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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2000년 [소설-윤홍렬] 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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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9,157회 작성일 05-03-3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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逆風은 불어도 江물은 흐른다. (ⅴ)
<6>
그 소사아이도 사태의 중대성을 분별하였음인지, 그리고 평소에 체질처럼
느껴온 일본경찰의 위협적인 공포심에 젖어서인지 주위를 살피면서 여선규
의 얼굴 가까이에 입을 대고 귀엣말로 소근거리는 것이다.
“무시라? “
여선규는, 깊은 잠결에, 하늘이깨어지는 것같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
럼, 소사 아이의 귀엣말을 듣고 소스라칠 듯 놀라며 되물었다.
“마우재가 청진항에 올라왔닥 하재이요. ?”
소사 아이는 조금 침착해진, 그리고 나직한 말투로 설명을 하면서 여선규
의 얼굴을 말끄러미 본다.
여선규는 껑쭝 뛸 것 같았던 자세를 바로 잡는 데 무심결에 한숨이 길게
나왔다. 기어코 왔고나. 기어코 일본이 망하는구나.…… 감탄과 감동이 굽이
친다. 마치 추위와 굶주림속에 눈속길을 헤매다가 저 멀리 보이는 주막의 등
불을 발견한 듯한 환희요 희망이다. 복음이다.
아아 일본은 망한다. 망하는구나. 기어코 망하는구나. 그래……이래서 신
은 분명히 계심을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그분의 판단이 공정하심을 열번 백
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신이여, 신이여, 전지전능하신 신이여, 감사합니
다. 감사합니다. 천벌은 뒤늦게라도 반드시 내리심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여선규는 무심결에 합장을 하고 허공에 경배를 올렸다. 지천만에게 하도 많

이 맞아서 터지고 갈라지고 부어오른 눈꼬리에서 그래도 마앍안 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러면서 연신 신이여 감사합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신이여 감사
합니다를 연송하였다. 그러는 서슬에도 문득 좀더 확인을 해야겠어서 소사
아이에게 다시물었다.
“뉘기 그랬음둥”
“지금 경무주임이랑 서장으 전화통에는 불이 나고 있소꼬망. 도 경찰국 그
리고 다른 겡찰서에서 오는 전화 가는 전화 해서 이 겡찰서가 쇠통 불이 난것
처럼 도산합소꼬망”
“………?”
문득 여선규는 불안한 의혹이 잔잔하게 피어 오른다. 그렇다면…그렇게
소란하다면……불이 난 것처럼 소란할 말이면, 같은지붕밑에 있는, 여기 이
사찰계 조사실은 왜 이렇듯 조용하느냐가 우선 궁금해지면서 이 소사아이의
본색이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가 미리 지천만에게서
비밀 지시를 받은 대로 <나를 떠 보는 것이나 아닌가. 내가 함부로 말을 하였
다가는 잘못하면 독립사상을 품은 불령 조선인>으로 새로운 올가미를 씌우
려는 음모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아이에게 (비밀지시 여부)를
물어 볼 수는 없다. 우선 이 아이의 신원이라도 좀 알아 보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여선규는 자신의 들뜬 마음을 될 수 있는 대로 가라앉도록 호흡을 가다
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궈래. 이름이 무시김둥”
그 아이는 자신이 알려준 내용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을 묻는 여선규
의 말머리가 뜻밖이다 싶었나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선규의 얼굴을 말
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밝힌다.
“아라이꼬망, 아라이 햐꾸도우상.”
“아라이?”
“ 에엥”
“그러믄 조선성으능 박 (朴) 임둥?”
“ 그렇소꼬망”
“ 이름은?”
“ 만석입꼬망. 박만석. 우리집이 됫새 가난했읍매. 그래서 나능 많은 곡석
을 재어 놓고 살락하는 뜻으로 만석이라 지었답데 . 그리구 일본식으는 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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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두산이재이요. 백두산처럼 우뚝 솟아나는 인물이 되락하는 뜻랍데.”
“ 그래 궐래는 아적 어린이까나 정직하게 부지런히 노력으 하믄 천석꾼도
되고 백두산처럼 높은사람도 될끼다. 절대로 부끼틀이(거짓말쟁이) 되믄 아
이 됨매. 거짓뿌제이( 거 짓말에 ) 에 속히는 사람은 절대로 없읍매. 훌륭하
게 발전한 사람은 반드시 정직한 사람입메. 궈래으 꿈으 위해 부지런히 노력
으 합세.”
박만석은 여선규의 덕담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나보다. 단정히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한다. 이어 여선규가 물었다.
“집은 어딤둥?”
“잉게 사오.”<여기>
박만석은 지천만의 책상에 두 팔굼치를 짚고 엎드리어 여선규의 신상명세
가 적혀 있을 서류철을 드려다 보는채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가볍게 대답을
한다. 그 서류를 비비적거리며 말을 계속한다.
원래 창렬동 (彰烈洞) 태생이란다. 창렬동 철산에서 노동을 하던 아버지
가 철광석더미에 깔려 사망했다는 것이고 모친과 무산읍내에 있는 외가에 와
서 얹혀 살았단다. 그 외가도 몹시 가난하였는 데, 그래도 창렬동보다는 허다
못해 남의집 허드렛일을 거들어주고 얻어먹는 한이 있다할지라도 읍내가 나
을 것이라는 외삼촌 부부의 권유도 있고 또 달리 어떠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
니고 하여 우선 외가로 이사를 하였단다.
그런데 학령기에 다달은 박만석의 취학문제로 가족들간에 오래인동안 논
의가 있었는 데 외삼촌네 부부는 취학을 반대했단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데“만석”이를 학교에 보내면 그 뒷바라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
이 반대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전거포 같은데에 취직을 시켜 기술
을 익히도록 하자고 권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어머니의 고집으로 무산 소학
교에 입학이 되었고, 모친은 닥치는 대로 노동을 하였단다. 다만 몇푼이라도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궂은일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았단다. 농번기에는 논일
밭일을 가리지 않았고, 품삯이 후하면 후한대로, 박하면 박한대로, 주는 대로
받으면서 돈을 만들어 셋방을 마련했고, 그래서 박만석의 모자는 외가에서
나와 독립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데, 독립생활을 꾸린
지 얼마 되지않아 그만 비참한 불행을 또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5학년 되던 해의 5월이오. 어매가 죽었읍메.”

잔잔하게, 속삭이듯 늘어 놓는 박만석의 이야기를 듣던 여선규는 눈살을
찌프렸다.
“무시기 벵이었음둥?”
“벵이 애이오.”
이제는 책상에 걸치고 있는 한쪽팔을 베고 엎드린 채, 손가락으로 책상 위
에 글자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곡선 또는 직선을 느릿느릿 그으며 말
을 잇는다.
