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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1998년 [수필-강호삼]<갈뫼> 동인지와 함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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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69회 작성일 05-03-2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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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겨울 방학중 어느날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면도로가 된 철둑길 넘어, 이제는 중견시인으로 자리 매
김 하고 있는 이성선형의 매형이 살고 있는 동명동 어느 집이었다. -
중앙동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가 고향인 이성선형은 그때 속초시청에 사무
실이 있는 농촌지도소에 재직중이었고 매형집에서 출퇴근하고 있었
다.
그날 밤은 서쪽 설악산 청봉 하늘에 손톱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고
하늘이 맑았다.
우리들, 이성선 최명길형과 필자는 한평 반 남짓한 이성선형의 매
형네 작은 방안에서 당시 세계적인 사진잡지 LIFE지를 앞에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설악문우회에서 창간할 동인지 갈뫼의 표지
그림을 고르는 중이었다. 마땅한 표지화가 없어서 처음 발간되는 동
인지인데도 외국잡지에 실린 이름도 모르는 화가의 추상화를 표지화
로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쇄는 지금의 동아서점 건너편에 있었던 문화인쇄소에서 하기로
했으나 당시 문화인쇄소는 책을 인쇄할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
다. 명함이나 찍고 관공서의 간단한 공문양식이나 만들고 칼라인쇄
는 석판으로 3도색을 내는 정도였다.
아무튼 인쇄소 총무라는 사람과 책을 인쇄하기 위해 모자라는 활자
는 서울에서 더 사와서 조판을 하기로 하고 원고를 넘긴 것은, 당시
교동에 있던 교육청 회의실에서 설악문우회 발기 창립총회를 가진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창립총회에 모인 인원은 20여명 쯤 되었다.
그때 모인 얼굴들로는 박명자, 최명길, 이성선, 이상국, 김종영, 윤
홍렬, 김영규, 김현문, 최춘지 제씨와 필자, 그 밖에 몇 사람이 더 자
리를 함께 했었던 것 같다.
황××씨는 방송국의 취재기자 자격으로 배석하고 있었는데 이 사
람이야말로 설악문우회가 조직되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
다. 서라벌 예술대학을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는 당시
KBS PD겸 아나운서로 하루에 2시간(?) 배정된 지방 방송시간의
방송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역인사들을 자주 방송에 초
청인사로 출연시켰다. 그중 대표적 인사들이 이기섭, 박익훈, 윤홍렬
제씨들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송에 출연했는데 필자도
가끔 방송에 출연했다.
필자의 경우는 일기예보 방송을 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당시 중
앙관상대(지금의 기상청) 속초출장소에 5급 을(지금의 9급) 말단 공
무원으로 속초에 왔다. 그 전까지는 속초가 우리나라 어느 곳에 있는
지 알지 못했다. 당시의 박정희 정부는 국가의 과학발전의 필요성을
인식, 정부행정조직 가운데 과학기술처를 신설하고 중앙관상대를 과
학기술처로 산하기관으로 편입 그 첫번째 5급공채시험을 치뤘는데
필자가 여기에 응시했고 그것이 속초라는 미지의 고장으로 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필자가 특히 관상대 시험에 응시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시험과목 가운데 수학과목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중
학교 과정의 수학수업 시간에 소설책 같은 것이나 책상아래 넣고 보
았던지라 수학이 아니라 산수라는 <산>자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시험과목에 수학이 없는 대신 물리라는 과목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
도 물리라는 과목에 대한 개념이 필자에게는 정확하게 없었다. 어처
구니 없게도 수학보다야 쉬운 것이겠거니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기상업무 자체가 물리학이어서 후일 공무원 승진시험에 얼마
나 곤욕을 치뤘는지 모른다.)
시험치기 하루 전날 지금은 서울 서초구로 옮겨간 서울 명동의 국
립도서관으로 가서 도서열람카드를 뒤적여 대학물리라는 책과 도해
기상학개론이라는 일본판 번역도서를 대출 받았다. 단 하루만에 두
권의 책을 번갈아 본 뒤 이튿날 시험을 봤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도
시험문제인가 생각될 정도로 쉬워서 주어진 시간을 한시간이나 남기
고 밖으로 나왔고 합격통지서가 오자 이제 지긋지긋하게 밥 굶는 것
은 면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임용등록을 한 뒤 부임희망지를 서울과 부산 대전으로 적어냈고 2
개월 쯤 후 연락이 왔다. 희망지에는 정원이 다 찼고 속초가 사람이
비었는데 부임하겠느냐고 했다. 제대를 하고 일자리가 없어 그 사이
에도 끼니를 거르기를 밥먹듯 하고 동가식 서가숙하던 판이라 희망
지에 사람이 비기까지를 한가하게 기다릴 수가 없는 판국이었다.
