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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2년 [희곡-최재도] 화려한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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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977회 작성일 05-03-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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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장례식

<등장인물>
朴읍장 : 男. [나진군 청진읍] 읍장.
尹여사 : 女. [청진서점] 대표.
閔원장 : 女. [청진산부인과] 원장.
姜목사 : 男. [청진교회] 목사.
金부장 : 男. [청진백화점] 판매부장.
車여사 : 女. [청진화원] 대표.
대변인 : 男. 청와대 대변인.

<무 대>
마을회관이다. 임시로 만든 회의장, 등장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무대 한 쪽엔 별도의 공간, 곧 청와대 대변인실이 마련되어 있다.

<막이 열리고, 대변인실에 핀(pin) 조명 들어오면, 근엄한 표정의 대변
인이 발표문을 낭독하고 있다.>
대변인 : 대통령께서는, 금번 사고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셨습니
다. 탁월한 방송진행자인 최상갑 선생과 사회사업가로 명성이
높은 장혜림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회복할 수 없
는 국가적 손실’이며‘치유할 수 없는 사회적 아픔’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슬픔에 잠겨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신
후(→off).
<대변인 낭독 중 점점 조명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고
무대 조명과 전환된다.
무대 밝아지면, 박읍장이 주재(主宰)하는 토론장. 이미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윤여사 : (흥분하여) 그건 말도 안돼요!
박읍장 : (제지하며) 아, 아, 윤여사님. 차분히, 끝까지, 제 말씀을 들으신
후에.
차여사 : 들을 말이 뭐가 더 있겠어요? 읍장님께서는 우리가 뭐, 생각도 없
고, 자존심도 없는 사람으로 아시는 모양이죠?
윤여사 : ‘그런 추악하고 뻔뻔스런 사람들을 어떻게 우리 마을에 받아들
일 수 있겠느냐!’우리 모두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던 것이
불과 반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상황이
바뀐 겁니까? 사회장(社會葬)으로 해야 한다고요? 우리보고 장
례위원이 되라고요?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왜 우리가 저들
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저들이 우리의 영웅이 되
어야 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단지 바람둥이일 뿐이에요. 그
래서 이 마을까지 쫓겨왔던 거고, 그래서 이 사회에서 매장되었


던 겁니다. 그런데도-.
박읍장 : 아, 아. 윤여사님, 윤여사님. 그렇게 흥분하지만 마시고, 여기는
어디까지나‘토론의 장’이니만큼,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으시면
서.
윤여사 : 좋습니다. 읍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얘기하겠습니다. 제 의견에 분명한 찬반 의사를 밝혀
주세요.
차여사 : (촐랑대는) 예, 그래 주세요.
윤여사 : 반 년 전, 그 사람들이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올 무렵, 그때를 여러
분은 분명히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
와 함께 살게 된다면, 자녀 교육은 어떻게 되겠으며, 남편들 바람
기는 무슨 명분으로 잠재우겠느냐!”우리 모두가 그렇게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랬었죠?
장목사 : 그랬죠. 정의가 무너지고 윤리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 아니겠소!
윤여사 : 그렇습니다, 목사님. 실제로 지난 반년간 그들로 인해 우리 마을
은 정의가 무너지고 윤리가 파괴되는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차여사 : 애당초 그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발을 디뎌서는 안될 사람들이었
어요.
윤여사 : 방송 사회자로 명성을 떨치던 최상갑, 그 알량한 인기를 이용해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던 인물임은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
었습니다. 재벌기업 대표의 젊은 부인이었던 장혜림, 그 여자도
이혼 전부터 잦은 스캔들로 3류 잡지의 가십난을 메웠던 사람이
에요.
차여사 : 그럼요. 아, 아들 유전자를 감식해 보았더니 본 남편 아이가 아니
더라는 것 아녜요. 그 때문에 이혼을 당한 여자인데, 그런 사람과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있겠어요?
박읍장 : 아, 아. 물론, 그때는 그랬었습니다. 마을 이미지가 흐려질 것을
우려해서, 저를 포함한 마을사람 대부분이 입주를 반대했었습니
다. 하지만 이미 반년동안 우리 지역 주민으로서 우리와 고락을
같이 했고, 또 고인이 된 이 마당에 그 분들을 더 이상 미워할 이
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김부장 : 저는 읍장님 의견에 찬성입니다. 저들의 장례를 우리 읍내 사회
단체와 주민들이 합동으로 치르자는 읍장님 의견은 대단히 타당
성이 있습니다.
박읍장 : 아, 예. 김부장께서도 의견을 말씀해 보시죠.
김부장 : 저는 저들이 이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저들을 환영하고 옹호했던
사람입니다. 모름지기‘사랑’이라고 하는 것은‘인간의 법’이전
에‘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권한’입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자유 의지입니다.
장목사 : 그건 그렇지.
김부장 : 그럼에도 단지 사회의 법을 어겼다고 그렇게 따돌리는 것은 대단
히 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 우리 마을의 이미지를 오히려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었습
니다. 그 소신은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들의 장례식을
온 읍민이 함께 거행한다면, 우리 마을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인식을 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읍장 :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윤여사 : 그때 김부장께서 찬성하셨던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요.
차여사 : 맞아요. 다른 속셈이 있어 그랬던 거 아녜요?
