
왕자가 손을 내민다는 그 미녀. 좀 쉬고 나서도 쉬엄쉬엄 걸어가도
결코 누구에게나 추월당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여건의 소유자-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부러운 내 딸이다.
나는 고작 백설공주를 동경했다.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
다. 기회가 주어지면 한이나 풀겠고, 신분상승, 뭐 그런 따위에 내
잠재의식이 닿아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려운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대는 시대…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한없이 부러운 세월이 얼마나 더 이어져
갈건가!

해 당 화
"웬 고향 냄새!”
5월 중순 화창한 날, 교장실에 작은 소집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
어서려는데 내 코에 상큼하게 닿는 냄새가 있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학부모들이 보냈음직한 꽃바구니 서너개가 이곳
저곳에 놓여 있었다. 국적도 이름도 모를 신종 꽃들이 흐드러지게 꽂
혀 있는 바구니 어디엔가 얼른 보이지는 않지만 냄새로 그 꽃이 존재
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선생, 고향 냄새라 했소?”
"네, 고향 냄새요. 해당화가 있어요. 방안에”
"대단하군”
변선생이 주섬주섬 꽃 한송이를 찾아 탁자 위에 가져다 놓으며 말
했다.
해당화가 아니라 산당화였다.
진분홍 다섯 개의 꽃잎, 노오란 수술뭉치.
환상적인 향기. 이 방안에 전부 세송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그 꽃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했다. 이 학교 화단에 한 그루
가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산당화는 해당화와 흡사하지만 줄기가 싸리나무처럼 길게 자라고
가시도 덜하다. 꽃받침의 과육도 부실하다. 다만 꽃잎 생김새, 잎
새, 향기만은 해당화와 똑같다. 산당화는 내륙 깊숙이 살지만 해당화
는 바닷가 모래밭에 난쟁이로 살며 가시투성이고 해풍을 맞아야만
건강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향기. ‘싸아’하니 아린 기억들이 묻
어 있는 향기.
그 때 내 고향 속초에는 이맘 때부터 늦여름까지 해당화가 지천이
었다. 바닷가 모래불과 해송 밑에, 돌 바위 언덕에 지천으로 피고 있
었다. 부얼리 바닷가도 그랬고 모래기에서 용촌 앞바다까지는 더욱
그랬다. 모래기 그 마을 이름은‘사진리’였다가 지금은‘장사동’이
라 부른다.
해당화 꽃이 만개할 즈음 미역바리가 시작된다. 모래사장 그 긴긴
해변에서 온 밤을 지새며 미역을 널어야 했던 우리의 어머니와 누이
들은 일출이 저만치 기미를 보이면 더욱 서둘러 손을 놀렸다. 미역은
하루 사이에 앞뒤면이 다 말라야만 상품(上品)이 되기 때문이다.
미역을 많이 붙이고 나면 눈썹이 빠진다. 치모까지도 모조리 빠져
버린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 막내 동생은 사십을 바라
보는 나이인데 아직까지도 유년의 그 미역더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미역을 먹지 않는다. 밤마다 미역 때문에 집에 안들어 오는 엄마, 선
잠을 깨우던 미역 작업.
나라 안 어디서고 어려웠던 보릿고개가 있었다. 그 때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미역이 있어 다행이었다.
해당화는 밤낮 어김없이 피고지고 향기 만발했지만 어른들은 아무
도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꽃을 사랑했다. 꽃잎이 지
고나면 꽃자루는 동그란 구슬모양 살찌고 윤이 난다. 처음엔 새파랗
지만 차차 빠알갛게 익는다.
그 열매 이름은‘똥기’라 부른다. 그리고 먹을 수 있다. 가지와 잎
새와 온통 솜털같은 가시옷을 입은‘똥기’나무를 아이들은 사랑했
다. 입으로 깨물어 반을 가르면 속에 씨가 가득 들어 있다.

씨의 모양은 마치 결명자 차와 같고 껄끄럼이 붙어 있다. 씨앗을
모조리 털어내고 나면 표피만 남게 되는데 그걸 먹는다.
잘 익은 것은 달콤새콤하니 참 맛있다.
집에 딱히 군것질감도 없던 그 때, 아이들의 훌륭한 군것질감이 되
어 주었다. 하지만 잘못해서 껄끄럼을 몸에 묻히거나 문지르는 날엔
따끔거리고 가렵고 고통스럽다.
미역철이 끝날 쯤엔 바닷물도 따뜻해져 있고 햇볕도 따가와 해수욕
을 할 수 있다.
해당화는 더더욱 만발하고 빠알간 똥기도 가지마다 푸짐하게 달린
다.
모래톱에 배를 지지며 똥기를 발라 먹는다. 이 때는 껄끄럼은 큰
문제가 아니다. 바닷물에 철벅철벅 몇 번만 들락거리면 따끔거리던
것들이 다 씻겨나가기 때문이다. 영특한 아이들은 똥기를 굵은 실에
꿰어 스님의 염주처럼 목에 걸고 다니거나 또아리를 틀어서 망태기
에 넣어 두기도 한다. 똥기를 따러 나갈 수 없는 날도 있기 때문에
그런 날을 대비해서 비축해 두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다른 아이들
과 이것저것 바꿈질도 한다. 소위 물물
교환 같은 행위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똑똑하진 못했다.
해당화 열매 말고도 여름철이면‘모래기’바닷가 바위 기슭엔 아
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다. ‘배꼽’이란 열매도 있다. 모래불
을 기어 사는 넝쿨식물이다. 꽃얼굴은 연분홍 나팔꽃, 잎새는 아이비
의 그것과 비슷하다. 학명으론 개메꽃이다.
또 하나 완두콩 넝쿨과도 같고 보라색 꽃이 제비가 전기 줄에 나란
히 앉은 모양을 하고 피는 것도 있다. 그 열매는 녹두같다. 먹을 수
있다.

