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30호2000년 [윤 홍 렬]갈뫼 第30 호를 내면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09회 작성일 05-04-05 21:21

본문

1969년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속초시 교육청 회의실을 빌
어 이 지역 문학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문학동우회의 결
성 그리고 동인지 발간문제를 논의 하였다. 10 여명이 모였는
데, 다 상당한 열의와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저런 의견이 교환된 끝에 동우회의 명칭은“설악문우회”
(雪嶽文友會)로 정했다. 속초문단 탄생의 남상(濫觴)이었다. 그
자리에 모였던 10 여명이 발기인이 된 셈인데 그런 명칭은 붙이
지 않았다. 일반 사회단체서처럼 격식을 갖추고 회칙을 제정하
고 하는, 외형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싫어서 형식적인 것은 생략
했다.
그날에 합석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초중고교에 재직하는 교
원들이었다. 각기 직장동료들에게 또는 이런 저런 기회와 인맥
을 통하여 설악문우회가 탄생하였음을 알렸고 참여를 권유하고
하여 그달 첫 일요일에 두 번째 모임을, 역시 교육청 회의실에서
가졌다. 참여 의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22 명이
었다. 그 자리에서 동인지 간행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제호는 <갈뫼>로 하였다. 우리나라 동인지의 과거사로 비추어
볼 때 동인지 발행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각오에서 <갈뫼>라
고 지은 것이다. <칡덩굴이 엉긴 동산이라는 뜻>이다. 칡덩굴의
뿌리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라는 특성을 본받자는 뜻이며 그 것의
번식력 또한 강인함을 채득하여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갈뫼>
의 꽃을 피우자라는 의지력을 다지는 뜻이 담겼다. 실제적인 문
제로는 동인지의 특성상 작품은 회원 각자가 쓰는 것은 물론이
고 경비문제도 회비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월 회비는 1천원씩
이었다. 우선 동인지 발간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회비를 모았는
데 10월부터 다음해 3월분까지 쌓인 것이 10 여만원이었다.
그렇지만 출판비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대도시에
서, 그리고 호화롭게 책을 꾸민다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그저
실질적으로 우리들의 작품을 담아내는 정도면 된다는 일념만으
로 궁리를 거듭한 끝에 속초시내 문화인쇄소 (文化印刷所)에 가
서 타협을 하였다. 10 만원 정도로는 그 문화인쇄소에서 찍는다
할지라도 형편없이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그 당시의 사장 김운
기(金雲基) 씨와 총무 김붕해 (金鵬海)씨가 쾌락을 하여 주었
다. 이 지역에서 처음 나오는 문학잡지인 데 돈이 마련되는 대
로 갚으라면서 쾌히 인쇄를 하여 주었다. 그 때의 인쇄비가 25
만원이었는 데, 우선 10 만원은 현금으로 내고 잔금은 형편이
돌아가는 대로 내기로 한 것이니, 말하자면 월부 상환 형식이었
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0년 4월에<갈뫼. 제 1호>가 출판 된 것이다.
우리 회원들의 손과 머리로 빚어낸 수확이었으니 대견했던 것
도 사실이었지만 문화인쇄소의 김운기 사장님과 김붕해 총무님
의 이해와 격려도 감동적이었다. 그 분들의 그런 너그러운 배려
가 아니었더라면 갈뫼의 출발은 상당한 애로를 겪었을 것이다.
말타면 말구종 두고싶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1호가 나올
때까지는 감히 넘겨다 보지도 못하였던 등단의 욕심이 모락모
락 피어 오른 것이다.
제 1호를 찍어내면서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1호를 발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2호 출판을 서둘렀
다. 우리의 실적을 쌓으면서 작품 제작의 수련도 쌓으면서 중앙
문단에 진출을 시도해 보자는 욕심이었다. 이번에도 외상과 월
부 인쇄가 가능하다는 문화인쇄소 운영진의 양해를 받고서의
일이다. 그해, 그러니까 1970년 12월 12일 <갈뫼 제 2집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그 당시의 우리 능력으로서는 좀 과욕이다 싶
을 정도로 행사를 크게 벌였었다.
지금의 <주택은행 속초지점>이 있는 자리가 1970년에는 중
앙여관이라는 2층 건물이 있었고 그 중앙여관 지하실에 <청자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에서 기념회 행사를 가졌었는 데 서울
에서 조연현(趙演鉉), 이 석,(李石) 문덕수(文德守) 씨 등 세분
이 문학강연 연사로 참석하였다. 행사장은 초 만원이었고 그분
들이 <갈뫼>를 훑어본 소감이 아주 고무적이었다. 내용도 충실
하고 책의 모양도 다른지역에서 본 동인지하고는 격이 다르다
는 것이었다. 이렇게해서 우리들의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 봐 주
는 한국문단의 중진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이 공정하
게 평가 받을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을 가지고 작품에 열중하게
되었다.
역시 회원들의 노력의 결과와 평가해 주는 분들의 공정성으
로 1972년도부터 매년 한 두명 꼴로 중앙문단에 등단이 되었
다. 앞에서 <남상>이라는 말을 썼는 데 이 남상이 양자강 같은
장강이 되어 중국 문화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갈뫼>도 한국문단의 주류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