김부장 : 속셈? 무슨?
윤여사 : 제가 다른 경로를 통해 들은 얘기인데, 그때 김부장께서는 판매
촉진 전략의 일환으로 저들의 입주를 적극 찬성하신 거라면서요,
아닌가요?

김부장 : 판매 전략이라뇨?
윤여사 : 저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 이 청진읍 주민들의 소비심리를 크
게 부추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거죠. 그래서 청진백화점에
서는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당시의 '입주 반대 운동'을 저지했던
거 아니겠어요?
김부장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들하고 판매량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매사 우리 백화점
매출액과 연결해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윤여사 : 지난 반년동안 우리는 청진백화점측의 교활한 상술을 지켜보았
어요.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장혜림이에게 고급 옷 몇 벌을 선물
하는 것도 그 전략의 하나였어요. 그래서 장혜림이가 그 옷을 입
고 거리에 나서면 즉시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순식간에 유행시
켰죠. 숫제 장혜림이를 동원해서 싸인회까지 열지 않았던가요?
그게 다 청진백화점 판매부 김부장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었
죠?
김부장 : 아,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민원장 : 이것보세요, 윤여사님. 우리는 지금 백화점 판매전략을 논하고
있는 게 아니라, 최상갑과 장혜림의 장례식 문제를 의논하고 있
는 중이란 말이에요. 왜 자꾸 본말을 전도시키는 거죠?
윤여사 : 오호. 원장님. 드디어 입을 여셨군요. 원장님이야말로 켕기는 것
이 있어 그러시죠?
민원장 : 캥겨?
윤여사 : 드리기 좀 거북한 말씀이지만, 원장님은 이 읍내 사람들이 윤리
적으로 혼탁해지기를 은근히 바라시는 거죠?
민원장 : 뭐라구? 이것보세요, 윤여사! 말씀을 그렇게 함부로 하셔도 되
는 거예요?
윤여사 : 아닌가요, 그럼?
민원장 : 지난 번 망발에도 내가 참고 있었더니, 정말 더 못 봐주겠군요.

윤여사 : 망발이라니, 내가 뭔 망발을 했다는 거예요?
민원장 : 윤여사께서 낙태수술 반대론자라는 것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주
장을 펼치는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인신공격은
구별해주기 바래요.
윤여사 : 인신공격?
민원장 :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자신이 교양없음을 함부로 드러내는
일은 본인에게도 도움이 안될걸요.
윤여사 : 교양이 없다고요, 내가?
민원장: 지난 번 지방방송에 출현했을 때 말예요. 우리 산부인과를 일컬어
“살인을 하고 벌어들이는 수입”운운하지 않았나요?
윤여사 : 아닌가요, 그럼?
민원장 : 인격적으로 대꾸할 가치가 없어 그냥 꾹 참았어요. 오늘 이 자리
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죠. 우리 산부인과야말로 이 읍내의 도덕과
가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예요. 어쩌다 저지른 실수도 감쪽같이
지울 수 있고, 말못할 고민도 말끔히 해결 할 수 있는 곳이죠. 우
리 병원덕분에 가정의 질서가 유지되고 화평이 깨지지 않은 사례
가 얼마나 되는 지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윤여사 : 그렇겠죠. 원장님이 입만 벙긋하면‘깨져야 할 가정’이 얼마나
많겠어요? 입을 다물어 준 공로로 우리 마을 최고의‘유지’가 되
신 것 아니겠어요.
박읍장 : 자, 자. 여기는 개인 감정을 앞세우는 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마을을 위한,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한, 그런 고견을 내
기 위해 모인 자리입니다. (민원장에게) 그러니까 원장님께서도
마을주민 모두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르자는 데 찬성이시란 말씀
이시죠?
민원장 : 그래요.
박읍장 : 좋습니다. 청진산부인과 원장님하고, 청진백화점 김부장님하고
는 일단 동의를 하신 겁니다.

민원장, 김부장 : 예.
박읍장 : 그럼 차여사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차여사 : 물론 반대죠, 저야.
박읍장 :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해 주시죠.
차여사 : 평생 바람이라곤 모르고 살던 우리 마을 남편들에게 얼마나 큰
낭패감을 주었습니까. 최상갑이는 나이 육십이 다 되어도 서른
을 갓 넘긴 미모의 재벌 마누라와 놀아났어요.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웃이 되었구요. 그러니 우리네 남편들이 얼마나 큰
박탈감을 느꼈겠어요? 부러움 반, 시기 반으로 호시탐탐 자기들
도 바람 피울 궁리나 하게 되고.
박읍장 : 거 너무 비약이 심하십니다.
차여사 : 그게 현실이었는 걸요.
박읍장 : 목사님 의견도 들어보겠습니다. 장목사님!
장목사 : 예.
박읍장 :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목사 : 흠. 도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저들의 죽음을 그렇게까지 성대
하게 애도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마치 불륜을 미화하고 찬양하
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겠습니까?
박읍장 : 얼핏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요. 하지만, 목사님. 이거, 잘 생각
하셔야 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逆)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꾸로 들여다보면, 우리 마을로서는 아주 좋
은 기회를 얻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장목사 : 거꾸로 들여다본다?
박읍장 : 그렇습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큰 이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차여사 : 이득?
