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호2002년 [수필-이은자] 나의 잠언
페이지 정보
본문
나의 잠언
우리 또래의 여자들 이름자는 거의가 무슨 무슨 子야다. 오랜만에 자야
들이 여럿이 소풍을 갔다 오고 있다.
소야천 강둑을 따라 싸리재 쪽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방축 옆
에 물방앗간이 있다. 소야천은 여울이다가 소이다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멋을 부리며 흐른다. 양 옆에는 갯뫼들이 무성하고 물뿌리 사이로 물방개
송사리들이 노닐게 넉넉하다. 강모래는 금빛처럼 곱다.
봄도 초여름도 함께 머문 날씨라서 콧잔등에만 땀이 송송 맺힌다.
바람 냄새는 또 어떤가. 찔래 꽃내음, 수수꽃다리, 아카시아, 인동초 향
기…….
마을에선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우리는 한아름씩 꽃을 꺾어 안았다.
나도 욕심껏 한 아름 안았다. 들꽃은 꺾을 때뿐이지 풀꽃이라서 집까지 가
지고 오면 다 시들어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꽃에 반해서 산자락과 강둑
을 넘나들며 꽃을 꺾었다.
찔레꽃 흰 너울은 가시 때문만 아니라 건드리기만 해도 사르르 꽃비로
내려앉으니 꺾을 수가 없다. 개망초 은방울 꽃, 둥글레는 흰색뿐이라 꽃창
포, 마타티, 솔나물꽃처럼 노랑색을 더하고 자운영 타래난초 타래붓꽃 패
랭이꽃 붉은색도 갖추어 꺾었다.
우리가 쌍다리 근처에 왔을 때 저 멀리엔 산그늘이 어두웠다.
우리는 헤어지려한다. 서로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쌍다리는 소야천이 청초호에 이르는 지점에 있는 두개의 다리다.
하나는 우리 키 세 네 곱이나 되는 높은 교각이 뚜벅 뚜벅 강심에 박혀
있고 그 위로 군데군데 철길이 얹혀 있다. 6.25사변 때 끊어졌으나 아직
그대로 녹슬고 있다. 다른 하나는 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보통 다리다. 호
숫가에는 새들이 내려앉았다. 황혼을 등지고 한 무리의 남정네들이 선(先)
소리를 이어받아 흥을 돋우며 그물을 당긴다. 숭어, 잉어, 붕어, 뱀장어,
망둥어…….
친구들이 모두 제집 길로 가버린 뒤 나만 혼자 강둑에 남았을 그 때에.
그제서야 나는 며칠전에 남편이 세상 떠났음을, 집에 가도 그가 없음
을, 이 꽃을 가져가도 보여줄 사람이 없음을 기억하니 밀물처럼 쭈욱 밀고
들어오는 허허로움으로 나는 휘청거렸다. 어쩜 그렇게 한나절 까맣게 잊
고 놀 수 있었을까.
슬픈 나를 위해서 친구들이 함께 소풍을 가 주었던 것을.
나는 소야천 방축을 헤메며 울었다. 한 아름 풀꽃들을 훠이훠이 뿌려
버리며.
살면서 이런 야속함은 처음이다. 이런 외로움도 처음이다. 이런 설움도
처음이다.
소리쳐 울며 울며 방축을 헤맸다.
누군가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남편 목소리였다. 잠들면 메고
가도 모르는 그가 내 울음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꿈을 꾼 것이다. 꿈은 대체 몇 차원의 세계란 말인가.
1950년대의 속초 소야천과 쌍다리 방축에 60년대의 자야들을 불러 모
아 놀게 하더니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망인이 되는 노년의 나를 혼자 세워
놓고 삼십대의 감정으로 그리도 섧게 울게 하는가.
남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모두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했다. 살면서 남편이 미울 때, 정말 싫
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꿈을 떠 올린다.그리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늙어가는 부부, 쳐다볼수록 볼품없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언제 한번
은 그 꿈같은 날을 겪어야 할 것을 생각한다.
누가 남아서 그 일을 감당 할 런지는 모른다. 이제는 미워할 구석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신의 남루함을 연민하면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한 소야천과 쌍다리를 자주 거닌다.
