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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2000년 [수필-강호삼] <갈뫼>동인지와 함께30년-동인지 <갈뫼> 30집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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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1건 조회 2,952회 작성일 05-03-3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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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뫼>동인지와 함께30년
-동인지 <갈뫼> 30집 출판에 즈음하여-

사람 나이 서른이면 장년이다.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해서 일가를 이루고 재
미나게 살 나이다.
<갈뫼>동인지가 1969년에 첫 창간호를 발간했다. 햇수로 따지면 삼십 일
년이 되었으나 중간에 한번 재정난으로 책을 내지 못해 이번이 30호가 된다.
사람의 나이에 비교하면 <갈뫼>동인지의 왕성한 활동은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지방에 있는 소도시에서 동인지가 30호까지 꾸준하게
발간된 일은 매우 드문 일에 속한다. 동인들의 문학에 대한 부단한 열정과 의
지와 함께 지역사회의 뜻 있는 사람들의 성원이 <갈뫼>의 오늘과 속초 양양
고성에 문화와 예술을 있게 한 셈이다.
성원을 주신 분들과 단체를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면, 우리 나라 의료
계의 큰 별이면서 여든을 넘긴 연세에도 아직 현역이신 이기섭님과 동문성
속초시장, 최용문 문화원장, 장창영씨와 의정부에서 병원을 열고 있는 윤광
진씨, 단체로는 속초시, 신흥사, 설악관광주식회사, 낙산사 등 이 밖에도 많
은 사람들과 단체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정적으로 빈약
한 지역사회에 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동인지<갈뫼>가 오늘에 이르기까
지 매우 힘이 들었을 것이다.
며칠 전, 강릉에서 속초로 오는 승용차 안에서 오갔던 대화가 새삼스럽다.
승용차는 필자가 운전하고 있었다. 차안에는 전날 필자와 함께 서울에서부터

동행한 이화국시인과 소설가 김성숙씨, 그리고 속초에서 편승한 윤홍렬 회장
이 함께 타고 있었다. 서울에서 갑자기 속초에 오게 된 것은 시인 이구재 동
인의 부군이 별세했다는 부고를 받고 저녁 녘에 속초에 도착해서 이튿날 고
인이 안치된 강릉 아산현대병원에 조문을 갔다가 속초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자연스레 동인지 <갈뫼>의 30호 기념행사에 관한 것이 화제가 되면서 세
월의 무상함과 지난 30여 년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이야기 끝인
지는 확실치 않으나 뒷자리에 앉았던 김성숙씨가 갑자기 앉았던 자리에서 앞
좌석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반만큼 일어나 윤홍렬 회장의 귀 가까이 바싹
입을 갖다대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회장님! 저 있잖아요. 요즘 저는요, 허리도 아프고 온 몸이 욱신거리면서
힘이 들어 죽겠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저도 인제 늙나 봐요.>
듣기에 따라서는 대단한 망발일 수밖에 없다. 여든을 바라보는 어른 앞에
서 이제 쉰도 안된 젊은(?) 여자가 늙는 타령을 하다니. 그러나 윤회장은 그
저 잔잔하게 얼굴에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세월이 그만큼 지났음을 일부러
우회해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김성숙씨의 방자한(?) 애교를 윤회장도 모
를 리 없었으리라. 김성숙씨의 기발한 말솜씨에 이화국씨도 웃고 필자도 웃
었다.
1969년, 문학을 위해서 명태와 오징어 산지로만 전국에 겨우 그 이름이
알려졌던 이곳 속초에서 결성했던 우리의 모임이 이제 서른 한 해가 지나면
서 그때 갓 스물의 아름답고 꿈 많던 문학소녀 김성숙씨를 허리도 아프고 갱
년기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세월이 흐른 것이다. 당시 동인들 가운데서
가장 막내였던 김성숙씨는 동인지 <갈뫼> 3호가 출간될 무렵 우리 <갈뫼>의
문학동인이 되었다. 필자는 그 때 김성숙씨의 앳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속초의 설악신문 발행인으로 있는 이상국 시인과 갯배를 건너 축항으로
산책을 나갔던 길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갯배를 건넜을 때 바다에는 일찍부
터 흰 파도가 일고 있었고 빗방울이 바람결에 섞여 떨어지고 있었다. 내친 김
이어서 무인등대까지 가보기로 하고 천천히 걷고 있는데 무인등대 쪽에서 베
이지색 레인코트에 금색 커다란 무늬가 있는 화사한 스카프를 머리에 쓴, 한
껏 멋을 부린 아가씨가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아닌 김성숙씨였
다. 얼마나 감상적이었으면 비바람 부는 날 혼자서 바닷가로 나왔을까. 그땐
그런 나이였다. 이제 나이 들어 웬만한 흉허물이 없어진 지금, 가끔 김성숙씨

