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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2001년 [이성선시인추모글모음-김춘만]아카시아 꽃이 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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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070회 작성일 05-04-0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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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이 피었구나. 달큼한 향기를 내뿜는 아카시아 꽃이 참으
로 많이도 피었구나. 어느 해는 꽃이 피었다가 지는 줄도 모르게 지나치
고 또 어느 해는 저 꽃이 가득 몰려와 가슴이 미어지도록 피고 졌는데 올
해는 꽃 냄새가 유난히 짙은 걸 느끼겠구나.
올 봄 근무지가 바뀌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였다. 주변은 분명히 낯
선 곳인데도 이곳에도 봄꽃이 그리도 아름답게 피더니 이어서 곳곳에 아
카시아 꽃이 피었다. 그래서 친근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첫 근무지 학교
에도 뒷산이 있었고, 그곳에는 푸른 대숲과 감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맘때는 산밑으로 난 길가로 하얗게 나를 백치로 만들만큼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다. 그 길을 걸으며 나의 젊음은 참으로 많은 것과 만났다. 저릿저
릿한 그리움과 방황 속에서도 꽃은 힘이었고, 희망이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쯤에 나는 '흔들리는 집'을 만났다.
바람이 흔들면 흔들리는 집, 비가와도 젖지 않는 집은 나뭇가지나 풀
숲에 편하게 있었다. 흔들리는 집은 하늘과 맞닿는 생각으로 올을 짜고
있었다.
그 올은 단순한 무채색 색깔이었는데도 매우 아름다웠다.
누구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 많은 것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아
주 어렸을 때 꾸었던 꿈과 젊은 날의 열정과 그리고 별과 달과 들꽃의 향
기를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어했다. 아직도 어렸을
때의 꿈과 젊은 날의 순수했던 포부를 그리던 사람들은 이 집에서 그 옛
이성선 시인 추모 글 모음 25
날의 그림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별을 잃고 들꽃의 향기를 잃은 사
람들도 이 집에서 하루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별과 들꽃의 향기를 담았던 곳에서 지친 노독을 가득 담고 바쁘게 걸어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곳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갈구하지 않겠
는가? 흔들리는 집의 주인은 시인이었다. 나도 그런 집의 주인이 되고 싶
었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이 집의 주인은 겸손하고 목소리가 작았다.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반
갑게 맞아하여 주었지만 아무나 이 집을 들어갈 수 는 없었다. 집이 워낙
에 가벼워서 걸치고 있는 옷은 모조리 벗어야 했던 것이다. 이 집에 들어
서기 위해서는 마당에 서있는 커다란 대추나무에 지금까지 자신을 채우
고 있던 허세나 위세를 벗어 걸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허세
와 위세가 어찌나 무거운지 대추나무 가지가 부러질 지경 이였는데 결국
은 그렇게 하고도 들어오지 못하였다. 작은 문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머
리를 숙이고 몸을 구부려야 하는데 평생을 하지 않던 몸짓이라 그걸 못했
다고 한다.
그래서 흔들리는 집의 주인은 혼자만의 방에서 더 깊은 사유의 세계에 몰
입할 수 있었다. 그의 세계는 참으로 깊고 순수하여 가까이할수없었다.
그러한 세계를 영위하던 그가 이 아름다운 오월에 홀연히 떠난 것이다.
흔들리는 집, 가벼운 집에서 하늘과 통하는 문을 열고 살던 속초 시인,
하늘 시인, 벌레 시인 이성선은 그렇게 풀풀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버드
나무 꽃가루가 눈처럼 내리고, 맑은 하늘 속 바람의 숨결도 잔잔하던 오
월의 한 낮에 시인은 그동안 걸치고 있던 가벼운 옷도 벗어 던지고 날아
가고 있었다.
다시 아카시아 꽃이 피었구나. 어느 해는 피는 줄도 모르게 피었고, 어
느 해는 지는 줄도 모르게 졌는데 올 오월엔 눈이 아프게 피었구나. 가슴
이 저리게 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