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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2000년 [동화-장선옥] 엄마는 얄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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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552회 작성일 05-03-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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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얄미워

소풍날입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베낭을 만지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안
방에서는 아직도 기척이 없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제 오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일은 우리 학교 소풍을 가기로 한 날입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비
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금요일에 공부할 준비를 해서 학교로 오세요.
좋은 꿈꾸고 미리 우리가 가는 향교에 대해서 공부해 오세요. 그럼, 내일 만
나요.'
하얀 바탕에 연분홍 작은 꽃들이 놓인 블라우스를 입은 선생님은 마치 선
녀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옆 짝인 혜주가 속삭였습니다.
“서빈아, 우리 선생님은 말을 아주 다정하게 하시지? 옆 반의 6반 선생님
은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하셔서 그 반 아이들은 마치 군대에 온 것 같대. 호
호호."
“어머, 참 겁나겠다. 내일 그 반 친구들이 어떤 모습으로 걸을지 궁금해. “
나는 행진곡에 맞춰 팔을 앞뒤로 씩씩하게 흔들면서 걸어갈 6반의 모습을
그리며 혜주와 교문을 나섰습니다. 그 때, 우리 앞에서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
리를 찰랑이며 걸어가는 수향이가 보였습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수향이
는 5학년이 된 지금은 1반입니다." 수향아, 혼자 가니?"
“응, 서빈이랑 혜주구나."
수향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수향이는 엄
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 앞에 있는 기와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
다. 내가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수향이네 마당이 환히 보입니다.
넓은 마당 구석구석에는 수향이 할머니께서 가꾸는 상추, 파, 시금치 같은 채
소들이 초원을 이룹니다. 그래서, 가끔 머리를 식힐 때면 나는 베란다 너머로
마치 스파이처럼 수향이네 집을 힐끔거리며 쳐다봅니다.
“수향아, 내일 할머니도 오시니?"
“아니. 할머니께서 장날이어서 채소를 가지고 나가신다고 하셨어."
“그래? 그럼, 우리랑 같이 먹자. 혜주야, 넌 어떻게 할래?"
“좋아. 우리 엄마는 또 친구들이랑 잡수실 거야."
“나는 엄마를 오시지 말라고 할거야. 작년처럼 게임할 때 도망가시면 친
구들한테 또 망신만 당하니까 아예 오지 말래야지. 수향아, 그 때 너의 할머
니만 아니었으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
작년 소풍날은 너무 더워서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미리 도착해 있다가 땀방울을 흘리며 나타난 딸을
위해 얼음물을 주셨습니다. 참 고맙고 친구들 앞에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
습니다. 큰 병에 있던 물은 목말라있던 친구들이 모두 마셔버렸고 물을 마신
친구들은 어머니께‘고맙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에 연신 웃음을 흘리며 기뻐하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학급 대항 경기가 열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색깔의
종이로 만들어 놓은 곤충이나 꽃 모양을 뽑아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하는 게
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호각 소리에 맞춰 신나게 달려가서 매미를 잡아 왔습니다. 종이
를 펴들자,
‘엄마와 함께 춤을’이라고 씌어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문구
를 큰소리로 세 번 외치고 엄마를 찾으려는 순간, 하늘로 뻗어있는 소나무 사
이로 뚱뚱한 몸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엄마가 보였습니다.
“엄마-"
나의 애타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

었습니다. 우리 반 친구들은 괴성을 질러댔습니다. 차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눈에는 우박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 선생님, 얼른 음악 트시우. 아까부터 엉덩이가 쑤셔서 혼났는데 지가 쳐
보겠수."
라고 말하며 수향이 할머니께서 사람들 틈을 헤쳐 나오셨습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아 끌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빠른 리듬의 음악
이 흘러나오는데 할머니의 입에서는 느린 타령이 상관없다는 듯이 쏟아져 나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내 손을 더 꽉 잡으시고 놓으시더니 힘이 부치다는 듯이 이
제 그만하겠다고 손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늘어서
있던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며 손뼉을 쳤습니다.
그 날 이후로 수향이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향이
에게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그처럼 빠르
게 달릴 수 있다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멋쩍어졌습니다. 어느 새 아파트 정문에 다다랐습
니다. 다시 한 번 수향이와 점심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덧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이미 지난밤에 어머니와 가지 않겠다고 경
고를 해놓은 터라 점심 도시락과 물만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안방 앞에서
엄마 불렀습니다.
엄마는 기척도 안 합니다. 아버지도 물론 그림자도 안 비칩니다.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가만히 안방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가
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는 방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녹아 있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처럼 호흡을 멈추고 살금살금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이불을 젖혔
습니다.
그러나, 침대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비워 둔 자리처럼 온기조
차 없었습니다. 장롱을 열어 보고 화장실을 열어봐도 두 분은 보이지 않았습
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은 발랑발랑 뛰었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
리고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화장대 거울 앞에 쪽지가 붙어 있었습

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엄마가 너의 소풍에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아빠랑 여행을 떠난다.
장소는 말하지 않을 테니 식탁 위에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가렴. 점심은 학교
로 가다가 제과점에서 빵이랑 우유를 사서 가지고 가렴. 엄마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학교에 왔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밝은 얼굴
로 운동장에 짝을 지어 모여 있었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붉은
해는 온 세상을 다 구워낼 정도로 열을 뿜어댑니다.
드디어 출발했습니다. 학교 뒤로 펼쳐진 언덕을 넘어 걸으면 소리가 쿵쿵
거리며 난다고 이름 붙여진 쿵쿵산으로 향했습니다. 바람도 없는 길을 끝없
이 걸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땀이 옷을 적시며 흐릅니다. 잠시 쉬는 동안 집
에서 가져온 물을 조금만 남기고 마셨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가지만 나는 노래 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습
니다. 걷는 것도 힘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아침에 하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아빠도 이해가 안됩니다.
누가 먼저 여행을 가자고 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소
풍을 가는데 배웅을 안 해줄 수가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서빈아, 어디 아프니?"
“응? 아니야.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너무 더워서 걷는 게 힘들지? 서빈아, 우리 가지 말고 여기서 점심 먹고
놀까?"
“선생님께 들키면 어쩌려고? "
“선생님은 몰라.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전부 몇 명인데? 모두 가고 나서 여
기서 놀다가 소풍 장소로 가는 차가 오면 얻어 타고 가자."
“……."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참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일로
기분이 상했는데 혹시 선생님이 알게 되어 벌이라도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
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혜주야, 그냥 가자. 조금만 더 힘내지 뭐."
“아유, 이 겁쟁이."
어느 덧 넓은 운동장 같은 솔밭에 도착하였습니다. 땀이 흘러 겨드랑이가

촉촉이 젖었습니다.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는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 했습니다. 그늘이 드리워진 잡풀 사이로 엄마와 아빠
가 얼굴을 내밀며 빙그레 웃고 계셨습니다.
아빠는 병 속에서 채 녹지 않은 물병을 들고 흔드셨습니다. 아빠가 병을
흔들 때마다 병에 붙어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별처럼 떨어져 풀밭에 내려앉
았습니다.
나는 메고 있던 베낭을 벗어 던지고 두 팔을 벌린 채 아빠의 품속으로 뛰
어들었습니다. 아빠가 들고 있던 병 속에서 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나의 걱정
과 오해를 말끔히 씻어 주려는 듯 얼굴 위로 미끄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