우리 또래의 여자들 이름자는 거의가 무슨 무슨 子야다. 오랜만에 자야
들이 여럿이 소풍을 갔다 오고 있다.
소야천 강둑을 따라 싸리재 쪽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방축 옆
에 물방앗간이 있다. 소야천은 여울이다가 소이다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멋을 부리며 흐른다. 양 옆에는 갯뫼들이 무성하고 물뿌리 사이로 물방개
송사리들이 노닐게 넉넉하다. 강모래는 금빛처럼 곱다.
봄도 초여름도 함께 머문 날씨라서 콧잔등에만 땀이 송송 맺힌다.
바람 냄새는 또 어떤가. 찔래 꽃내음, 수수꽃다리, 아카시아, 인동초 향
기…….
마을에선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우리는 한아름씩 꽃을 꺾어 안았다.
나도 욕심껏 한 아름 안았다. 들꽃은 꺾을 때뿐이지 풀꽃이라서 집까지 가
지고 오면 다 시들어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꽃에 반해서 산자락과 강둑
을 넘나들며 꽃을 꺾었다.
찔레꽃 흰 너울은 가시 때문만 아니라 건드리기만 해도 사르르 꽃비로
내려앉으니 꺾을 수가 없다. 개망초 은방울 꽃, 둥글레는 흰색뿐이라 꽃창
포, 마타티, 솔나물꽃처럼 노랑색을 더하고 자운영 타래난초 타래붓꽃 패
랭이꽃 붉은색도 갖추어 꺾었다.
우리가 쌍다리 근처에 왔을 때 저 멀리엔 산그늘이 어두웠다.
우리는 헤어지려한다. 서로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쌍다리는 소야천이 청초호에 이르는 지점에 있는 두개의 다리다.
하나는 우리 키 세 네 곱이나 되는 높은 교각이 뚜벅 뚜벅 강심에 박혀
있고 그 위로 군데군데 철길이 얹혀 있다. 6.25사변 때 끊어졌으나 아직
그대로 녹슬고 있다. 다른 하나는 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보통 다리다. 호
숫가에는 새들이 내려앉았다. 황혼을 등지고 한 무리의 남정네들이 선(先)
소리를 이어받아 흥을 돋우며 그물을 당긴다. 숭어, 잉어, 붕어, 뱀장어,
망둥어…….
친구들이 모두 제집 길로 가버린 뒤 나만 혼자 강둑에 남았을 그 때에.
그제서야 나는 며칠전에 남편이 세상 떠났음을, 집에 가도 그가 없음
을, 이 꽃을 가져가도 보여줄 사람이 없음을 기억하니 밀물처럼 쭈욱 밀고
들어오는 허허로움으로 나는 휘청거렸다. 어쩜 그렇게 한나절 까맣게 잊
고 놀 수 있었을까.
슬픈 나를 위해서 친구들이 함께 소풍을 가 주었던 것을.
나는 소야천 방축을 헤메며 울었다. 한 아름 풀꽃들을 훠이훠이 뿌려
버리며.
살면서 이런 야속함은 처음이다. 이런 외로움도 처음이다. 이런 설움도
처음이다.
소리쳐 울며 울며 방축을 헤맸다.
누군가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남편 목소리였다. 잠들면 메고
가도 모르는 그가 내 울음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꿈을 꾼 것이다. 꿈은 대체 몇 차원의 세계란 말인가.
1950년대의 속초 소야천과 쌍다리 방축에 60년대의 자야들을 불러 모
아 놀게 하더니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망인이 되는 노년의 나를 혼자 세워
놓고 삼십대의 감정으로 그리도 섧게 울게 하는가.
남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모두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했다. 살면서 남편이 미울 때, 정말 싫
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꿈을 떠 올린다.그리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늙어가는 부부, 쳐다볼수록 볼품없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언제 한번
은 그 꿈같은 날을 겪어야 할 것을 생각한다.
누가 남아서 그 일을 감당 할 런지는 모른다. 이제는 미워할 구석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신의 남루함을 연민하면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한 소야천과 쌍다리를 자주 거닌다.
- 이전글[수필-이은자] 어머니와 호박 05.03.24
- 다음글[희곡-최재도] 화려한 장례식 0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