박읍장 : 지금, 세상 이목이 우리 마을에 집중해 있습니다. 최상갑씨와 장
혜림씨가 우리 마을에 은둔하던 중 사망했다는 것, 이거 대단한

행운입니다요, 우리로서는.
민원장 : 행운이라뇨? 저들이 죽은 게 행운이라고요?
박읍장 : 아, 아. 죽은 게 행운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윤여사 : 그렇죠, 행운이죠, 우리 마을로선. 쓰레기를 치워 준 셈이니까
요.
장목사 :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말씀을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곤란합니
다, 윤여사.
박읍장 : 제 얘긴, 최상갑씨와 장혜림씨가 사망한 것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민원장 : 그러니까 읍장님께서는 지역경제가 두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한
다는 뜻인가요?
박읍장 : 아, 그게 아니라, 어차피 두 사람이야 사고로 죽은 거고요, 우리
는 이 상황을 맞이하여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나 최대한 챙
겨보자 이 말씀입니다.
민원장 : 실리? 구체적으로 어떤-?
박읍장 : 이 사고로 인해 우리 마을은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얻게 됩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이익이 발생할 겁니다.
김부장 : 어떤 이익을 말씀하시는 거죠?
박읍장 : 굳이 말씀드린다면 장례산업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장례산업을
통한 관광산업도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장목사 : 장례산업?
<무대 조명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변인실의 핀 조명 들어온다.
청와대 대변인의 낭독이 이어진다.>
대변인 : 대통령께서는, 최상갑 선생과 장혜림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민
적 감정이 지극한데다, 두 분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
을 고려하여,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시기로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비서관을 보내 문상을 대신하던 것이 관례였음에 비추어, 이는
무척 이례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번 사고에 대한 애도의
뜻이 얼마나 깊은 지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대통령께서는 이 "두 분의 업적과 인품을 기
리기 위해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대통령께서는 빈소가 설치된 나진군 청진읍에 직접
방문하시어(→off).
<대변인 낭독 중 점점 조명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고
무대 조명과 전환된다.>
박읍장 : 자, 제 말씀을 잘 듣고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상갑
선생과 장혜림씨가 바로 어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청풍 지하터널을 과속으로 질주하다 벽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 겁
니다. 지난 반년동안 이 두 사람은 은둔 중이었지만, 세간의 이목
은 이들에게 여전히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아까 어느 분도 말씀
하셨듯, 3류 주간지에서부터 시사월간지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
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실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
에 이들을 인터뷰하려는 언론사 사람들과, 몰래 관찰해 사진도
찍고 비화도 파헤치려는, '파파로치?', 하여튼 그런 사람들이 늘
그들 주변에 들끓었습니다. 바로 어제도 그들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윤여사 : 다 아는 얘기는 그만 두시고요, 대체 뭐가 이익이라는 건 지 분명
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박읍장 : 아, 그래야죠. 물론 우리가 실리를 챙기려면 약간의 기술이 필요
합니다. 전략을 세워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김부장 : 뭐죠, 그게?

박읍장 :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최상갑과 장혜
림의 장례식을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치르는 겁니다. 말하자면
사회장(社會葬)이 되는 셈이죠.
차여사 : 거기까지는 아까도 말씀하신 거 아녜요.
박읍장 :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말씀드린 겁니다. 자, 제 계획은 이렇습니
다. 고인들은 각기 자기 집에서 쫓겨난 처지로, 해당 가족들은 저
들의 장례식을 치를 의사가 없다고 우리 읍에 통보해 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행려병자의 사체 처리에 준해서 저들의 장례식을 치
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착상을 얻은 겁니다.
어차피 우리 읍에서 저들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오히려 이 상황을 적극 이용하자는 데 생각이 미친 겁니다.
김부장 : 오호!
박읍장 : 대대적인 장례식을 벌이는 겁니다. 장례기간을 1주일로 잡고, 그
기간동안 주민 모두가 애통해 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전국적인 시선이 모이게 됩니다. 애도의 물결이 온 나라에 퍼질
겁니다. 그렇게되면 전국에서 문상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장례
행렬에 참가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김부장 : 그렇게 될까요?
박읍장 :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장지에는 문상객들로 붐비고, 따
라서 우리 지역경제는 일거에 활성화됩니다. 문상객들을 모두 관
광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이득
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볼까요?
차여사 : 말도 안돼요. 그런 부도덕한 사람들을 온 국민이 애도할 거라구
요? 어떻게 그런 무모한 발상이 가능하죠?
윤여사 : 애도는 커녕, 조롱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치겠죠. 그건 마을 사람
모두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자는 발상이에요.
박읍장 : 그래서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차여사 : 남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최재도 255
박읍장 : 만약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사람은 바로 차여사입니다.
차여사 : 제가요?
박읍장 : 문상객들이 빈 손으로 장지에 가겠습니까? 하다못해 국화 한 송
이라도 들고 갈 겁니다. 우리 읍내의 유일한 꽃집인 청진화원, 유
일한 화훼전문가인 차여사님. 화원은 일약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
고, 차여사께서는 우리 마을의 유력인사로 다시 한번 진면목을
발휘하게 될 겁니다.
차여사 : 흠.
