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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2001년 [산문-강호삼]나그네의 감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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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141회 작성일 05-04-0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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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8월 몽골리아와 러시아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정확하게 말
하면 몽골리아의 울란바트르와 러시아의 이르크츄크를 여행하고 왔다.
울란바트르는 몽골리아의 수도이고, 이르크츄크는 바이칼 호수를 끼고
있는 러시아의 동부 요충 도시이다. 시베리아 철도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
다. 귀국하고서 북한의 김정일이가 기차로 이르크츄크를 경유해서 모스
크바를 갔다가 왔다는 보도를 들으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도
시 하나가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과 함께 내 기억 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와
서 자리를 잡았다.
몽골리아와 러시아의 여행은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다. 불과 3개월 전,
집사람과 같이 미국의 인디아나에 있는 퍼듀 공대에서 유학중인 둘째를
만나기 위해 L.A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워싱톤을 거치는 40여일 간의
긴 여행을 하고 돌아 온 터였다. 여행의 피곤도 덜 풀린 상태이기도 했지
만 무엇보다 기본경비만 해도 200여 만원이 넘는 여행경비가 만만찮아,
같이 여행을 떠나는 일행들의 면면들이 좋고 미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
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최측에서 색다른 제의
를 해 왔다. 같이 가면서 일행들의 사진 촬영을 해주면 경비의 일부를 충
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취미 삼아 20여 년, 캠코드와 디지털 카메라를 조작하긴 했
지만 내 사진 기술이라는 게 그냥 취미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더구나 사
진값이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 여러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주긴 했었다. 재료비가 만만찮지만 잘 찍힌 사진은 본인에게
우송하거나 만날 일이 있으면 가져 나가 건네주면 그 때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보고 즐거워하는 상대의 모습이 덩달
아 보기 좋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진과 비디오 테이프를 그냥 주기만 했을
뿐이다. 개중에는 공짜로 받는 다는 것에 미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걸 미안해서 어쩌지요. 사진 값을 드려야 할 텐데…
-사진 값요? 그거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 제게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
한 적 있으세요. 그리구 전 사진 찍어서 밥 먹는 사람도 아니 구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충분한 사진 값 받았습니다.
- ………?
무슨 영문인지 몰라 상대방의 눈이 둥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굳이 장황한 설명을 피한다. 비록 현금을 받지
는 않았을망정 참말로 사진 값을, 그것도 후하게 받고 있었다. 전혀 기대
하지 않았던 사진을 받고서 즐거워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
쁘고 즐거웠던 것이다. 그야말로 이것이면 사진 값에 가름하고도 남는 것
이다. 그리고 또 부수되는 것이 있어 더욱 좋다. 다음에 다시 만나는 상대
방의 넉넉한 미소와 호의가 그것이고 상대가 여자일 경우에는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시게 되는 수도 있다.
얼른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내게 주최측은 한마디 덧 붙였다.
-절대 강 선생님을 난처하게 해드리지 않을 테니 저희가 하는 대로 잠
자코만 계십시오. 그리고 여행준비나 해 주시고요.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나도 여행을 같이 떠나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되
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출발하는 날, 나는 일행들과 같이 떠나지 못했다.
일행보다 하루 먼저인 8월 14일 오후 2시, 인천 공항에서 몽골리아 항공
편으로 울란바트르로 떠났다. 일행은 모두 43명이었는데 당일 국적기에
좌석이 모자랐던 것이다. 일행중 수필을 쓰는 여류 한 분과 두 사람이 하
루 먼저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지의 도시로 두 사람만 떠나는 여
행…? 뭔가 분위기 따라서 역사가 이루어질 것만 같은 호기일 수도 있었
지만 막상 출발하는 날까지 나는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조차 알지 못
했다. 그저 일행 중 나와 같이 하루 먼저 출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
었고 출발 전 공항에서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인천공항에서의 여행은 처음이어서 일찌감치 집을 떠나, 12시경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새로 건설된 고속도로와 현대식으로 잘 건설된 널찍한
공항청사가 외국의 어느 공항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
했다. 그러나 인천공항을 건설하면서 공사수주를 둘러싼 로비에 청와대
비서도 한몫 했다는 소식이고 보면 씁쓸하다 못해 자꾸만 이 나라가 어디
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두웠다. 삼십 여 년 간이나 군사독
재정권의 무자비한 군화 발에 짓밟혀 신음하다가 겨우 민주정부를 수립
한 나라에 다시 몰염치하고 더러운 정치인들의 정쟁과 부패한 공무원들
의 보도로 날이 지고 새는 나라, 조국의 안보마저도 일 개인이나 정치 집
단의 패권 다툼에 이용되는 나라. 이런 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이 나마 나라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은
대다수의 양식 있는 국민들이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 일 없이 공항 내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가 햄버거 하나와 콜라 한
컵으로 공복을 채웠다. 그리고 몽골리아 항공의 탑승 카운터로 가서 나와
같이 하루 먼저 출발하게 된 사람이 어느 사람일까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나와 일행이 될 사람이 여류라는 것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못
했다. 너무나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럴듯하게 짐작되는
남자만 찾았으나 좀처럼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상대방도 나를 찾고
있을 터인데 탑승 수속을 끝내고 보안구역에 들어서서도 두 사람의 만남
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몽고의 울란바트르 공항까지 3시간 반쯤의 비행
시간 내내 이리저리 기내를 살폈지만 끝내 동행으로 보이는 여행객을 찾
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는 좌석 수 120, 보잉 727 소형 제트여객기였지만
국제선을 비행하는 비행기의 청소상태가 좋지 않아 바닥이고 창문이고
할 것 없이 때가 묻어 더러웠다. 비행기가 몽고 것인 만큼 비행기 안의 승
객은 몇 사람만 빼 놓고 대부분이 몽고 사람들이었다.