“자사르 했읍메”
지나간 일이라 그런지 박만석은 그 쓰라린 사실을 잔잔하게 밝힌다. 그러
나 그 잔잔한 말투속에는 문득 지난날이 회상되는 서글픔이 일렁거리고 있음
을 여선규는 보았다. 그러나 여선규는 박만석군의 쓰라린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이 잔인한 짓인 것 같아서 더 묻지를 못하고 머뭇거렸다. 공연히 이런 이야
기가 나오게 하였다는 후회와 더불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서쪽 하늘만이 내다보이는 창문을 우러렀다. 간절
히 궁금한 것은 청진항에 상륙했다는 소련군의 전황이었다다. 지금 어디 쯤
와 있을까.…… 그런 데 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박만석이, 여전히 책상에
엎드린 채로 제풀에 말문을 연다. 들어도 좋고 안들어도 상관 없다는 태도인
것 같다.
박군의 모친이 목상( 木商)을 하는 부잣집, 니시하라(西原)네 집에 허드
렛일을 하러 가끔 드나들었단다. 그 집에는 경찰관들과 군청 직원들 그리고
읍사무소 직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다. 특히 명절때면, 며칠동안 큰 잔
치가 벌어지곤 했단다. 하루에 몇십명씩이 초대 되곤 하였는 데, 그럴 적마다
그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음식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니 박만석
군의 어머니의 일거리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경팔네집 이야기라는 것을 여선규는 금방 알아차렸다. 한경팔의 직업이
목상이고 창씨 성이 니시하라(西原)이기 때문이다. 그 집의 초대라면 여선규
도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음식 만드는 일거리가 많다는 대목을 여선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박만석의 모친은 품삯도 후한 데다가 잔치가 끝나고 남은 음식을 푸지게
가져 올 수도 있고하여 다른데 먼저 약속이 됐던 경우라 할지라도 그 목상네
일거리가 생기면 먼저 약속을 취소하고 목상네 집 일을 거들어 주곤 하였단
다. 따로 살림을 차린 후에도 모친이 그 목상네 일을 하고 오는 저녁엔 만석
이가 외가로 와서 의례이 모친이 가지고 오는 음식을 외가집 가족들과 함께
먹곤 할 정도였단다. 그렇게 외가 식구들과 어울려 한차례의 잔치판이 벌어
지다시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이 한달에 한 차례정도는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 목상네 아주망이가 우리집에와서 어매를 모지르 답새깁데.”
(심하게 때렸다)
“………?”여선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된기둥?”
여전히 책상에 고개를 얹고 여선규쪽은 보지도 않는 채 박만석은 나직한
음성으로 응답을 한다.
“울 어마이하가 나모장쉬가 함께 잣닥합데”
얼굴의 굳은피에 꼬여드는 파리떼를 짜증스레 쫓던 여선규의 눈이 또 한
차례 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그 내용을 알겠다. 박만석의 이
야기가 진행 되면서 <어쩌면…… > 하는 짐작이 가는 사건이 있었는 데 과연
이제 듣고보니 바로 한경팔이 저지른 불륜 문제다. 한 삼년 됐나?. 한경팔의
아내가 남편과 통정한 여자를 찾아가 악장을 치며 극심한 폭행을 했다는 것
이었고, 폭행을 당한 여인이 그날밤에 뒷동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들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는 데 이제
듣고 보니 그 아들이라던 아이가 바로 이 박만석이로구나…라고 판단하는 여
선규는 기묘한 맞남에 세상이 좁다라는 속설을 새삼 실감하면서 아직도 책상
에 엎드려 있는 박만석의 뒷머리를 측은한 시선으로 봤다. 가진자에게서 짓
밟힌 가정의 가련한 소년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선규 자신이 공분 같은 그런
심정으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렇다면 가진사람이나 힘있는 사람에게서 받
은 앙금진 한은 박군의 가슴속 어딘가에 응어리져 있으리라. 그러한 쓰라린
경험과 한을 지니고 있는 박군이, 조선사람에게 특히 야비하고 잔인한 순사
로 소문난 지천만의 꾐을 받아 여선규를 염탐하고 고자질할 그럴 소년같지는
않았다. 잠시나마 박군의 심정을 못미더워 하였던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면서
도 한편으로는 청진항에 상륙했다는 소련군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 쯤 진격했을까.
당장에 지천만을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심한 시장기가 몰려온다. 파리떼는 파리떼 대로 기승을 부리며
거듭거듭 심술궂게 몰려들어 상처난 얼굴에서 피와 진물을 빨아 먹는 데, 이
제는 그 파리떼를 쫓는 데도 힘이 부친다.
아귀처럼 꼬여드는 파리들의 횡포가 무척 성가시기는 하지만 손을 움직여
그 것들을 쫓기에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너무 졸아붙었나 보다. 허리가 점점
휘어진다. 이마에 진땀도 배어나는 것 같다. 이제 곧 소련군이 이 무산읍에
몰려온다는 소식이 있을는지도 모르는 데 이렇게 쓰러져서는 안되겠다는 판
단이다. 기력을 살리기 위해 신경을 가다듬었다.
한경팔……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것은 아니고, 그가 무산군내에서는 상
당한 재력가요, 경방단장 등으로 폭넓게 활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는 사
이가 된 것은 아니다. 무산군내에서는 쩡쩡거리는 유지이기 때문에……무산
군민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안다는 것도 아니다. 그와 첫 대면을 한 것은 무산선( 茂山線) 을 부설하는
그 공사판에 뜨내기 날품팔이로 노동일을 하러 나간 적이 몇 번 있었는 데 그
때 그 공사판의 십장이었던 한경팔을 만났던 것이 첫 대면이었다. 그러니까
무산선(茂山線)의 개통이 1929년 11월이었으니까 벌써 십 사오년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한경팔이 오늘날처럼, 니시하라다로(西原太郞)가 되어
무산군내에 쩡쩡거리는 유지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를 알고는 지내는 처지
였다.
그의 고향이 어딘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학력은 자신의 입으로 중학교를
중퇴했다라고는 밝혔다는 데, 어느고장의 어느 중학교를 몇 학년까지를 다니
다 중퇴 했느냐는 전연 밝힌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자랑을 잘하는 사람으
로도 알려져 있다. 여선규가 직접 경험한 바로도 그렇고 한경팔과 술자리에
어울렸던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경팔이 자기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점
은 시인한다. 그 자기자랑 끝에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 또 한가지 있는 데, 도
지사 타령이다. (내가 만일에 중학교를 졸업만 했더라면 도지사 정도는 틀림
없이 하겠는 데) 라며 제풀에 킬킬거리며 웃곤 했었다. 중학교를 중퇴했다면
보통학교는 졸업을 했어야겠는 데, 그의 일본어 구사력으로 보아서는 보통학
교 졸업은 커녕 입학이나 해 봤었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라는 말도 있다. 그
의 일본어 실력을 짐작해 볼수 있는 기회를 여선규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일
본어가 무척 서투르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알려진 말로는 일본인 무산군수와 역시 일본인 무산경찰서장을 수시로 만
나 농담을 나눈다는 것인 데 도대체 그 알량한 일본어 실력으로 어떻게 농담
을 나눈다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웬만한 조선사람
들은 감히 군수나 서장 정도의 고관들의 얼굴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는 정
도도 벌벌 떨릴 정도인 데, 그 끙끙거리는 일본어 구사력을 가지고 그들과 농
담을 나누는 정도라면, 그 뱃심과 수단이 대단히 놀라운 사람이라는 찬사와
빈정거림을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경팔이 무산선의 철도공사판을 따라와서 이고장에 발을 붙인 것으로 알
고 있다. 그 당시 그 공사판의 십장으로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
다. 그리고 어떤 연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공사판의 십장시절에 무산면 어떤
농군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데 농군의 딸이라는 단순한 선입
견으로서는 많은 차이가 있는 여자라고 들었다. 보통학교의 문앞에도 못가봤
다는 데 99법도 알고 언문(한글)도 깨쳤다고 한다. 그러나 편지를 쓸 수는
없어도 웬마한 문장을 읽을 수는 있을 정도라고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지닐총
은 좀 있는 여자인 것같다. 혼인식이 끝난 그 이튿날 쪽을 풀으고 일본 여자
들의 신식머리형인 차양머리로 틀어 올렸다고도 한다.