박읍장 : 재작년이었던가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김동식 장군께서
고향땅에 묻히기 위해 시체로 돌아오던 날, 이웃 나진읍은 뜻하
지 않던 장례식 특수를 누렸습니다. 그 기간동안 나진읍내 화원
들의 매출액이, 평소 1년 매출액과 거의 맞먹었습니다.
차여사 : 흠.
박읍장 : 바로 그겁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습니다. 그 영화(榮華)를 우
리도 재현해 보자는 겁니다. 장례식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소
비도 늘어납니다.
장목사 : 하지만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도덕적 정의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박읍장 : 교회에 이득을 주는 일이 어찌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말씀하십
니까?
장목사 : 교회에 이득이라니?
박읍장 : 목사님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사님께서 목숨보다 더 아끼는
그 교회, 우리 마을에서 제일 큰 하나님의 성전 '청진교회'. 하지
만 그 운영 상태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살아야 복음도 전할 수
있거늘, 이 상태로는 곧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면서요?
장목사 : 흠.
박읍장 : 그건 곧 목사님의 무능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이런 사태는 목

사님의 경영 마인드 부족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
는 방법은 단 하나, 청진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확고히 정하는 겁
니다.
장목사 : 확고히?
박읍장 : 목사님,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앞으로 교회가 이 사회에서 같이
살아남는 방법은 -.
장목사 : 방법은?
박읍장 : 장제업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장목사 : 장제업이라니?
박읍장 : 장례식, 장례식을 대행해주는 거죠. 서양에서야 이미 오래 전부
터 그래 왔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그런 추세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례나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일을 교회나 사찰에서 대
행하고 있는 것이죠. 까놓고 말씀드려서 앞으로 종교단체가 살아
갈 방도는 이것뿐입니다. 장례식을 대행해주고 얻는 소득. 앞으
로 장례산업이야말로 교회 매출액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
니다. 헌금에만 의존하기에는 이제 한계에 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장목사 : 흠.
박읍장 : 따라서 저는 우리 지역을 장례산업 단지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
역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바입니다.
윤여사 : 그럼, 온 주민이 다 죽어야 된다는 말씀인가요?
박읍장 : 죽다니요?
윤여사 : 장례산업을 주력산업으로 만들려면 그만큼 사람이 많이 죽어야
하지 않겠어요? 죽지 않은 사람을 장사지낼 수는 없잖아요?
박읍장 : 아, 아. 오해이십니다. 제 설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주
장은 우리 지역에 대단위 묘역을 조성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성직
자 묘지, 교직자 묘지, 연예인 묘지 등등으로 전문화해 대규모 묘
역을 조성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의 유명
최재도 257
한 종교인사들, 학자들, 연예인들 이런 사람들이 다투어 이곳에
묻히게 됩니다. 그 거창한 장례식이 연일 이곳에서 열리고, 그 유
명세만큼이나 많은 조문객이 우리 지역을 방문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들을 상대로 여러 분야에서 매출액을 높일 수 있습니
다. 굴뚝없는 산업, 암, 이것처럼 훌륭한 사업이 어디 있겠습니
까? 서울 동작구에서는 국립묘지로 인해 현충일 특수(特需)를 영
구히 누리고 있고, 광주에서는 5·18묘역을 성역화해 관광산업
의 주요한 자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눈을 떠야 합니
다! 묘지는 더이상 혐오시설이 아닙니다! 묘지의 산업자원화! 죽
은 자와 산 자가 공생하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무대 조명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변인실의 핀 조명 들어온다.
청와대 대변인의 낭독이 이어진다.>
대변인 : 대통령께서는, 방송인 최상갑 선생과 사회사업가 장혜림씨의 죽
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장지인 나진군 청진읍의 공동묘
지를 국가차원에서 관리하라고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지시하셨습
니다. 이에따라 정부에서는 3억원의 예산을 긴급 편성해 나진군
에 하달했으며, 현재 나진군 청진읍 공동묘지 성역화 작업이 순
조롭게 진행 중임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off).
<대변인 낭독 중 점점 조명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고
무대 조명과 전환된다.>
김부장 : 하지만.
박읍장 : 예, 김부장님. 김부장도 의견을 말씀하시죠.
김부장 : 곰곰이 생각해보니 읍장님의 제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박읍장 : (당황하여) 예, 문제라뇨? 문제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김부장 : 그렇습니다.
박읍장 : 아까 분명 찬성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부장 :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한 얘깁니다.
박읍장 : 아니, 대체?
김부장 : 장례분위기가 심화되거나 일상화되면-.
박읍장 : 되면?
김부장 :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우리 백화점 매상을 현저히 줄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박읍장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부장 : 소비가 얼어붙는다 이 말씀입니다. 애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호화
음식을 먹고 호화스런 옷을 사 입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
게 마시고 어떻게 춤추겠습니까? 우리 백화점으로서는 이 문제
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원장 : ‘절대적 사랑’을 보호하는 일이 더 우선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김부장 :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박읍장 : 이해(理解)가 다소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장례산업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부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묘지를 가꾸는 과
정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집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이
런 큰 공사를 유치한다는 거, 이거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여러분
아십니까? 각 지역마다 요즘 이런 사업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
어 있습니다. 당장 이 사업이 시행되면 올 겨울 우리 지역 저소득
가구의 생계가 간단하게 해결되고 맙니다.
장목사 : 하지만 그래봐야 일시적이지 않소?