몽고로 가는 비행기편은 대한항공의 국적기와 같이 몽골리아 항공도
일주일 두 번, 모두 네 편이 있어 소련의 붕괴와 함께 국교가 시작된 짧은
기간치고는 꽤 왕래가 잦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고 사람들은 불법
체류자를 포함해서 우리나라에 약 25,000여명이 3D 직종에 종사하는 것

으로 파악되고 있다. 몽고의 영토는 남북한 면적의 일곱 배, 그러나 대부
분이 사막이거나 일년에 2,3개월 동안만 풀이 자라는 초지로 이루어져 있
고 겨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섭씨 50도의 극한의 기후에 인구는 250만 정
도, 생산품이란 1차 산업인 말과 소와 양을 기르는 축산업이 전부이고 지
하자원은 무진장이지만 개발할 능력이 없는 국민소득 연 600달러 세계
최빈국의 하나다. 짧은 수교 기간과 아직도 공산당이 집권당인 몽골리아
지만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
는 것이 우리나라에 그들의 취업자가 2만5천 여명이나 되는 만큼 몽고의
어느 가정이고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취업자가 한 사람씩 있다는 계산이
고 그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모양이다. 현지에 가서 알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나라에 취업하고 귀국한 사람들은 몽고에서 부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선망은 절대적인 모양이어서 우리나
라를 가리키는 이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솔롱고스>
몽고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말의 의미는 무지개가 뜨
는 동방의 꿈의 나라라는 것이라 한다.
인천공항에서는 끝내 나와 같이 먼저 떠나게 된 동행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울란바트라 공항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만나게되리라 생각했다.
비행시간 네시간 정도, 울란바트르 공항에 도착, 비행기에 내려 도착 출
구로 나오자 내 이름이 쓰여진 팻말을 들고 있는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에서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디도>여행사의 한국인 직원이
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이드는 검게 탄 얼굴과 아무렇게나 입은
차림새로만 보면 현지의 몽고인들과 얼른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몽고
화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곧장 주차장으로 가서 나만 차에 태우고 공항
을 떠났다. 차에 올라 가이드에게 물었다.
-나 말고도 한 사람 더 일행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아! 예에, 선생님 혼자십니다. 같이 오기로 되었던 여자 분은 내일 오
는 비행기편에 좌석이 생겨서 일행들과 함께 오시기로 되었습니다.

일행이 될 번한 사람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진즉 여자
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마음이 설레기도 했으련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지만 하마터면 먼 이국의 몽고에서 같이 하룻밤을 지낼 번했던 사람이 동
성이 아니고 이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묘하게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일이 순조로웠다면 역사(?)를 창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고백컨대 정말로 나는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이드의 말을 듣고 <나와 일행이
될 번한 사람이 여자였구나> 라고 만 덤덤히 생각했을 뿐인데 엉뚱한 가
정은 이튿날 몽고 러시아 여행 팀의 본진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호텔로 가면서 차창 밖으로 비치는 몽고의 수도 울란바트르의 거리 풍
경은 다시 보는 60년대의 서울 풍경처럼 을씨년스럽고 초라하게 내게로
다가왔다. 색이 바래고 허물어진 낡은 건물과 먼지가 풀 풀 날리는 거리.
영양부족의 누런 얼굴에 산발한 아이들과 개피 담배와 초콜릿과 보잘것
없는 과일을 소중하게 진열해 놓고 팔고 있는 가판대의 모습들에 마음이
아파 왔다.
우리의 경우, 이제 밥걱정 하지 않고 살만하게 되기는 했으나 저들처럼
우리도 초라했던 한 시절이 불과 40여 년 전에 있었다. 가난과 굶주림을
모르고 자란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 어려웠던 시절을 을사보호조약이니
한일합방이니, 815해방과 625동란과 419와 516군사 쿠데타처럼 그저
역사의 한 장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처럼 한반
도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전쟁의 위험은 상존해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위험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는 굴욕스럽도록 저들
을 달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고 현실이다.