창렬동 광산에 관계하는 일본인 직원들이 몇 사람이 무산읍에 산다. 그 사
람들의 아내들이 차양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여선규도 가끔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무산 보통학교에 단 한명의 여선생이 있다. 나이도 5 십이 넘은 점잖
은 선생이다. 부령 보통학교에서 전근 되어 왔다는 조선인인 데, 그 교원이
차양머리를 하고 다닌다. 기경숙이 그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무척 부러워 하
다가 결혼을 하자마자 모방을 한 모양이라는 말도 있단다. 그러고 보면 기경
숙이 무산군내의 조선인 가정부인으로서는 신식 차양머리의 제1호 여성이
된 셈인 데, 머리뿐만이 아니라 강둥치마의 제일호 여성이기도 하다. 남편이
하는 일에 참견도 잘하고, 남편의 의견을 남이 보는 앞에서도 거침없이 반대
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에서도 우리네 가정에서는 흔하지 않은
존재였다.
한경팔은 허우대도 남성답게 듬직하게 생겼는 데다가 성격도 씩씩하고,
어떤일에고 찬성과 반대가 분명하면서도 협동성이 있다. 불쌍하고 약한 사람
들을 돕는 데도 앞장을 서다시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친구도 많고 활동성
이 있는 사람인데 어찌된 영문인지……잡드리(맵시. 모양새)도 별로 없는 앙

깐 (여편네) 에게는 고양이 앞의 쥐라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경팔의 아내는 돈으로 온몸을 싸바른다는 말도 있다. 철도 공사판의 십
장으로 있는남편이 차려 준 만물상회의 금고인 데도 남편의 손은 얼씬거리지
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기경숙만이 그 금고를 도맡아 관리 한다는 것이다.
아쉽지 않은 용돈으로 기경숙은 외모치장에 상당한 돈을 들인다는 것인데도
도무지 돈값이 안 나온다고 부인들이 숙덕거린다는 말도 있단다. 광대뼈가
너무 불거졌다고 입을 삐죽거리는 여자들도 있다는 것이고 뱁새눈이 어찌나
표독하게 생겼는지 마주보기가 싫다는 여자들도 있단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
서는 오뚝한 콧날에 귀여운 입매가 아주 복성스럽게 생겼다는 칭찬도 있기는
있단다.
교양은 부족하면서도 용돈은 부족하지 않은 여자가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기경숙이 그렇단다. 자신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일인데
도 찾아가서 간섭하기를 잘한단다. 작은 일에든 큰일에든 아는 체도 잘하고
남의 싸움을 가로 맡아 싸우기도 잘 한다는 것인 데, 그러면서도 만물상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지장이 없는 정도가 아니
라 만물상회는 개업하면서부터 어찌나 장사가 잘 되는 지 초여름철에 칡덩굴
뻗어 나가듯 빠르고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싸우고난 손
님들까지도 잘 구슬려가면서 가개를 잘 이끌어 나간다는 소문이 났던 여자
다. 하기야 기경숙이 손님다루는 수완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철도공사판의 전
표를 받아주는 최초의 점포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라고 여선규는
단정한다. 하여튼 그 여자에게 행악을 당하고 나서 박만석의 어머니가 자살
을 했다……이 경우도 기경숙에게 행패를 당했기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불륜문제가 공개 됐다는 점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죽었을는지
도 모른다. 박만석은 모친의 죽은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소련군의
상륙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한경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여선규는 무산선 공사 당시의 무산일
대의 정경, 15∼6년전의 무산일대의 정경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소문난 잔
치에는 하객들도 많지만 각설이도 많이 꼬여들게 마련인 것처럼, 1926년을
전후하면서부터 만주사변이 마무리되던 1933년을 전후하여서는 무산일대
에는 한꺼번에 대규모 공사판이 펼쳐졌다. 우선 철도공사로는 무산선과 무산
역에서 창렬동 철광산(彰烈洞鐵鑛山)으로 이어지는 철도공사에 겹쳐창렬동
광산개발공사도 한꺼번에 진행되었다. 이런 공사의 덕분으로 불어나기 시작
하는 무산 거리는 천지개벽이래 최초로 우글거리는 사람들 떼로 소란하고 요
란한 소동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벌어지곤 했다. 전 조선 방방곡곡의 노동자
란 노동자는 모조리 함경북도에, 특히 무산지역에 몰려들었다는 말이 나돌았
을 정도였고 무산거리는 갑자기 큰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요란하게 북적거
렸다.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등짐장사들 그리고 사기도박꾼들 야바위꾼들 가
짜 만병통치약 장수들 게다가 엿도가도 생기니 자연히 엿장수들이 몰려들었
고 사기꾼 협잡꾼 등으로 붐볐다. 포목전과 고무신 가게도 몇군데 더 생겨났
고 색주가도 여러집 문을 열었다. 공사판 주변에는 노무자들을 수용하기 위
한 밥집이 무더기 무더기로 세워졌고 무산 바닥에 뭉칫돈이 바리로 굴러다닌
다는 풍문과 더불어 개도 일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농담이 심심치 않
게 떠돌아 다닐정도로 흥청거렸다.
돈이 흔아면, 개인이고 집단이고 본연의 도덕성은 물렁물렁해지게 마련인
가 보다. 무산거리에 돈보따리가 뒹굴다시피 되면서 뜻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프리게 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낮이고 밤이고 걸음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고 갈짓자 걸음으로 이리비틀 저리비틀거리며 아무 데서고, 심지어는 남의
점포 앞에서,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을 혼자 중얼거리며 가개 안쪽을 향해서서 고의춤을 헤치고, 아주 오래인동
안 용을 써가며 많은 오줌을 질질 갈겨대는 데,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마치
장마철에 도랑물 흐르 듯 하는 겅우도 많았고 한길에서 상대방의 윗도리가
너덜거릴 정도로 찢어가며 밀고 당기고 욕설을 퍼붓고 하다가 결국은 주먹질
발길질이 험악하게 오가는 과정에서 코피도 터지고 머리통도 깨지고 하여 피
투성이가 되는 싸움박질도 가끔씩 있었다. 어쩌다가는 대낮에 샛서방을 불러
들였다가 남편에게 들켜 땅땅 얻어 맞으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엄살을 부
리면서도 오늘밤 또 한차례의 불륜을 예비하는 앙큼한 여자들도 늘었다고 들
었다.