박읍장 : 그렇지 않습니다. 장례산업이야말로 항구적이며 안정적인 사업
입니다. 지속적인 수입이 가능합니다.
장목사 : 어떻게?
박읍장 : 매년 기일이면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몰려오
게 되어 있습니다. 현충일날 국립묘지 가는 길이 얼마나 붐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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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날 망우리 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바로 우리 지역도 그렇
게 되는 겁니다.
장목사 : 그게 뭐 좋은 일이오?
박읍장 : 아무렴요. 그때마다 주유소에서는 엄청난 양의 휘발류가 팔릴 것
이고, 화원에서도 수많은 꽃송이를 준비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무덤가 젯상에 올릴 과일도, 무덤 잡풀 제거를 위한 제초제도 모
두모두 소비가 급증할 것이므로, 여하간 여러 분야에서 급속한
매출 신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민원장 : 백화점 매상이 줄 것을 우려한다는 건, 그야말로 기우겠군요.
박읍장 : 그렇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택시를 비롯한 운수업계는 또 얼마나 분주해 질 것이며, 여관을
비롯한 숙박업소는 또 얼마나 호황을 누리겠습니다. 식당을 비롯
한 요식업소도 덩달아.
민원장 : 여관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면 더욱 효과가 있겠는데요, 김부장
님.
김부장 : 여관에서?
박읍장 : 맞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관광명소가 제법 있습니다. 따라서 추
석이나 한식 또는 설 같은 명절 연휴 때 각 숙박업소에서 제수용
품을 공급하고 제사를 대행해 주는 겁니다. 설날에 관광지 콘도
미니엄에서 투숙객들을 위해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준다는 얘기
는 들으신 적이 있지요? 바로 그겁니다. 관광 휴양도 즐기고, 제
사와 성묘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습니
까? 그렇게되면 우리 지역은 연휴 때마다 관광객들로 붐빌테니
그야말로 장례산업의 관광자원화가 가능해지는 거지요.
민원장 : 그렇게 된다면 백화점 매출액도 크게 늘어나겠네요?
박읍장 : 아, 그렇다마다요.
김부장 :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박읍장 : 윤여사님네 서점도 크게 붐비게 될 겁니다.

윤여사 : 우리 서점이 붐빌 일이 뭐가 있어요?
박읍장 : 최상갑과 장혜림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운동을 펼
치는데 성공해 저들이 영웅시된다면 덩달아 저들에 관한 일대기
라든지 관련 책자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양산될 테니, 서점으로서는 얼마나 다행스
런 일입니까?
김부장 : 정작 민원장께는 별 실익이 없네요.
박읍장 : 그렇지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이번 최상갑 장혜림 사건은‘사
랑의 자율 의지’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게 됩
니다.
윤여사 : 한마디로 낙태 수술이 급증하게 될 것이라 이 말이죠?
박읍장 : 윤여사께서 낙태수술을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시는 거야, 뭐, 좋
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하지
만 아직도 산부인과 병원이 낙태수술로 돈 버는 줄 아십니까? 그
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낙태수술이 산부인과 의사를 위해 하
는 수술입니까? 윤여사께서도 뭔가 의식전환을 하셔야 합니다.
민원장 : 옳아요.
차여사 : 그건, 그래요. 윤여사도 생각을 전향적으로.
윤여사 : 아니, 차여사!
차여사 : 우리가 너무 편견에 사로잡히는 건 아닌지 가끔 자기 자신을 돌
아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 읍장님같은 분들은 저렇게 오직 마을
의 발전, 주민의 번영을 위해서 불철주야 애를 쓰시는데, 우리는
늘 개인적 이해(利害)에만 얽메어 있었잖아요?
박읍장 : 흠, 흠.
윤여사 : 차여사까지도!
김부장 : 그건 그래요.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늘
편견에 사로 잡혀있기 일쑤죠.
윤여사 : 읍장님이야말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요. 읍장님께서는 우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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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 순식간에 부유해 질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잘 생각해보면
허황되다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우선 장제업은 생산적이지 못
해요. 사회적인 손실이 오히려 더 클 거예요. 조문객을 맞느라 생
업에 전념할 수조차 없게 될 겁니다.
민원장 : 그렇지 않아요. 이 사업처럼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 어디 있겠
어요. 읍장님의 착상에 찬사를 드려요.
윤여사 : 공자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대요. 공
자 어머니가 기피한 두 곳이, 바로 시장하고- .
박읍장 : 아, 아. 윤여사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 알겠는데요, 물론 부
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인정을 합니다.
윤여사 : 우리 아이들을 묘지기로 키울 수는 없지 않겠어요?
박읍장 : 물론 다소의 부작용도 있겠죠. 하지만 이번 행사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그보다 몇 배나 더 크다 이겁니다.
차여사 : 아무렴요.
박읍장 : 아마 대단할 겁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장례식에 줄잡아 20만명
은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장목사 : 장례 기간 중 문상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30만명은 될 거요.
김부장 : 그럼 적어도 장례식날 운구행렬이 10km는 늘어지지 않겠습니
까?
박읍장 : 우리 읍이 생긴 이래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
은 일찍이 유래가 없었을 겁니다.
윤여사 : 만약 그렇게 사람들이 몰린다면, 진짜 여러 문제가 발생할 거예
요. 전국에서 모여든 차량들로 극심한 교통혼잡은 물론 엄청난
사고도 발생할 것이죠. 또한 소매치기나 강도사건에 각종 여행성
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될 거예요.