그 뿐이랴 물 속 바위 섬엔 익히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온갖 바닷
말이 있다.
대박, 진드바리, 바다국수, 소라, 할미밥통,고동......
그 때는 해삼과 전복들도 어수룩해서 우리들에게도 잘 잡히곤 했
다.
반라(半裸)의 철부지들은 해당화 향기 날리는 바닷가, 산나리꽃,
난초꽃, 마타리꽃이 깔려 있는 언덕을 배경삼아 그 곳이 낙원인 줄
모르고 놀았다. 스쿠버 장비도 없이 우린 자맥질의 명수였다. ‘수
중발레’요새 생겨난 이름이지만 우린 이미 그 옛날에 그걸 다 즐기
며 자랐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어서는 선생님 교탁에 그 가시투성이 해당화를
부지런히 꽂았다. 하루만 지나면 금새 잎새와 꽃가루가 무너져 내려
선생님들은 출석부로 휙휙 털어내시며 귀찮아 하셨다. 그런데도 우
리는 당번을 정해 놓고 열심히 그 꽃을 꽂았다.
교실 가득히 풍기는 그 향기가 좋았기 때문에 산나리 꽃보다는 해
당화를 더 자주 꽂았다. 해당화 향기를 어떻게 글로써 설명할 길이
있겠는가. 도시 사람들은 향수‘조이’를 연상하면 근사치에 달할까.
장미향 같지만 신맛의 여운이 없고, 달콤하지만 느끼하진 않다. 짙은
것도 아니라서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 그 향. 그게 바로 해당화의 향
기다.
시집가고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직업을 따라 우리는 고향을 떠났
다.
재작년 봄에 나는 장사동에 있는 횟집에 간 일이 있다. 넓다랗던
백사장은 간데없고 나리꽃, 해당화도 볼 수 없었다. 앞바다엔 미역
이 돋지 않는다 한다.

개메꽃, 억새, 해당화들끼리 끌어안고 있어도 아무일 없던 모래가
지금은 자꾸만 쓸리고 깎여 나간다며 콘크리트 구조물인 삼각봉이
우악스럽고 흉물스럽게 쌓여 있었다. 그래도 모래는 여전히 패여 나
가고 있었다.
패여 나간 모래턱에 어느 집에서 뽑아 냈는지 생활하수관이 까맣게
독침처럼 드믄드믄 드러나 있었다.
서운함이 그지 없었다.
미역냄새와 해당화 향기는 기억 속에만 살아 있는 고향냄새가 되고
말았나 보다.
교장실에서 얻은 한송이 산당화 다섯 개의 잎새를 나는 비망록 갈
피에 넣어 두고 짬짬이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 한다. 이따금 다른 사
람에게 비망록을 펼쳐 코에 댔다 뗄라치면 그네들은 아무 냄새도 못
맡았다 했다.
왜일까? 너무 엷은 냄새라서 도시 공해 속에선 감지되지 못하기 때
문일까. 아니면 그네들의 고향냄새가 아니라서인가?
올 봄 속초에 갔을 때 권정남씨에게 내 비망록 갈피를 말했더니 그
가 나를 설악산 입구 바닷가 벤치로 데리고 갔다.
아! 그곳에 해당화 몇 그루가 보호구역 속에 갇혀서 피고 있었다.
온통 해안을 누비던 혈육들은 어디가고 몇 그루만이 하늘하늘 키만
키우며 울 안에 갇혀 있다니.... 불쌍해 보였다. 해당화 보호에 관민
이 나섰다 한다.
생활이 힘겨울 때, 고향이 생각날 때, 가끔 떠올리는 아이들이 있
다. ‘똥기’를 비축해 둘 줄 알던 아이들은, 그 때 이미 이재에 밝았던
아이들은 꼬옥 부자가 되서 잘살고 있을거란 생각을 해본다.
속초에 다시금 해당화가 지천일 때가 되면 서울 친구 몇 명과 동행

하여 그네들에게도 내 고향 냄새를 알려줘야겠다는 즐거운 소망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