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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2000년 [초대작가-최재도]마술사, 아직 끝나지 않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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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07회 작성일 05-04-0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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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 내 꿈은 마술사가 되는 것이었다. 마을 빈터에 나타
난 약장수들의 그 놀라운 묘기는 어린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손수건 한 장만 있으면 비둘기 두 마리
와 달걀 한 꾸러미를 거뜬히 뽑아낼 수가 있고, 작은 상자 속에 나
뭇잎 하나만 집어넣으면 여러 장의 지폐로 바뀌어질 수도 있었
다. 빈 솥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삶은 국수를 끊임없이 건져내
구경꾼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규모가 큰 본격적인 마술은, 역시 그 시절 유행하던 서커스단
이 들어와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어두컴컴한 천막
안 맨 앞줄에 단정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
었던 것은, 사람을 다른 동물로 바꾸는 변신마술이었다.
어두컴컴한 구석 거울 앞에 예쁜 소녀를 세워놓고 한 사내가
멀리서 손전등을 비춘다. 갑자기 불을 껐다가 급히 다시 켠다. 소
녀는 어느새 벌거벗은 채 서 있다. 다시 한번 불이 꺼졌다 켜지면,
소녀의 앙상한 해골만 거울 앞에 남아 있다. 객석엔 비명이 난무
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온 천막을 메운다. 한 번 더 불이 꺼졌
다 켜지면, 해골은 사라지고 비둘기 한 마리만이 그곳에서 푸드
득 날아오른다.
일곱 살 난 꼬마에게 그 모습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그 엄
청난 변화, 한 소녀의 소멸, 태평스럽게 공중을 나는 비둘기, 거기
에 손뼉을 치는 관중들이 또 얼마나 의아스럽게 보였을까. 날아
다니는 모든 비둘기는 다 저처럼 불쌍한 여자 아이가 변한 것일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들도 모두 그러하고, 외
롭게 산 속에 숨어사는 새들도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때 나는 마술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저처럼 억울하게 새가 되어
버린 소녀들을 다시 사람으로 환원시켜 주리라 다짐했다. 낮에는 백조로 변
해 있어야 했다는 서양동화가 그처럼 생생하게 읽혀졌던 것도 다 그 때문이
었을 것이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이 몸이 새라면, 저 건너보이는 섬까
지 날아가리' 운운하는 서양노래를 그래서 싫어했다. 정말로 새가 되어버리
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잠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 시절 어느 산골마을에서 야영을 할 때, 밤새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대는 소쩍새와 만난 적이 있다. 아련한 운율과 애절한 선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쩍새 울음은, 오래 전의 그 서커스단 소녀를 기억나게 했다. 그
애가 여기까지 쫓아와 다시 인간으로 환원시켜 달라고 절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하면 즉시 마술을 배워 세상의 새들을 소녀로 환원
시키겠다고 그 소쩍새 앞에서 다시금 맹세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끝내 마술사가 되지 못했고, 그렇기에 새를 사
람으로 만드는 방법도 익히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너머 바다 쪽에 서커스단 천막이 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향토축제를 맞아 서커스단이 들어온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번성했
건만, 이제는 저처럼 쇠퇴했구나 하는 생각에, 세월의 흐름이 새삼 느껴졌다.
문득 40년 전의 굳은 결심을 다시금 상기했다.
혹 아직도 사람을 새(鳥)로 만드는 마술을 하는 지 매우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 딸들과 함께 서커스단을 찾을 생각이다. 마술사가 내 딸
들을 새(鳥)로 바꾸어 버릴까봐 몹시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위험
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 당시 그토록 간절하게 마술사 되기를 꿈꾸었는 지, 왜 그 꿈이
그처럼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는 지를 내 딸들이 헤아려 준다면,
나로서는 대단히 행복한 일이다.
더군다나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들도 나처럼 마술사를 소망하게 될 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내 꿈을 대신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내 어찌 이를 놓치겠는가 말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