박읍장 : 윤여사님. 이번 장례 축제로 우리 지역에 직접적으로 떨어질 소
득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20만명의 방문객이 우리 지역에서
단 돈 2만원씩만 소비한다고 해도, 약 40억원이 됩니다.

차여사 : 와. 40억원.
박읍장 : 단순히 그것만이 아닙니다. 관광승수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관광
객이 뿌리고 간 돈이 지역에서 회전하면서 또다른 소득효과를 유
발시키게 됩니다. 보통 세 배 내지 네 배로 성장한다고 보아 최대
200억원의 소득 개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김부장 : 엄청나네요.
박읍장 : 그런데도, 포기하시겠습니까?
차여사 : 포기라뇨?
박읍장 : 그럼요. 수십만 다발의 꽃이 온 청진읍내를 뒤덮는 정경을 상상
해 보십시오. 그 향내가 진동하지 않습니까?
장목사 : 아마 더 이상 조화를 받을 수 없다고 장례위원회측에서 거절하는
사태까지 이를 겁니다.
김부장 : 얼마나 될까요, 돈으로 치면, 꽃값이?
차여사 : 글쎄요, 줄잡아 한 5억원?
김부장 : 그 정도나?
차여사 : 아마 어버이날 전국적으로 팔리는 카네이션 매출액과 맞먹지 않
을까요.
박읍장 : 이 때문에 꽃값이 오르지 않을까요?
차여사 : 당연히 오르겠죠. 모르긴 해도 25% 이상 뛸 거예요.
윤여사 : 도덕성의 상실은 대체 어떻게 할 거죠? 사회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칭송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요, 대체?
장목사 : 그런 오해를 씻기 위해 보완책이 있어야 할 겁니다.
박읍장 : 어떤?
장목사 :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겁니다. 최상갑 선생이 장혜림씨에게
사랑의 헌시를 써서, 이를 은판에 새겨 침대 머리맡에 간직하고
있더라고 널리 알리는 겁니다.
민원장 : 좋은 생각이네요. 이들의 사랑을 불륜이라고 매도했던 사람들도
아마 수긍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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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 : 좋습니다. 장례식 전날, 유해가 있는 청진의료원 앞에서 촛불 추
도식을 할 때 그걸 공개하는 겁니다. 아마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
트가 될 겁니다.
박읍장 : 여러분께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와 주시니 한 말씀 더 드리겠습
니다. 우리 마을은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풍광을 가지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이웃 나진읍에 비해 크게 낙후되어 있습니다.
차여사 : 맞아요.
박읍장 : 나진읍에서는 국회의원도 배출되는데, 우리는 군의원 한 명이 고
작입니다. 나진읍에서 박사를 열 명이나 키워내는 사이, 우리 청
진읍에서는 이제 겨우 이번에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부장 조카
한 사람뿐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읍사무소 입구에 환영 현수막까
지 걸었겠습니까.
김부장 : 흠흠.
박읍장 : 우리 청진은 일본강점 시절에 이미 읍으로 승격된 곳입니다. 그
런데도 해방 10년 후에 겨우 읍이 된 나진에 군청마저 빼앗겼습
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학교에 호적 등본을 제출하
는데, 거기에는요, 제 출생지가 분명히‘청진군 청진읍’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를 갈 때가 되니까, 글쎄
‘나진군 청진읍’이 되어 있더라 이겁니다. 이름마저 빼앗긴 겁니
다, 우리는! 마을이 발전을 못하고 정체되어 있던 사이, 이웃 나
진읍에 지명마저 빼앗기고 만 겁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
니까, 여러분!
차여사 : 옳소.
박읍장 : 우리 마을이 이렇게 낙후된 이유가 뭐겠습니까? 인물이 없기 때
문입니다.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해 아직도 이렇게 낙후되
어 있다, 이 말입니다.
장목사 :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박읍장 : 그렇기에 우리도 인물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김부장 : 암 그래야죠. 사실 우리 조카가, 정치에도 조금 관심은 있는데,
그게.
박읍장 : 최상갑이와 장혜림이도 그 대안 중의 하나입니다.
민원장 : 그 사람들은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박읍장 :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 마을에 묻힐 사람이잖습니
까. 그래서 제가 이번에 그들을 애도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
기로 한 겁니다. 사실 그 사람들 충분히 그만한 부가가치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부도덕하다고요? 김부장 말씀대로
사랑은 절대적인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고유 권한입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어요. 어찌 인간의 잣대로, 이 사회로 잣대로, 함부
로 재려고 하시는 겁니까?
장목사 : 그렇습니다. 사랑은 신이 영역입니다. 인간의 뜻으로 간섭할 수
없는 게 사랑입니다.
윤여사 : 하지만 장목사님도 저들의 부도덕성을 나무랐잖아요.
장목사 : 설령 저들의 도덕성이 문제가 된다해도, 저들은 이미 사망하였습
니다.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죽음. 죽음은 모든 죄를 사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이르기를, ‘죄의 값은 사망이라’하셨나니,
예수도 죽음으로 우리 원죄를 사하셨습니다. ‘누구든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르노니, 이제 죽은 자는 더이상 죄인이 아니노라.’우리
는 저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저들
을 심판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아멘.
