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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2년 [꽁트-김석록] 통북어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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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62회 작성일 05-03-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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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북어구이

이른 아침부터 추적추적 듣던 가을비가 단단히 닫아걸었던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벌써 며칠째였다. 구름과 바람과 낙엽과, 목마른 햇빛과, 무엇보다 넘쳐나
는 가을의 열정을 어쩌지 못해 길거리에라도 나서야 하는 여자들에 대한 호기
심, 온몸 가득 도지기 시작한 갈증을 단번에 날려 주는 맥주에 대한 그리움.
그보다 더 풍요한 가을걷이들을 애써 외면했던 것은.
그러나 그 날만큼은 달랐다. 그때마다 다잡았던 마음은, 물결이다 못해 파
도로 흔들렸다. 일어났다 앉았다, 담배를 물었다 커피를 마셨다 도무지 가라
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하여 무언가 좋은 일이 닥칠 것만 같은 예감마
저 따라나와 더욱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안방이나 거실을 오가며 밖을 내다본 것도 벌써 수십 번이었
다. 말할 것도 없이, 들여다보다는 안에 대한 지향(志向)이며 내다보다는 밖에
대한 지향이었다. 더 머뭇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아이들이 돌아
올 시간에 앞서 아파트를 나섰다.
이미 가을비는 속살을 드러내지 않은 하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아
직 갈 길을 정하지 못한 낙엽들이 바람 따라 남자의 발길을 이끄는 것만 같았
다. 아파트 정문까지 가을처럼 걸어가던 남자는 문득 발길을 되돌렸다. 차를

놓고 가을 속으로 뛰어들려던 생각을 접고, 남자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여차하면 차를 두고 온다 해도 가을 탓이며, 또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가을은 안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큰길로 접어들자 더
한 낙엽과 더한 여자들이 파도를 이루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나를 따
라 오세요, 하고 속삭였으며, 추켜세운 외투 깃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스카프
가 당신의 입술을 원해요, 하고 와락 달려들 것만 같았다. 가을 탓이었다.
정말, 가을이 있기는 있었나. 그러다 보니 봄 가을 중에서도 부쩍 짧아진
가을 최신판은 별로 기억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가뜩이나 짧은 겨
울에 길거리에 나서 서두를 일도 딱히 없었다. 결국은 가고야 말 가을을 되도
록 느리게, 오히려 이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즐기면 그만이었다. 남자는 더더
욱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 땅에서 얻어낸 단 하나의 면허인 그놈의 운전면허
증도 아직은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강변도로를 지나 여의도로 접어드는 로터리는 가을답지 않게 복잡했다. 그
러나 군자는 대로 행이라, 역시 남자에게는 큰 길이나 복잡한 도로 사정이 오
히려 해될 게 없었다. 취소된 면허에 오히려 득이면 득이었다. 남자는 낙엽이
움직이는 대로 차를 몰았다.
어떻게 보면, 여의도는 남자에게 여름과 겨울을 함께 경험하게 만든 땅이
었다. 남자는 여의도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모래 섬
이 금융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듯이, 남자도 여의도에서 꽤나 자신의 입지를 키
웠다. 두 가지가 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물론 아니었다.
한창 때만 해도 남자는 직장생활을 나무 오르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잘 나가는 사람에게 승진은 더욱 그러했다. 나무에 먼저 오르는 사람처럼 허
무한 인생은 없다. 뒤따라 오른 사람에 밀려 나무 끝까지 밀려나게 되고, 나중
에는 나무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다. 또 나중에 오르는 사람은 중간에 다닥다닥
붙은 두터운 사람 층에 막혀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당히 빠르
게, 더 좋게는 처진 빠르기가 으뜸 중에 으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여의도에
서 터득한 일종의 직장 철학인 셈이었다.