무산읍 장바닥의 상업계가 흥청거리는 데 인근방의 농군들이라고 소문만
듣고 가만히 있을리는 없을 것이며 날아 다니다시피 한다는 돈 다발 풍문을
듣기만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농사일에 조금만 틈이 나면 그 자투리 시
간이나마 쪼개어 공사판에 나오는 농군들의 가족들, 대부분 부부들이었지만
무산장거리의 일반 가정 주부들도 웬만한 집안일은 밀쳐놓고 공사판으로 달

려 나오기도 했다. 주로 철도 예정지에 흙 퍼나르기 아니면 철로를 깔기 위한
자갈 나르기 또는 노반에 자갈 펴기 작업이었다. 일요일에는 학교 다니는 아
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가족들도 있었다. 여선규의 아내 김서분도 나왔다. 아
직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없는 새댁이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왔던 것이
다. 돈을 벌고싶어하는 김서분의 의지는 시부모도 남편도 말리지 못했다. 그
런데 샛강골에서 공사판까지의 거리가 거추장스러웠다.
2십리길이 넘는 거리, 그것도 숨을 헐떡거려야할 정도로 높직한 고개를
세 군데씩이나 넘어야 하는 험하고 먼 길이다. 그러나 무산장거리에 가득히
깔려 출렁거린다는 돈. 다른 사람들이 다 훑어가기 전에 빨리 달려가서 좀 잡
아야겠다는 김서분의 조바심에 숫제 임시 숙소를 친정으로 옮겼다. 방 한간
을 비우게하여 부부가 신접살이를 차리다시피한 것이다. 그렇게하여 친정올
케도 어울리게하고 일요일에는 여선규도 끌려 나오고야 말았다. 면사무소 서
기로서 시간도 여유롭지 못한 데다가“관리”로서의 체면문제 등을 생각하여
망서렸지만 아내의 성화같은 등쌀에는 어쩌지를 못하고 일요일이면, 나간적
이 몇 차례 있었다.
무산선(茂山線) 철도공사를 고무산(古茂山) 과 무산에서 함께 시작하였
다. 말하자면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함께 시작하여 중심부로 주름잡아가는
방식이었다. 노반을 다지는 토목공사는 그렇게하였지만 선로를 까는 작업은
남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산쪽으로 다가서는 방식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무산에서부터 무산을 향하여서는, 우선 노반이 조성되는 대로 선로를 깔으
며 기차를 운행하였다. 일반적인 운송업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도공사에 필
요한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흙을 제외한 일체의 자재들, 심지어 자갈
까지도 남쪽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함경선(咸鏡線)에서 무산선이
갈라져 나오는 고무산역 근방인 부령역 (富寧驛) 근처에 큰 돌산이 있고 그
돌산 앞에는 큰 돌을 부수어 자갈을 만드는 쇄석기( 碎石機)라는 것이 있다
는 말은 여선규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자갈을 백오십여리나 떨어진 지점
인 부령에서 기차로 실어 오는 것이다. 무산역 예정지 (豫定地) 에서 약 5 리
쯤 떨어진 남쪽까지는 철로가 깔렸으니 무산선의 개통도 멀지 않았음을 짐작
케 하는 정도로 공사가 진척된 것인 데, 거기까지는 기차로 자갈을 실어다 부
려놓는다. 거기서부터 북쪽으로는 노반공사가 완결 되는대로 지게작대기 굵
기의 철로를 복선으로 깔았다. 이 것이 딸딸이수레라는 것을 굴리고 다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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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는 공사판용 임시 선로다. 딸딸이수레 한 대에는 두 사람씩의 노무자
가 배정되었는 데, 그 두 사람이 기차가 부려놓은 자갈을 퍼 싣고, 그 수레를
밀고 당기고 하면서 노반정리가 끝난 선로 예정지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부
려 놓는다. 그렇게 부려진 자갈을 노반공사가 마무리된 선로면에 고르게 펴
는 작업을 하는 것이 뜨내기 노무자들의 일거리다. 그 자갈을 뿌리는 작업구
역이 현장감독에 의해서 지정되는 데, 대체적으로 50미터 단위로 구분하여
놓는다. 그런데 자갈을 펴는 지시와 작업의 감독은, 즉 노무자들과 직접 대화
하는 것은 십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 때 여선규가 직접 상대하는
십장이 한경팔이었다. 그의 첫인상은 역시 수 십명의 노동자들을 부린다는
십장 답게 떡 벌어진 어깨에 거무데데한 얼굴, 그리고 굵직한 음성 등이 실팍
해 보였다. 노동판의 경험이 없는 여선규는 현장감독이나 십장이라는 직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몰랐다. 노동일을 하면서 들은 바로는 기차역 한 구간 길이
에 현장감독이 한 사람씩이고 현장감독 한 사람 밑에 십 여명의 십장이 있다
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한경팔이 거느리는 인부 수는 적게는 2∼3십 명, 많
을 때는 8∼9십 명도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상당히 높은 위력적인 자리라
고 여선규는 생각한다. 무산면사무소 직원이 7 명인데 그 7 명을 거느리는
면장의 직권과 위엄이 무산면 내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비추어볼 때 노무자 8
∼9십 명을 거느릴 수 있는 십장의 권위는 대단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십장에게서 지시받은 작업량의 한부분을 마치면 만보라는 것을 받는다.
그리고 또 한 부분을 마치면 또 만보 한 장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하루 작업
을 마치고 일손을 뗄 무렵에 그 만보를 십장에게 건네면 그 만보 숫자에 해당
하는 일당을 적은 전표로 바꾸어 준다. 이 전표가 그대로 현금이나 마찬가지
로 무산시장에서 통용된다. 필요한 물품을 살 수도 있고 또 현금과 교환할 수
도 있다. 돈놀이 하는 사람들이 전표를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표시된 금
액에서 일할을 공제한 액수로 통용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금과의 차이점이
다. 그 전표를 발행한 청부업자가 현금으로 바꿔 주는 시기가 매월 15일과
30일인데 그 날짜는 정확하게 지켜진다. 전표를 가진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
으로 14일 또는 29일에 전표를 가지고 물품이나 현금으로 바꾸려해도 그 액
면가의 일할은 어김없이 공제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터무니없이 비싼 이자
지만 항상 아쉬운 사람은 억울해도 냉가슴만 앓으며 당해야 한다.