바로 다음날 중앙관상대로 가서 관상대장앞에 임용선서를 하고 이
튿날 새벽 6시 서울의 마장동에서 삼용관광이라는 버스르 탔다. 포
장도 안된 한 차선의 진부령길을 반대편 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고 서고 하면서 장장 11시간을 달려 오후 5시에 지금의 국민은행
과 중앙동 파출소 옆 골목에 도착했다.
버스 밖으로 나오니 긴 시간 앉아만 온 탓으로 무릎 관절이 휘청했
다. 버스 승강구에서 한 걸음 내려서 밖으로 나오니 무언가 하늘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싸락눈이었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심코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다가 하마트면 낭

패를 당할뻔 했다. 길바닥이 온통 진흙탕이었던 것이다. 간신히 발이
진흙탕에 빠지는 것을 모면했지만 더 이상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
었다. 두 손에 무거운 가방(가방속에 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디건 발목이 빠지는 걸죽한 진흙탕길이어서 가방을 내려 놓을 곳
도 마땅치 않았다. 길을 가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목이 긴
검정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더러 필자처럼 미처 장화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양 길가의 어깨만큼 높이의 슬레이트 지붕 처마 아래
덜 걸죽거리는 곳을 골라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놓고 있었다.
필자는 사무실이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터여서 우선 여관이나
잡을 양으로 사방 휘둘러 보았다.
차츰 주위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지금의 시청 길 건너편 주유소 곁에 강원여관이라는 간판이, 전신
주 중간에 매달린 불그스레한 알전구등 불빛에 보였다. 그쪽으로 방
향을 잡고 필자도 장화를 착용 못한 다른 사람처럼 슬레이트 처마옆
을 바짝 붙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진
흙탕에 발이 빠졌고 그 서슬에 두손에 든 가방도 진흙탕에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낭패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진흙탕에 빠져서 망연자실해 있는데 어디선가 비릿하고 콤콤한 냄
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나중에야 그 냄새가 공터라면 손바닥만한 곳
도 허옇게 널려있던 오징어에서 나는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한평 반 남짓한 강원여관방에서 지
냈다.
종이 한판이 헤여져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고 벽이 때에 절어 새까
맣게 되었으나 서울의 창신동 머리도 들수 없었던 다락방 보다는 나
았다. 바로 그날이 필자가 속초라는 미지의 고향에 처음 도착한 날이

었고 날짜로는 1968년11월26일었다.
황××씨를 만나게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직장이 관상대였기 때
문이다. 일기예보관계로 방송국과는 접촉이 잦았다.
윤홍렬 선배님을 뵙게된 것은 역시 황××아나운서가 가야다방에
서 주최한 심포지움에서였다.
어떤 내용의 심포지움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이 자리
에서 처음 윤선배님을 뵈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윤선배
님은 사십대 후반으로 풍체가 당당하셨다.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
인 혜화전문학교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다가 인생유전으로 이곳 속초
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후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 틈틈히 문학에 대한 열정
을 토로할만큼 문학에 대한 의욕이 대단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필자의 경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어름풋이나마 문학에 대한 동
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당시는 6.25전쟁중이어서 학교가 미군에게 징발 당해 동네 공회당
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교과서 같은 것이 따로 있을리 없는 시절
이었다. 국어공부 시간에 유엔의 유네스코에서 기증한 종이로 인쇄
된 제본안된 낱장의 교재가 나왔었다. 거기에 실려있던 동요를 필자
는 지금까지도 외우고 있다.
첫머리가 <나는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동그라미 그리려 연
못으로 갈테야.> 시작되는 동요였는데 누가 지었는지 지금도 모르지
만 필자는 그 동요의 구체적인 의미도 모르면서 외우는 것이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차츰 머리통이 굵어지면서는 시골 구석에서 구할 수있는 책
이란 책은 모두 빌려다 읽었다.