-저 건물이 국회의사당이고 그 옆쪽이 몽고의 국립대학입니다. 그리고
의사당 앞쪽에 있는 저 사각형 구조물이 몽고의 독립 영웅의 무덤입니다.
내가 새롭게 알게된 과거 공산주의 국가의 공통점은 그들의 영웅들 무
덤이 한결 같이 시내 중심가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 소련의 레
닌 묘와 스탈린. 중국의 마우져뚱. 북한 금수산의 김일성과 비에트남의

호지명의 무덤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죽어서도 포르말린이나 화학약품에
절여져 그들의 인민들에게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하룻밤을 지내게 될 호텔은 울란바트르 시내에서 자동차로 20
분쯤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과거 공산당 간부의 휴양시설이었다고 한다.
공산당 시절의 당 간부들이 사용했던 휴양시설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
이다. 러시아의 이르츠크에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 역시 과거 소련시절에
공산당 당간부들의 숙소였다.
호텔이 위치한 곳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가파르고 한적한 산기슭
이었다. 호텔 앞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몽고의 전통 이동식 가옥인 <겔>이
십 여 채 조성되어 있었으나 주위에는 다른 부대 건물이 없었다. 그저 높
은 민둥산을 배경으로 하고 벽을 바른 시멘트가 떨어져 나와 안에 쌓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칙칙한 호텔 건물만 있었다.
호텔 현관으로 들어서자 바로 접수구가 보였고 흰 블라우스에 까만 조
끼, 역시 까만 타이트 스커트를 입은 검은머리가 풍성하고 눈이 파란 젊
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몽고 여자가 아니고 러시아 여자였다. 사전 지식
이 없는 나는 몽고의 호텔에 원 러시아 여자인가 하고 의아했으나 뒤에
설명을 듣고 알았다.
몽고라고 하면 소련보다는 같은 아시아계 민족인 중국과 더 가까울 줄
로만 알았던 선입견 때문이었다. 한 때 세계를 정복하고 중국에 원 나라
를 세웠던 몽고족들은 원나라가 망하자 중국인들에게 쫓겨 북쪽으로 밀
려났고 상대적으로 쓸만한 땅인 내 몽고는 중국에 빼앗겼다. 구 소련 역
시 바이칼호 유역의 광대한 몽고 땅을 자기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으나
몽고는 같은 아시아계 종족인 중국 쪽 보다 구 소련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울란바트르 시내의 건물들과 화력
발전소를 비롯한 모든 기간 시설들이 소련인 기술자들에 의해 건설되고
설계되었고 지금도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듯
이 보였다. 문자가 없었던 몽고인들이 자신들의 말마저 러시아 어로 적고

몽고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신문도 러시아 글자로 제작되고 있었다.
한 때, 세계를 지배하고 강력한 대 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인들이 오늘날
이처럼 밀려 난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문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어, 새삼 우리에게 한글을 만들어 반포한 세종 임금
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와는 구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하고서 국교를 맺었다. 그리
고 김대중 대통령이 국빈으로 몽고를 방문하고 이어 몽고의 대통령이 우
리나라를 다녀감으로써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두 나라간의 민간인 교류
도 활발해 지고 있는 모양이다. 몽고에 있는 우리나라 교민이 울란바트르
를 중심으로 약 250명 정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
분은 기독교 전파를 위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인 모양이다. 세계 각처에서
각종 종교라는 이름으로 위대했던 성인의 가르침은 없고 서로 적대시하
면서 종파와 종교간에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테러와 전쟁을 생각하
면서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몽고인들의 종교는 절대 다수가 티벳 불교인 라마교라고 한다. 라마교
사원에 가서 우리의 법회와 비슷한 의식을 보았는데 승려들이 노랗고 붉
게 물들인 장삼과 가사를 걸치고 나발을 불고 범패와 북을 울리면서 행하
는 의식이 참으로 어리둥절하도록 요란스러웠으나 한갓 지나가는 나그네
가 그들의 심성 깊이 자리 잡은 신앙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우리 선교사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제발 이 땅에만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충돌이 없었으
면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가까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학교와 공공 장소에 세워진 국조 단군 상의 머리를 잘라 버리는 일이 생
겨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세계적인 문화 유산인 불상을 파괴하는 행위
가 저질러졌고 중동에서는 종교전쟁이 한창이다. 급기야 미국의 뉴욕과
워싱톤이 이슬람의 테러 조직에 의해 파괴되고 수 천명의 인명이 순식간
에 죽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종교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거짓말처럼 소박하고 단순한데도 인간들의
탐욕스러운 이기심이 제 멋대로 다른 해석을 해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선교 활동도 좋지만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경제
원조가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 이렇게 가난하게 사
는 국가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올해도 식량이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이 굶
주리란 북녘동포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자기 국민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하는지 모를 일이다. 인간의 이기심
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를 참으로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