무산시장에서 공사판의 전표를 현금과 비슷하게 받아주는 최초의 상점이

만물상회였다는 점에서 만물상회의 번창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웬만한 무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선규의 부부도 들러 본 적이 몇 번 있어
서 그 점포의 규모를 아는 데 무산 시장바닥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는 소문
을 확인 했다. 농기구, 비료 포목류에서부터 일반 생활필수품 그리고 어린이
들의 주전부리감들까지 그야말로“만물상회”라는 상호에 걸맞을 내용과 규
모의 점포였다. 당연한 현상으로 점원도 여러 명이었고 손님도 많았다. 현금
유통이 별로 없던 무산바닥에 공사판의 전표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복
음처럼 들렸던 것 같다. 지금은 무산 장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치고 공사판
의 전표를 꺼리는 사람은 없다. 술집이고 담배가게에서고 공사판 전표가 통
용되지 않는 집이 없건만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직도 만물상회만이 전표가
통용 되는 유일한 가게로 인식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만물상회는 개업 초
기부터 계속하여 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리며 빠른 속도로 번창하여 갔다.
그당시에는 한경팔과 여선규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한달에 몇
차례, 기껏 많아야 서너번 정도였고 그나마도, 정감있게 나누는 말은 한 마디
도 없었다. 흔한 말투로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저 철도 공사판에
서의 노동자와 십장의 신분에서 나눌 수 있는 지극히 업무적인, 말하자면 만
보에 관한 것 또는 전표에 관한 대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가을철로 접
어들면서는 만주에 있는 리운골에 가을걷이 하러 다니느라고 공사판엘 나가
지 못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무산선이 개통 되었다. 그 무렵에 무산역에서부
터 창렬동 철산 (彰烈洞鐵山) 으로 이어지는, 약 2 십리 남짓한 구간의 광석
반출용 철도공사도 끝났다.
그렇게 해서 무산지역 주민들의 알찬 부수입원이었던 일자리도 없어졌다.
창렬동의 광산이 개발 되었다고는 하나 그 곳에는 뜨내기가 아닌, 전업적 노
동자의 고정적인 큰 일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철도공사 기간에 한껏 부
풀었던 무산지역의 상업경기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창렬
동 철산의 개발은 안정된 그리고 푸짐한 노임이 약속된 또 하나의 노다지 일
터라는 점에서 시장경제의 희망은 여전히 일렁거렸다. 다만 아무나 틈만나면
참여할 수 있는 철도공사판처럼의 대중성이 없다는 것이 무산지역 주민들로
서는 아쉬운 점이었지만 그래도 거기서 나오는 많은 임금은 역시 경제순환
법칙을 따라 빙빙 돌게 마련일테니까 무산의 시장경제는 다시 기름이 돌기
시작하리라는 희망은 살아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 철산 개발 규모가 차츰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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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것은 필연적이라는 추측으로 철도공사가 끝나면서 발길을 돌렸던 방랑성
노무자들이 창렬동보다는 무산면 주변으로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무산면
이 창렬동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창렬동 철산의 업무관계 사
무소가 무산군청이 있는 무산면에 있는 관계로 철광산의 소식이 무산면이 더
빠르다는 점이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조선반도의 북쪽끝 변두리
마련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조금은 갖추어져 있는 곳이 무산 장거리다. 두만
강의 강폭이 무산 앞에서는 좁고 얕은 곳이 조금 길다. 그래서 옛날부터 만주
와의 물물교역이 차분하게 이루어지던 곳이다. 그래서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객주도 있어왔고 또 허다못해 국밥 한 그릇, 떡 하나를 사먹는다 할지라도,
또는 다모토리 한잔을 사 마신다 할지라도 창렬동보다는 무산 장거리 음식의
질과 양이 낫다. 그래서 창렬동에서 노임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자재대금 등
으로 뿌려지는 돈은 일단 무산장거리를 거쳐서야 제갈 곳으로 다시 움직여
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창렬동의 노다지 화수분은 그대로 무산면의 경기로
이어질 조짐이 두터운 것이었다.
철도공사가 마무리 되고서는 전표관계 따위의 볼 일도 없는 데다가 또 면
사무소의 담당업무가 그렇게 한가롭지도 않은 여선규는 한경팔의 소식같은
것은 전연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었다. 또 만물상회에 들를 일도 없고하여 그
냥 그렇게 시일이 흘렀다. 어쩌다가 노상에서 마주치는 기회가 있기는 하였
지만 그럴때마다 그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런
데 그 몇차례 되지도 않는 노상에서의 스치고 지나가며 나누는 인사에서였을
망정 한경팔의 고개가 차츰 뻣뻣해짐을 느꼈다. 그럴때마다 여선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었다.
동료들과 어울려 대포잔을 기울인다든가 또는 한가로이 담배라도 나눠 피
우는 기회라도 있으면 어쩌다가 한경팔의 동정이 화제가 되는 기회가 있었
다. 한경팔이 굉장한 재산가라는 소문이 있단다. 철도공사판의 십장생활 몇
년 사이에, 만보와 전표를 이렇게 저렇게 조작하여 많은 돈을 모았다는 것이
다. 철도 공사가 끝나면서 노동판에서 물러났고 아내와 함께“만물상회”운
영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미 잡혀진 만물상회의 운영기반이 있는 데다가
알려진 명성의 여운도 있고, 또 공사판에서 벌었다는 자금의 위력도 보태진
것은 사실이겠고, 또 부부가 합심협력하여 장사에만 열중하니 이래저래 장사
는 착실하게 안정과 발전이 다져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 근자에

일본인 소유의 광대한 산판에서 그 일부를 분양받았다는 데 그 규모가 일찍
이 조선사람으로서는 누구도 가져보지 못했을 정도로 넓은 면적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목재를 통나무채로 팔아넘기는 것도 많지만
일부는 제재를 해서 기차편으로 실어내는 데, 그 양도 지금의 조선사람 몇 사
람의 제재소에서 나오는 것의 몇 배도 넘는다는 말도 있단다. 이래 저래 한경
팔의 재력은 마치 여름철의 오이처럼, 한 시각이 다르게 뻗어나간다는 소문
이다. 하여간 한경팔이 주무르는 현금 규모는 무산 금융조합보다도 크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란다.
지난 날에는 무산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라야 기껏해서 목재 운반용
의 트럭이 몇 대 흙먼지를 풍기며 털털거리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고, 국경
수비대 무산 파견대 본부에 드나드는 일본군 트럭과 2인승의 세 바퀴 오토바
이가 어쩌다가 눈에 띄는 정도였는 데, 이제는, 창렬동 철산에서 철광석을 청
진읍의 일본제철소(日本製鐵所)로 실어내는 기차, 무산역에서는 무진장으로
모여드는 목재를 실어나르는 등으로 하루에 여러 차례씩의 기차가 기적을 울
리며 지나다니기도 하는 도시가 되었고, 수 십대의 목재 운반 트럭이 붕붕거
리며 달리는 현대적인 거리가 되었다. 수비대의 규모도 커졌는지 2 인승 오
토바이의 모습도 자주 보였다.
