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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2002년 [수필-이은자] 나의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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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11회 작성일 05-03-2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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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잠언

우리 또래의 여자들 이름자는 거의가 무슨 무슨 子야다. 오랜만에 자야
들이 여럿이 소풍을 갔다 오고 있다.
소야천 강둑을 따라 싸리재 쪽으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방축 옆
에 물방앗간이 있다. 소야천은 여울이다가 소이다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멋을 부리며 흐른다. 양 옆에는 갯뫼들이 무성하고 물뿌리 사이로 물방개
송사리들이 노닐게 넉넉하다. 강모래는 금빛처럼 곱다.
봄도 초여름도 함께 머문 날씨라서 콧잔등에만 땀이 송송 맺힌다.
바람 냄새는 또 어떤가. 찔래 꽃내음, 수수꽃다리, 아카시아, 인동초 향
기…….
마을에선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우리는 한아름씩 꽃을 꺾어 안았다.
나도 욕심껏 한 아름 안았다. 들꽃은 꺾을 때뿐이지 풀꽃이라서 집까지 가
지고 오면 다 시들어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꽃에 반해서 산자락과 강둑
을 넘나들며 꽃을 꺾었다.
찔레꽃 흰 너울은 가시 때문만 아니라 건드리기만 해도 사르르 꽃비로
내려앉으니 꺾을 수가 없다. 개망초 은방울 꽃, 둥글레는 흰색뿐이라 꽃창
포, 마타티, 솔나물꽃처럼 노랑색을 더하고 자운영 타래난초 타래붓꽃 패
랭이꽃 붉은색도 갖추어 꺾었다.
우리가 쌍다리 근처에 왔을 때 저 멀리엔 산그늘이 어두웠다.

우리는 헤어지려한다. 서로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쌍다리는 소야천이 청초호에 이르는 지점에 있는 두개의 다리다.
하나는 우리 키 세 네 곱이나 되는 높은 교각이 뚜벅 뚜벅 강심에 박혀
있고 그 위로 군데군데 철길이 얹혀 있다. 6.25사변 때 끊어졌으나 아직
그대로 녹슬고 있다. 다른 하나는 차와 사람들이 다니는 보통 다리다. 호
숫가에는 새들이 내려앉았다. 황혼을 등지고 한 무리의 남정네들이 선(先)
소리를 이어받아 흥을 돋우며 그물을 당긴다. 숭어, 잉어, 붕어, 뱀장어,
망둥어…….
친구들이 모두 제집 길로 가버린 뒤 나만 혼자 강둑에 남았을 그 때에.
그제서야 나는 며칠전에 남편이 세상 떠났음을, 집에 가도 그가 없음
을, 이 꽃을 가져가도 보여줄 사람이 없음을 기억하니 밀물처럼 쭈욱 밀고
들어오는 허허로움으로 나는 휘청거렸다. 어쩜 그렇게 한나절 까맣게 잊
고 놀 수 있었을까.
슬픈 나를 위해서 친구들이 함께 소풍을 가 주었던 것을.
나는 소야천 방축을 헤메며 울었다. 한 아름 풀꽃들을 훠이훠이 뿌려
버리며.
살면서 이런 야속함은 처음이다. 이런 외로움도 처음이다. 이런 설움도
처음이다.
소리쳐 울며 울며 방축을 헤맸다.
누군가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남편 목소리였다. 잠들면 메고
가도 모르는 그가 내 울음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꿈을 꾼 것이다. 꿈은 대체 몇 차원의 세계란 말인가.
1950년대의 속초 소야천과 쌍다리 방축에 60년대의 자야들을 불러 모
아 놀게 하더니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망인이 되는 노년의 나를 혼자 세워
놓고 삼십대의 감정으로 그리도 섧게 울게 하는가.
남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모두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감사했다. 살면서 남편이 미울 때, 정말 싫
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꿈을 떠 올린다.그리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늙어가는 부부, 쳐다볼수록 볼품없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언제 한번
은 그 꿈같은 날을 겪어야 할 것을 생각한다.
누가 남아서 그 일을 감당 할 런지는 모른다. 이제는 미워할 구석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신의 남루함을 연민하면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한 소야천과 쌍다리를 자주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