민원장 : 최상갑씨가 비록 바람을 좀 피운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만큼 유
능한 방송진행자가 또 어디 있겠어요. 100년에 한 사람 나올까말
까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예요.
김부장 : 아무렴요. 특히 토크쇼는 그 양반을 따를 자가 없죠.
민원장 : 그 사람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건, 사실 정치적인 음모때문이래
요.
김부장 : 오호,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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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장 :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 토론 사회를 봤었잖아요.
김부장 : 그랬죠.
민원장 : 당시 야당 후보였던 현 대통령한테 좀 불리한 질문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다가 미운털이 박혔다는 거예요, 글쎄.
김부장 : 오호.
장목사 : 그런데다 사랑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포기한 사람 아닙니까, 참
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김부장 : 그럼요, 목사님.
차여사 : 아, 남자치고 그만큼 바람 안피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마누라가 문제지. 안 그래요?
김부장 : 그럼요, 차여사님. 모든 여자들이 그 정도만 이해해 주신다면 우
리 사회가 훨씬 밝아질 수 있죠.
윤여사 :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을, 이해하라고요?
민원장 : 질서를 파괴한 게 아니라, 단지 조금 진보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
죠.
차여사 : 장혜림씨도 그래. 그 여자, 사회사업 꽤 많이 했어요, 내가 알기
로. 그 여자 고아원이다, 양로원이다, 얼마나 돌아다녔는데요.
윤여사 : 그건 자발적 봉사와 다른 거예요. 그 여자가 고아원과 양로원에
다닌 것은 운전면허 불법취득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기 때문
이잖아요.
김부장 : 잡지에서 보니까, 한때는 대중 목욕탕에 가서 다른 사람들 등도
밀어주고 그랬다던데요. 천성이 아주 봉사 체질이라니까.
장목사 : 오호, 그랬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셨
지요.
윤여사 : 그거야 자기 남편이 선거에 출마했으니까 하는 수 없이 한 짓 아
니예요. 재벌이 권력까지 쥐려 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무마하려
고요.
박읍장 : 윤여사께서는 매사 그렇게 부정적이십니다. 그렇게만 볼 게 아니

예요. 제 생각에는 나진읍이 자랑하는 김수인 수녀. ‘한국의 테레
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 여자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김수인 수녀가 가난한 이의 어머니라면, 장혜림씨는 소외된 이들
의 벗이었습니다.
차여사 : 맞아요. 나진의 김수인, 청진의 장혜림. 두 사람은 우리나라 사회
사업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이에요.
윤여사 : 아니 장혜림이를 김수인 수녀와 비교한다고요, 감히? 헌신적인
사회봉사로 온 국민의 추앙을 받는 김수인 수녀와?
차여사 : 장혜림이 김수인 보다 못한 것 뭐예요? 우리 청진읍에서는 그런
인물을 가지면 안된다는 뜻인가요?
윤여사 : 김수인 수녀와 장혜림은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여자예요. 김 수
녀의 숭고한 사랑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야 할 정도지만,
차여사 : 장혜림의 사랑도 숭고해요.
윤여사 : 세상에.
장목사 : 김수인 수녀와 장혜림은 동급의 자선사업가임에 분명합니다. 선
행에 있어 경중을 따지는 건 있을 수 없으며, 드러난 실적만으로
선행의 무게를 재려는 짓은 지극히 세속적인 시각일 따름입니다.
윤여사 : 오, 세상에! 뭐 하는 짓이죠, 이게? 김수인 수녀와 장혜림이 세간
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수인이 헌신적인
사랑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보살피고 있을 때, 장혜림은 외간남자
와 놀아나며 자기 삶을 즐기고 있었어요. 김수인은 자기 희생적
인데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에 특별한 애착과 헌신을 보여준 인물
로 전세계의 칭송을 받았어요. 하지만 장혜림은 3류 주간지에 표
지인물로 등장하며 끊임없이 염문을 퍼뜨리던 사람이었어요. 김
수인과 동급이라고요? 장혜림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김수인 수녀
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성자로 돌변할 수 있죠?
장목사 : 흠. 장혜림이 여기 와 사는 동안 김수인 수녀와 몇 번 만난 후 가
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들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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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여사 : 맞아요,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고요. 아주 아주 절친한 사이
였다니까요.
<무대 조명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변인실의 핀 조명 들어온다.
청와대 대변인의 낭독이 이어진다.>
대변인 : 아울러 대통령께서는, 방송인 최상갑 선생과 사회사업가 장혜림
씨에게 훈장을 추서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건국이래 가장 많은 대중적 사랑을 받은 분이니만큼,
국민의 이름으로 그 공적을 치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통령께
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행정부의 수반이 아닌, 국가 대표로서의
대통령 권한을 사용하여 최상갑 선생과 장혜림씨의 생전 행적을
영구히 기리자는 것이(→off).
<대변인 낭독 중 점점 조명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
고 무대 조명과 전환된다.>
박읍장 : 우리 모두 최상갑 선생과 장혜림씨가 온 국민의 영웅이라는 사실
에 대해서는 동의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이번 장례
식을 어떻게 범국민적 행사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방안에 대해 모
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목사 : 장례식이라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확립된 기본틀이 있기 때문
에 그 범위 안에서 집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주민 모두가
검은 양복을 착용하고 1주일간 엄숙한 자숙시간을 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차여사 : 그렇게 해서야 어디 축제분위기가 조성되겠어요?