무산엘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숙식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이란 주막집 뿐이
었다. 객주집도 한 군데 있지만 그 곳은 만주와의 무역 상인들의 전용이다시
피 되었고 일반 나그네들은 주막집에 든다. 낮에는 음식먹는 손님을 받고 밤
에는, 행상인, 땜쟁이, 벌목하는 산판에 일자리를 구하는 뜨내기 노동자들,
어쩌다가 찾아드는 길손까지를 한방에서 합숙시키는 봉놋방 뿐이었는 데 이
제는 독방이나 합숙방을 선택해서 묵을 수도 있는 여관이라는 것이 생겼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도 생겼다던데, 그 곳에는 창렬동 광산관계로 온 일
본인 손님들이 주로 묵는단다. 목욕 시설도 있어서 숙박비도 조선사람들이
운영하는 여관에 비하여 거의 곱절이나 비싸다고 알려졌다.
무산의 시가지 규모가 커지면서 행정 단위의 격도 올라갔다. 무산면이 무
산읍으로 승격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포실하여 진 것은 물론인 데, 이에 따라
만물상회의 장사도 더욱 충실하여져 갔다. 그러는 한편 만주사변( 滿洲事變-
1931, 9, 18-1932, 3, 1) 이라는 전쟁이 터졌다, 물론 일본의 군벌이 조작적
으로 도발한 전쟁이었고 전황은 역시 일본의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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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년 반 정도의 시일이 지나면서 중국군의 일방적인 패배, 그리고 일본군
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만주제국이라는 허수아비 국가가 세워졌다. 그
러나 소련과 만주제국과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는 아무르강(黑龍江) 연안
의 경비는 물론 일본군이 맡을 수 밖에 없게 되었는 데 그 병력이 백만대군
(百萬大軍)이라고 큰소릴 쳤다. 그 수비대의 이름을 관동군(關東軍) 이라고
일컬었는 데, 만주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관동군 사령관이었다. 만주제국
의 허수아비 황제는 관동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할 수 있었다. 국
가재정의 세입과 세출은 물론 관리들의 임면도 관동군 사령부에서 처리하였
다. 그런 정도이니 만주와 조선사이의 국경선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질 수 밖
에 없었다. 결국은 무산에 있던 국경수비대는 철수되었다. 그리고 약 5년쯤
있다가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일지사변( 日支事變- 1937, 7,
27 →1945, 8, 15.) 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전쟁도 일본군의 각본대로 도발
한 전쟁이라는 것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만주사변 때나 마찬가지
로 이 전쟁도 일본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진행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일본 국토의 30배가 넘는 너비의 중국땅
을 완전히 점령하기에는 일본의 국력이 부치기 시작하였다. 진격의 속도가
무뎌졌다. 게다가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태평양 함대사령부가 있는“ 하
와이의 진주만 기습”으로 빚어진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패배는 일찌감치 예측할 수 있었다. 요 근래에는 날마다 일본군이 후
퇴했다는 소식뿐이다. 오늘 청진에 상륙하였다는 소련군의 소식도, 날마다
쫓겨 다닌다는 일본군의 이 근래 소식과 같은 현상의 일부일 것이다. 무척 궁
금하다. 물론 내륙 깊숙히 진격했겠는 데 어디 쯤 들어 왔을까.
2∼3년전부터 시장에 있어야할 모든 종류의 물자가 사라지기 시작하였
다. 그래서 시장바닥의 점포들은 하나씩 하나씩 문을 닫았다. 식당에서는 음
식을 사먹을 수 없게 되었고 술집에서는 단 한방울의 술을 구하지 못하는 처
지가 되었으며 석유로 등잔불을 밝혀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한 정도
였다. 양말 한 켤레, 내복 한 벌, 비누 한 장을 산다는 것 또한 꿈도 꿀 수 없
는 상황이 되었다. 무산시장이 텅텅 비었다. 전 조선의 시장 상황이 이러할
것인데 만물상회라고 하여 무슨 기적이 있을리 없다.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이른바“전시경제 운영체제”라는 명목으로 일본 정부가 철저한 통제경제체
제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든게 배급제였는 데 그 배급제로서도 국민들

에게 공급할 물자가 지극히 귀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조선 민족의 중요한
주식품인 쌀이 몹시 귀했다. 그래서인지 쌀만 가지면 고양이 뿔도 살 수 있다
는 농담이 나돌 정도로 쌀의 위력이 대단했다. 잡곡은 군량미가 아니지만 쌀
이 일선지대에서 무한대로 소비와 낭비를 거듭하고 있으니 민간인 용의 잡곡
도 더불어 귀하게 된 것이다. 하여튼 야채고 나물이고 사람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그리고 지극히 귀했다.
통제경제체제가 강화 되면서 한경팔의 수입도 예전 같지 않다고는 알려졌
지만 그러나 여전히 부자다. 함경북도의 전 버스 노선을 독점하고 있는 조선
인 버스 운수업자와 합작하여 일본군에게 비행기 두 대를 헌납했다는 데, 그
헌납식을 청진에서 성대하게 가졌다고 들었다. 그 이후 그는 무산군 경방단
장이 되었다. 이제는 무산읍내에서 당당한 재력가요 권력가로 알려진 것만은
사실이다. 무산읍내의 모든 관공서의 직원들이나 애국반장들 그리고 경방단
원들, 일반 유지들치고, 일년에 한 두 차례 정도 그 사람에게서 음식 대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선규 자신도 그렇다. 명절때에 정례적으로
초대 되었고 한 여름에는 두만강변에 차일을 치고 개장국 잔치를 벌리곤 하
였다.
조선의 청년들이 죽는 것과 동등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징용(徵用)을 한경
팔의 기업체에 들어만 가면 절대 안심이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다. 하기야
무산군 경방단장 ( 茂山郡警防團長)이고“황군 성전완수 추진위원회 무산군
회장”(皇軍聖戰完遂推進委員會茂山郡會長) 쯤 되었으니 무산읍장정도는
자신의 부하직원 다루듯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하여 이상할 것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감히 그 앞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데도 벌벌 떨린다고 하는 일본인
군수나 경찰서장실에도 수시로 드나들며 농담을 나누는 정도라니, 자신의 기
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무자들의 징용 보류 정도의 문제는 한경팔의 위치
와 수단으로 어느 정도는 조절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여선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 광대한 중국 대륙과 광막한 태평양 싸움터에서, 양적으로 부족하고 질
적으로 열악한 무기를 가지고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일본
군으로서는 사상자 수가 막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각 직장에서 근
무하는 예비역들을 무더기로 소집하여 일선으로 보내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정도의 무리한 방법을 써 가면서까지 전투요원들을 충원해야 하는 정도로 일
본의 전투력은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졌다. 그와 꼭 같은 현상으로 무너진 진
지의 복구 작업 또는 후퇴하여 새로 구축하는 진지를 만들기 위한 공사등으
로 막대한 인원의 노무직도 필요 하였다. 즉 민간인을 거의 강제로 끌어다 쓰
는, 이른바“징용”(徵用) 이었다. 이 징용으로 나가는 대상자가 주로 조선인
청년들이다. 군부(軍部)에서 행정 조직을 통하여 징용 인원수를 요청하면 행
정부에서는 그들의 계통을 통해 순차적으로 지시를 내린다. 마지막 단계가
면 또는 읍사무소다. 실제로 징용으로 나갈 사람들의 명단은 여기서 병사담
당 직원이 작성한다. 물론 읍 면사무소의 부책임자 그리고 호적 담당 직원이
합동하여 협의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책임자나 호적계 직원들은 될 수
있으면 발언을 안 한다. 징용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가 워낙이 처참하다
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의 불구덩이에 젊은 사람들을 쓸어넣다
시피하는 잔인한 작업에서 빠지고 싶어서이다.