물론 여의도에서 남자가 이른 나이에 나무 끝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따
지고 들면 강원도 마음 때문이었다. 흔히 쓰는 농심이나 땅심이라는 말처럼,
남자는 곧잘 강심(江心)이라는 말로 강원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속초에 이웃
한 남자의 고향을 빗대어 동료들은 남자를 속물(俗物)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한자어를 잘못 알아서 그렇지 오히려 속초의 물건이라는 풀이가 정답이었다.
그러니까 적당한 속물, 강원도 마음의 대표 격인 남자의 승승장구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철학이나 강심은 역시 수학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때 이르게 남
자는 낙엽으로 물들었으며, 구차하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마음도 아니었다.
남자는 스스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며칠, 또 며칠 전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에 겨울을 자초한 것은 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을 탓이었을까.
마포대교를 지나자 불교방송은 코 앞이었다. 다음 골목으로 들어서 적당히
차를 대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무슨 그쯤으로 약속시간에 늦을 남자
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나치는 도심 속 그녀의 스카프가 전보다 더 원색적
으로 다가섰다. 목에 걸친 스카프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마
지막 한 잎 속옷처럼 눈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정말 가을 햇빛처럼 그녀 뒤를 따를 뻔 하였다. 그러나 거기가
바로 약속장소였다. 남자는 또 낙엽과 헤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갈 길 없는 낙
엽은 천지다, 남자는 생각을 다독거렸다.
친구와 마주앉은 남자의 눈에, 통북어구이는 한마디로 멋드러졌다. 국적
불명, 연도 불명의 마른안주나 딱딱한 오징어, 금싸라기 과일 따위와는 상대
도 되지 않았다. 가을이면 어떻고, 듬뿍 고추장을 바르지 않아도 또 어떤가.
오랫동안 여의도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북어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니.
친구도 끼리끼리라면, 입맛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무슨, 고향을 만
난 사람처럼 친구도 북어를 씹었다. 남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
았다. 고향은 달라도 속물이라는 계급 하나는 같다며 친구로 살아 왔는데, 근
성은 어쩌지 못하는가 보았다. 속물 근성이 그 말 아닌가.

글쎄, 그렇게 통북어구이를 몇 마리째 씹다 보니, 맥주병도 또한 암만이었
다. 작은 병도 아닌데, 벌써 홀수로 열 병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남자가 먼저 운을 뗄까 머리를 굴리던
판에 친구가 미리 자리를 펴고 나섰다. 영락없는 속물이었다.
가을에, 굶주린 여자가 있는데…….
다음 얘기는, 설령 내일 당장 겨울이 들이닥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을
을 탄다면 이미 몸과 마음이 두루 주려 있다는 의사표시나 다름없었다. 어디
봄의 허기와 가을의 허기가 따로 있으며, 봄이나 가을이 여자와 남자만의 전
유물은 더욱 아니지 않는가. 그런 주장은, 시대나 계절의 변화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것 참, 예감이 적중과 어울릴 때처럼 묘한 맛도 드물었다. 이 얼마만인
가. 남자는 나중 일을 생각해서 천천히 맥주의 맛을 즐겼다. 맥주 맛은 첫 잔
이라더니 한 모금씩 꺾어 음미하는 마지막 잔도 기가 막혔다. 한 점 남은 통북
어구이 조각마저 입 안에서 스르르 녹아 내렸다.
그때였다. 음악이 시끄러워 밖에 나가 전화를 걸겠다던 친구가 막 돌아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방송국에 무슨 일이 떨어졌는지, 버릇대로 친구는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이 가을에, 마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만 몸만 가면 된다며
등을 떠다밀었다. 그러면서 내일, 내일이라고 친구는 몇 번 힘을 주었다.
이런 속물.
가을 하늘 아래, 남자는 혼자 나섰다. 바람도 낙엽도 여전했다. 그러나 어
디에서도 그녀의 스카프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차를 돌려 남자는 다시 여의도 방향으로 들어섰다. 엷은 가을 햇빛이 숨바
꼭질을 하고 있었다. 길은 올 때보다는 많이 헐렁했다.
마포대교를 올라, 남자는 예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동네에
가서 한잔 더 기울이다 보면 가을밤도 깊어갈 것이며, 깊은 가을밤을 유난히
밝히는 그녀의 스카프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전에 없이 산뜻한 입
안에서부터 무언가 자신감이 넘쳐났다.
여의도 광장을 지나 차는 강변도로로 꺾어들었다. 급한 커브를 돌아 막 기

어를 바꾸려는 순간, 교통순경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벼락과도 같았다.
가슴이 낙엽처럼 내려앉았다.
아니다. 예감에 이런 장면은 없었다. 남자는 침착했다. 그리고는 교통순경
앞에 차를 세웠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차창을 내리라는 신호가 남자를 그렇
게 하도록 만들었다. 교통순경이 오른손에 든 종이컵을 남자의 입 가까이 들
이대었다. 시키는 대로, 남자는 숨을 내뿜었다.
낙엽은 낙엽이 아니었으며, 가을도 가을이 아니었다. 무면허 음주운전. 사
고만 아니었지, 갈 데까지 다 간 셈이었다. 가슴이 내려앉다 못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잠시 여의도를 저주했다.
예감이었나. 그랬다. 통북어구이였다.
잠시 순간적으로 놓았던 정신을, 교통순경의 한 마디가 일깨워 주었다. 마
침 차에서 내리려던 남자를 향해 교통순경이 경례를 붙였다.
약주를 안 드셨군요.
가을은 역시 가을인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