장목사 : 축제라뇨? 우리가 치르는 것은 장례식입니다, 축제가 아니라.
김부장 : 그런 발상 가지고 어떻게 이 행사를 준비하겠습니까. 축제라는

건요, 축전과 제전을 합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가령 크리스마
스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전행사니 당연히 흥청거리며 즐
겨야 하겠지만, 반대로 브라질의 삼바 카니벌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전행사임에도 거의 광란 상태에 이르지 않습니까.
장목사 : 그러니까, 광란의 상태로 몰고 가자, 이 말씀이십니까?
김부장 : 최소한 소비분위기를 늘리는 쪽으로는 가야죠. 검은 양복을 입을
게 아니라, 저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장혜림 의상과 최상갑 모
자를 보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말입니다.
장목사 : 오호.
민원장 : 장례기간을 1주일로 하자고 하셨나요?
박읍장 : 예, 민원장님.
민원장 : 그 기간동안 관공서와 학교는 휴무하도록 하죠.
박읍장 : 왜요?
민원장 : 모든 공무원과 학생들이 앞장서 장례준비를 해야 할 거 아녜요.
촛불 행진을 위한 청사초롱도 만들고, 전 시가지에 조등도 매달
아야 하지 않겠어요.
차여사 : 좋아요. 온 읍민이 꽃 한송이씩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거예요.
김부장 : 집집마다 조기(弔旗)를 게양하도록 하죠.
장목사 : 조가(弔歌)도 제정합시다. 온 읍민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박읍장 : 좋은 생각입니다.
장목사 : 각 종교단체별로 추모행사도 가져야 하겠죠. 추모미사, 추모법회
가 마을 곳곳에서 열리도록 해야 합니다.
차여사 : 저들의 숭고한 사랑을 기리기 위해 동상도 세워야 해요.
김부장 : 1주일 내로 동상제작이 가능할까요?
박읍장 : 동상제막식은 또다른 이벤트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김부장 : 아예, 기념관을 만듭시다. 최상갑과 장혜림의 애절한 사랑을 영
원히 기리기 위해서는 이게 절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읍장 :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내년 예산에 반영될 수 있도록 군수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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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님께 강력 건의하겠습니다.
민원장 : ‘이벤트’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데, 최상갑과 장혜림은 이 지상
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살지 못했어요. 그러니 그 불쌍한 영
혼을 위해 영혼결혼을 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박읍장 : 좋습니다. 그건 장례 하루 전날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부장 : 그들이 등장했던 잡지 기사를 모아 전시회도 하는 겁니다. 전시
장은 저희 백화점 화이트홀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민원장 : 장례식 과정을 텔레비젼 생중계로 내보내는 방법을 모색해 보세
요, 읍장님.
박읍장 : 언론보도가 되려면 우리가 좀더 치밀하고 진취적인 계획을 세워
야 합니다. 언론에서야 보도가치가 높은 뉴스만을 취급하려 할테
니 우리는 행사 규모를 키워서 그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합니
다.
민원장 : 세계화 시대니만큼 스케일을 키워야겠죠. 범국민적, 나아가 전세
계에 애도분위기를 확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요.
김부장 : 대통령의 문상을 요구하는 게 어떨까요?
박읍장 : 대통령?
김부장 : 직접 문상을 오도록 제안하는 겁니다.
박읍장 : 글쎄요.
민원장 : 만약 응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 때 국물도 없다고 전해주세요.
박읍장 : 알겠습니다.
민원장 : 청진읍 공동묘지를 성역화 시켜 달라고 요구해 보세요.
장목사 : 훈장 추서도 요구해 보시오. 훈장을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
다, 저들은.
차여사 : 아무렴요.
김부장 : 이렇게 되면 엄청난 조문객들이 몰려올텐 데요, 숙박 교통 위생
대책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장중한 장송곡이 낮게 깔리며, 무대 조명 점차 어두워진다.>
민원장 : 내가 알기로 최상갑씨와 장혜림씨는 평소 쟁반막국수를 즐겨 먹
었다고 해요. 그러니 이 막국수를 조문객들에게 소개하는 게 어
떨까요. 향토식품으로 지정하고 집중적으로 보급하는 겁니다.
김부장 : 숙박난 해결을 위해 전 가구를 민박가옥으로 지정하고, 민박 안
내소를 시내 광장에 설치하도록 해야 할 겁니다.
박읍장 : 모두 좋은 의견입니다. 여러분의 고견을 행정에 적극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 점차 흥에 겨워 여러 제안을 앞다투어 하고 있는
사이, 조명 완전히 사라진다. 대변인실의 핀 조명 들어온다.
청와대 대변인의 낭독이 이어진다.>
대변인 : (마을 사람들의 소란과 겹치며) 대통령께서는, 방송인 최상갑 선
생과 사회사업가 장혜림씨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나진군 청
진읍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곧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
금활동을 펼치게 되며 -(off).
<어느덧 핀 조명 완전히 사라진다.
무대, 어둠에 잠긴 상태에서, 장송곡 점점 커져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 소리를 덮는다.
다시 점등되었을 땐, 이미 막이 내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