여선규가 애착을 가지고 근무했던 읍사무소에서 자진하여 퇴직한 것도 바
로 이 병사계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여선규 자신이 징용으로 나
가면 나갔지 죽음길의 사자와도 같은 잔인한 짓은 못하겠다는 것이 가족들에
게 밝힌 사임 이유였다. 현역 군인이든 노무직의 징용이든 미국 군대와 맞서
는 전투지역에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하는 정
도로 미군의 화력은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한경팔네 사업장에만 채용이 되면 징용을 안나갈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여
비 한푼 안들이고 안전한 곳으로 이사가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그래서 한경
팔네 벌목 산판이나 제재소에 노무자로 채용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았
다. 그러나 한경팔네 기업체에서 징용이 보류된다는 것은 무산군수와 경찰서
장의 계략적인 임시방편이지 제도적으로 보장 된 것은 아니다. 그렇건만도
한경팔네 기업체에 채용이 되면, 이 것은 바로 조상의 음덕이라고 풀이하며
행운중의 행운이라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한경팔을 포함하여 모두 5 명이내
의 노무자에게는 징용을 보류하기로 하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한경팔은
특별히 선발된 4 명의 노무자들에게는 철저한 비밀을 다져 놓고 신분보장의
조건으로 노임을 안주는 것은 물론 징용 안나가는 사례금 명목으로 가끔씩
금품을 상납받는다는 것이고 그 상납받은 돈은 다시 국방 헌금이 되어 나남
군사령부로 간다는 말도 들린 적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한경팔이 기회 있
는 대로 국방 헌금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여선규는 신문도 안보고 라디오도 없다. 무산읍에서 2십리 길이나 되는
산골집, 샛강골에 신문이 배달 될리 없고 전기가 없으니 라디오를 들을여야
들을 수도 없다. 그저 여선규 생활권 밖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처남 김남철을 만나는 기회 뿐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흘러다니는지는 모르겠
으나 일본군에게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전쟁 소식은 많이 듣고
있다. 미군은 차근차근히 일본군을 밀어붙이며 다가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
데도……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만을 외쳐대는 일본 군벌
들의 발악적인 고함소리만이 허공에서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여선규는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전세는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소문이 쌓이고 겹
쳐지더니 결국은 소련군이 청진항에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나보다. 여선규는 서쪽 창문을 통해 보이지도 않는 먼 산을 본다.
지금 소련군은 어디쯤에 와 있을까.
지천만의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다시피한 여선규의 육신일 망정
“소련군 청진항 상륙”이라는 소식은 일체의 통증도 일체의 울분도 일시에 날
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일본놈들……과 그 앞잡이들에게서 받았던 수모
도 고난도 이제는 끝이 났다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지금까지 겪었던 일체의 울분도 저주도 모조리 벗겨져 사르르 흘러 내리는
것 같다. 여선규는 흥분과 감동으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
다. 그러나 모진 고문의 독소는 잠시 감각을 잃었을 뿐이지 그 독이 해소 된
것은 아니었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러자 온몸의 통증이 다시
살아난다. 아프다. 괴롭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이제 곧 독립이 되는 데……
살아야 한다. 일본은 망하는 데. 기어코 망하는 데…기를 쓰고 살아야 한다.
일본이 망하라는 것은 간절한 염원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망하리라고는 예측
을 못하였던 것이다. 후련하다. 그런데 왜 뒷소식이 없는 것일까. 지금 소련
군들은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반가움이 궁금증으로 변한다. 한편으로는
미국군이 쳐들어 올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 데 소련군이 왔다는 것은 조금
의외로웠다. 그러나 누가 오면 어떠랴. 일본만 거꾸러뜨리면 되는 것이니까.
소련군은 어디쯤에 와 있을까. 그들을 마중나갈 수 있으면……온몸의 신경이
무감각해지다시피한 감각을 가다듬어 두 손을 가슴께에 모두어 쥐며 불끈 힘
을 모았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며 …야 이 일본놈들아 어서망해라…
를 목청껏 외치고 싶다. 지천만의 책상에 엎드려 있던 박만석이 놀란 듯이 일
어난다. 지천만이 오는 기척을 느꼈나보다. 책상 위에 고여 있던 침과 땀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문질렀지만 말끔히 지워지지 않으니까 무명 적삼 앞자락
을 황급히 끄집어 내어 쓱쓱 문지른다. 지천만이 들어왔다. 전투모의 턱걸이
끈을 턱에 걸었다. 다리에는 각반도 감았다. 왼쪽 가슴에는 육혈포도 매달려
있다. 완전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는 들어서면서 우선 실내의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듯 실내를 빙 둘러본
다. 그리고 팔목에 걸었던 상의를 박만석에게 건넨다. 말없이 건네받은 지천
만의 상의를 박만석은 잽싼 걸음으로 우측 벽에 박힌 못에 걸어놓는다. 자신
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은 지천만은 양궐연을 말을 준비를 한다. 그리고 여선
규를 보며 말을 건다.
“ 마우제(러시아) 갈나새끼들 괴낭히 오똘거려 갯구( 공연히 까불어 가지
고) 사라믈 페롭게 한단말입시. 호시무라상 들었슴둥?”
여선규는 지천만의 말뜻을 알지만 자칫하다가는 박만석군이 어떤 곤경에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성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편한 시선
으로 지천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 아라이궁, 오마에, 호시무라상니 시라세 나깟다노?(너 호시무라상에게
알리지 않았니?)
여선규의 아무런 반응이 없음을 보자 지천만은 박만석에게 묻는다. 박만
석은 여선규를 흘긋 보고 나서 머리를 가볍게 젓는다.
“ 한 도노노 이이쓰께가 나깠다노데 나니모 시라세 마센데시다“ (반장
님의 분부가 없어서 아무말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박만석의 능글맞은 거짓말에 여선규는 감동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궐연에 부시불을 붙이고 나서 지천만은 내뿜은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는 모
습을 보더니 입을 연다.