아리랑, 야담과 실화, 청춘, 학원, 새벗 같은 것이 당시에 발행된 잡
지들이었는데 이나마 흔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
한 것은 가출해서 부산에 있을 때였는데 부산시립도서관이 내 서재
였다. 이곳에서 필자는 비로소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한 셈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동인지의 <갈뫼>라는 제호는 박명자씨가 작명
했다. 동인들이 각기 동인지 제호를 하나씩 작명해와서 그중에서 가
장 그럴듯한 것으로 뽑기로했는데 박명자씨가 작명한 <갈뫼>가 선택
되었다. 뭔가 그럴듯하긴 했는데 필자는 그 뜻이 얼른 가늠되지 않아
서 박명자씨에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가을 산이라는 의미와 산
을 경작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렇게해서 동인지의 제호도 정해지고 원고도 얼추 들어와서 인쇄
소에 넘겼는데 고맙게도 서울의 초정 김상옥 시조시인(백자부라는
시조가 고등학교 국정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음)께서 제자를
손수 써서 보내왔다.
박명자씨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박명자씨의 소개를 필자
가 아는대로 조금 하고 넘어가야겠다. 박명자씨는 강릉사범학교(지
금의 교육대학 전신)를 졸업, 바로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고 지금도
강릉 포남초등학교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다. 사범학교 때부터 문
재가 있어서 교내 백일장에 장원을 했고 신봉승 황금찬 윤명씨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던 관동문학회의 가장 나이 어린 회원이었다.(그
러나 당시 관동문학회는 핵심회원들의 서울 진출로 그 활동이 다소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에 있었던 같다.) 뿐만 아니라 우아한 미모도
겸비하고 있는 문향 강릉의 자랑이기도 했다.
교사들의 순환보직에 따라 속초로 전근되었고 마침 부군인 최종록
씨의 사업체도 속초에 있어서 필자가 속초에 왔을 때는 속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남녀 구별할 것 없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지만 당시
만 해도 여성의 사회활동 여건은 지금처럼 성숙되지 않았던 때여서
동인중 유일한 여성회원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가야다방에서 가졌던 심포지움(?)이 있고 난뒤 그 며칠후였다.
가야다방에서 다시 윤선배님을 뵈었다. 윤선배님은 약속이 있어서
다방에 나왔지만 나는 퇴근 후 할 일없이 들렸다. 할 일 없이 들렸다
는 것은 누굴 만나거나 약속이 없었다는 말일뿐 실제는 목적이 있었
다.
당시 가야다방은 속초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다방을 문화공간
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좀 무엇하기도 하지만 실제 당시의 가야다방은
속초의 유일한 문화공간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다방
이야 가야다방 말고도 <지혜><보리수><수>니 하는 다방들이 6개소
정도 더 있었지만 가야다방을 속초의 유일한 문화공간이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방의 주인은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모라 불리우는 동
생과 부인, 그리고 여자 종업원 두 사람과 함께 다방을 직접 경영하
고 있었다.
마씨 성을 가진 주인은 교양도 있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고향이 어
디인줄은 잘 모르나 속초 사람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 무엇보다 가야다방을 문화공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당시로서
는 나름대로 갖추어진 오디오 시설에 크라식 음악만을 들려주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소장된 레코드 판도 상당해서 대중적으로 듣는 웬
만한 고전음악 판은 거의 다 있었다.
당시 부산이나 서울의 종로에는 <루네쌍스>가, 부산과 대전에는 <
크라식>, 대구에는 <하이마트>가 있었다. 특히 서울의 <루네쌍스>는
소장하고 있는 크라식판은 몇 만 정도여서 국내의 고전음악 팬은 물
론 대학의 서양음악을 전공하는 교수나 학생들도 이용하는 곳이었
다.
필자도 우연찮게 서양의 고전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물론 처음
부터 빠져든 것은 아니다. 당시 음악실이라는 것이 순수게 음악감상
만을 위해서 찾는 곳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음악감상을 위해서 또는
서양의 고전음악에 대한 조예를 높이기 위한 바람직한 동기에서 음
악감상실을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필자처럼 감상실 티켓 한 장이면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찾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음악실 출입을 하다보니 서당개 3년이라고 차츰 귀가 틔여
어느 때 부턴가는 일부러 음악 감상을 하기 위해서 음악실을 찾겠금
발전했던 것이다.