를 만나면 그 때 일이 생각나서 놀려먹곤 한다.
<대체, 그 비바람 부는 날 그렇게 멋을 부리고 혼자서 무슨 청승을 떨려고
거길 갔었어?>
<아이! 선생님은 언제까지 절 그렇게 놀리실 거예요.>
김성숙씨, 눈을 흘기긴 하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우리는 그
런 농담을 통해서 한 시대를 같이 한 동질 감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우정을 다
지는 것이기도 하다.
동인 결성 초창기 14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였으나 10호 이전부터 참여한
1세대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윤홍렬, 박명자, 이성선, 최명길, 필자,
그리고 곧이어 참여한 김종영, 이상국, 이은자, 고형렬, 유연선, 이충희, 김춘
만, 박용렬, 이희갑, 김성숙, 이구재 등이 있고, 이후 갈뫼 2세대들로 탄탄하
게 동인지를 만들어가게 했던 장승진, 채재순, 최재도, 지영희, 이화국, 김영
준, 최영숙, 김송희, 김영섭, 사상철, 권정남, 김영미, 서귀옥, 장선옥, 김종
헌, 최월순과 근년에 입회한 박응남, 김향숙씨가 있다.
<갈뫼>동인의 1세대들 중에 몇 사람은 그런 저런 연유로 도중에 동인 모
임을 떠났다. 동인 결성 당시 나이들은 20대에서 40대로 참으로 혈기방장 했
었으나 삼십 일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이 50대에서 70대가 되었고 직장을 가
졌던 동인들은 현직에서 떠났다. 윤홍렬 회장은 이미 십여 년 전에 교직에서
정년 퇴임하셨고 근년에는 박명자, 최명길, 이성선씨가 교직에서, 필자가 기
상청에서 정년 1,2년을 남기고 명예퇴직이라는 것을 했다. 그 동안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했고 보람도 있었다. <갈뫼>동인 출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전국적으로 문명을 드높이고 그 동안의 각 지면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묶어
시집을 출판한 사람이 많다.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영북의 지역사회를 <갈뫼>
동인이, 설악문우회가 선도해 온 셈이다.
이제, 더욱 마음 든든한 것은 <갈뫼>동인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비교적(?)
젊은 문인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참여가 그것이다. 이 분들이야 말로 이 지역
의 다음 세대 문화를 이끌어 갈 보루들이다.
이 글을 맺으면서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조직과 사회이던 그 조
직과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의 역할이다. 처음 <갈뫼>동인조직에 필자도 직접
참여하고 힘을 보탰으나 윤홍렬 회장의 헌신적인 기여가 없었다면 동인지<
갈뫼> 30호라는 지역사회에서의 기념비적인 업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이제 30대 장년으로 뿌리를 내린 <갈뫼>를 부끄럽지 않게 더욱 가
꿔가고 이효석. 김유정과 같은 문인을 배출케 하여 전국적으로 이 지역을 자
랑스럽게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은 순전히 이 지역사회를 이끌어 가는 뜻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끝>
<2000년 11월14일. 동진리조텔의 집필실에서 동해의 일출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