“이저는 다 지난 일이기 때문에, 또 우리 군대가 이깃으니까나 까발려도
괘않을끼오. 오늘 아적나절(아침나절) 에 마우제 (러시아인) 갈라새끼들이
똑딱선 몇 척에 군대 간나쌔끼 드르 몇 명 태부구 청진항에 들어왔답데. 그러
나 마우제 갈라들 힘₩X구 우리 일본 군대를 당할 쉬 있소? 게다가 청진부(
淸津府) 주벤에 대포가 오죽 많소? 그 대포들이 일제히 갈겨 댔답데. 그 대
포들으 집중 포화에 마우제 갈라새끼들 기겁을 해개지구 뛰막질 (달음박질)
을 했대재이오? 간단히 말하믄 그 얘기오. 알아듣겠소? 호시무라상”

소련군이 도망 갔다? 믿기어려운 말이다. 그렇게 대포 몇방에 도망을 갈
말이면 애당초 소련군이 청진항에 무엇하러 들어 왔단 말인가. 도망가기 위
해서 상륙했었단 말인가. 그리고 비행기는 없었단 말인가? 미군의 B-29는
몇 천리밖 먼데서도 날아오는 데, 시베리아의 브라디보스독의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비행기가 안 왔었단말인가. 왜 비행기 말이 전연 없는 것일까. 물론
일본군대의 비행기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은 안다. B-29가 가끔 오는 데 그럴
적마다 그 비행기가 사라진 다음에서야 조그마한 장난감같은 일본군비행기
가 딱 한 대 떠서 가까운 하늘을 한바퀴 빙 돌고는 사라지는 정도다. 말하자
면 B-29와 대결하려고 떴는 데 미국비행기가 피해 도망갔다고 방송을 한다
는 말을 들었다. 일본군의 그러한 실정을 소련군이 모를 리가 없겠는 데 왜
비행기를 가져오지 않았단 말인가. 이제 지천만의 말에서는 비행기 이야기가
전연 없다. 그렇다고 물어 볼 수도 없다. 이상하다. 그러나 소련군이 청진항
에 상륙하였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쫓겨 갔든 자진해서 돌아 갔든간에 어쨌
던 지금은 전투중이 아니라는 것은 지천만이 지금 이 방에 들어 와 태연하게
앉아 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련군이 상륙을 하였
었다면 뱃놀이 하듯 총은 한방도 안쏘고 조용히 상륙했다가 조용히 물러갔다
는 말인가. 일본군은 청진 주변의 대포를 일제히 쐈다라고 했는 데, 소련군은
다치지도 않고 총도 안 쏘고 그렇게 물러났단 말인가.
소련군이 청진항에 상륙하였었다는 소식에서 여선규는 궁금한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지천만에게 묻지는 않기로 했다. 엉뚱한 트집을 잡아 행패를 부
릴지도 모르는 사태가 두려워서였다. 어쩌면 지천만도 자세한 전황은 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일본군에게 불리하든가 또는 수치스러운 것은 가리어 놓
고 조선인 순사 지천만에게는 이미 청진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사항정도만을
알려주었을 는지도 모른다. 지천만이 아무리“우리 일본군대”타령을 하면서
충성을 바친다 해도 일본관리들 끼리가 아는 범위와 조선인 관리들에게 공개
하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우제 간나아 새끼들, 내 한참 놀랐던 생각을 하믄 한 대 답세겨 주고 싶
소. 지금 이 자리에 있다믄 한벌루(함부로) 오똘거리지 몽하도록(까불지 못
하도록) 모지르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함메”
지천만은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보다가 여선규를 보다가 제풀에 싱글거리
고 웃기도 하면서 혼자 지껄인다. 소련군이 쫓겨 갔다는 사실이 자못 통쾌한
모양이다. 그리고 여선규나 박만석의 맞장구를 바라는 눈치인데 여선규로서
는 거기에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다. 여선규 자신의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
졌다. 소련군이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무찌르며 발빠르게 진격한다는 소식이
어야 했는 데 물러 갔다는 것은 통탄스러운 노릇이었다. 이제 언제쯤에나 다
시 상륙할까.
“나, 나가도 괘안 꼬망?”
박만석도 지천만의 실성한 듯한 짓거리가 듣기싫은 모양이다. 나갈 자세
다.
“요로시이(좋아의 일본어) 잇데미요(가 봐라)”
지천만의 승낙이 떨어지자 박만석은 여선규를 흘긋 보고는 휭허케 나갔
다.
“호시무라상도 잘 알재이오 ?”
이제는 여선규를 직접 불러세운다.
“이 시상에서 제일로 강한 군데가 일본구인 애이요? 호시무라상은 어찌
생각하오?”
진실로 귀찮은 질문이다. 그까짓 질문에 응답을 해야할 가치도 명분도 없
다. 그러나 청진항에 상륙했었다는 소련군은 물러났다라고 하는 데, 믿을 수
도 안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은 지천만이 가슴에 육혈포까지
달고 이 사찰계 조사실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잠시후에는 어떠한 사
태가 발생하든간에 지금은 지천만이 마음내키는 대로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
는 능력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유치한 질문에 댓구
는 하기 싫다. 어떻게 할까로 조금 머리를 짜봤다. 방안이 떠 올랐다. 오른손
을 힘겹게 들어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입이 아퍼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을 표
현했다. 지천만은 여선규의 손놀림의 뜻을 이해 하였나보다. 고개를 끄덕이
더니 입을 연다.
“이 시상에서 으뜸으로 강한 군대가 일본군대오. 지금 일본군이 싸우고 있
는 것으 봅세. 전세계를 상대루하여 싸우고 있재이요? 일본군으 상대해서 이
길 군대가 이 시상에 어디도 없소. 그런데 소련으 땅덩어리는 크오. 일본으
몇 배도 더 될기오. 그렇지마네서두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비 땅덩이가
하는 도사이질이 애이재이오? 그까짓 마우재 따위가 워찌 일본군대르 당하
겠음둥. 아이될끼 애이오.? 바로 오눌 청진항에 왔다가 되비 뺑소니질 행거

스루 보아서두 알 쉬 있재이오? 그 갈라 새끼드르는 일본으군대르 지루떠보
고 (깔보고) 한 번 오똘거려(까불어) 본기오. 그러나 일본으 군대가 그렇기
숭물아재비(멍청이)오?. 멀짝고리(멍청이)가 아이재이오? 그리고 소련군으
는 아부쟁이 (겁쟁이)오. 일본군으 대포알 몇 방에 기겁을 해서 도망갔재이
오? 일본으 군대는 뉘기도 몬당하오. 호시무라상 알겠음둥?”
지천만은 말을 마치며 제풀에 킬킬대고 웃는다. 여선규는 진정으로 말댓
구눈 고사하고 지천만의 목소리 자체도 듣기싫다. 진저리가 난다. 그러나 노
골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조금전에 입이 아퍼 말을 못한다는 뜻을 알렸으
니 이제는 머리짓으로 의사표시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머리만 끄덕였
다.
그런데,…… 밤눈 어두운 말이 워낭소리듣고 앞말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