동기야 어떻던 음악감상이 빼놓을 수 없는 취미로 굳어지면서 군에
입대를 해서도 외출을 하면 먼저 음악감상실부터 찾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품으로 귀를 틔여 갔으나 나중에는 무겁
고 장중한 교향곡이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서도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라고 표제가 붙은 곡을 특히 즐겨 들었던 셈인데 당시
의 필자의 쓸쓸한 처지가 이 곡의 주제와 상통한 점이 있었던게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음악은 언제 어느 곳에서 들어도 좋
게 마련이다.
베토벤의 9편의 교향곡 그중에서 9번 교향곡은 장중하고 환희에
넘처서 좋고 6번 전원교향곡은 잔잔한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을 더할
수 없이 섬세하게 그리고 있어서 좋았다.
5번과 3번은 인간의 엄숙한 철학적인 주제가 듣는 이로 하여금 압
도하게 하는 곡이다. 그 밖에 바흐나 헨델의 음아도 즐겨 들었고 마
음이 우울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드볼작의 <아메리카>를 들었

다.
이 때문에 속초에 와서 가야다방을 자주 찾게된 것은 극히 자연스
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가야다방은 크라식 음악을 틀어 주긴 했어도 음악감상실은
아니었고 역시 차를 파는 다방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런 다방이 있
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윤선배님과는 가야다방에서 자주 뵈었는데 어느날 합석을 해
서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필자가 문학동인 모임을 조직해보
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했다. 필자는 윤선배님이 현직 고등학
교 국어선생님이어서 동료 선생님들이나 가르친 제자 가운데 누가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속초를 중심으로한 영동 영북지방은 무척 열악한 문화적 환경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인구가 적고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않
다해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창조적인 문화적 욕구가 있게 마
련이었다.
우선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명단을 주면 필자가 앞장 서보겠
다고 했다.
가야다방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 며칠후 필자는 윤선배님으로
부터 명단이 적혀 있는 쪽지를 넘겨 받았다. 그 다음부터 할 일은 순
전히 필자의 몫이었다. 등사판으로 취지문을 만들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여 발송을 했다. 통지서를 발송하는 우표값도 필자의
몫이었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문우회를 조직하느라 들어간 이러 저러한 잡비 때문에 칠천원 내외
의 말단공무원 봉급으로 3천원의 하숙비를 내고나면 매달 적자였다.
이 누적된 적자가 나중 다른 곳(부산)으로 전근 갈 때 어려움을 겪게
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전근이 되었을 때 저축이 한푼도 없었던 그

달치 하숙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요즘처럼 신용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통신수단도 교통도 다 열악
한 때였다. 더우기 다른 곳도 아닌 돈문제는 마땅히 누구에게 터놓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생각하다 못해 염치불구하
고 여자회원 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에 2만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수십만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
는데 그 여자회원은 선선히 돈을 빌려 주었다.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하숙비도 내고 서점의 책값도 갚고 교통비등
전근비용으로 썼다. 그런데 그 빌린 돈을 29년이나 세월이 흐른 지
금까지도 갚지 못하고 있다.
자질구레한 외상값 같은 것은 전지에서 봉급을 받아 우편환으로 송
금을 했다. 중앙동에 있는 <명전사>라는 전기재료상은 기상대 거래
처이기도 했으나 필자가 전기용품을 개인적으로 가져다 쓴 것도 있
어서 부임지인 부산에 와서 우편환으로 송금했다. 그랬더니 이 작은
신뢰가 오늘까지도 이어져<명전사>의 사장인 구정웅씨와의 경우는
이제 너, 나 하고 터놓고 지내는 막연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송금
을 하기 전, 부산의 전근지에서 봉급을 받을 때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있었다. 혹시 그 전에 외상값 떼먹고 도망 갔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먼저 편지를 썼다. 갑작스러운 전근 때문에 그냥 부임지에 왔노
라고 양해를 구하는 편지였다.
아마 그 여자회원에게 빌린 돈은 영원히 갚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당연히 도둑놈 심뽀가 아니냐고 힐난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빌린 돈때문에 한 평생을 정신적ㄷ인 볼모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면 조금은 속죄가 되지 않았을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기회
로 미루고자 한다. 누구든 치부(?)는 드러내놓고 싶지 않는게 상정
이지만 또 조금은 드러내고 싶은 이상심리도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문우회의 창립총회는 교육청 회의실에서 가
졌다. 물론 회의실 사용은 윤선배님의 주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의 거의 모든 일들은 다 윤선배님의 섭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