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29호1999년 [소설-김성숙]내 그림자 물구나무 서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825회 작성일 05-04-05 21:38

본문

누군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그 소리를 꽤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내가 뭐라고 웅얼웅얼 대꾸했던 것
같다.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도어의 잠금 장치를 풀자, 방 문이 벌컥 열리
며 걱정스런 얼굴 하나가 불쑥 들어섰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며 벌떡 일어나 앉고 말았다. 밥상을 든 어머니가 거기, 그 좁은 복도
에 우두커니 서서 어둠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섯는 착각
때문이었다.
“놀랬나보네요. 걱정이 돼서…….
영문을 몰라 빤히 올려다보자 여자가 미안스럽게 웃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우? 도무지 기척이 있어야지. 호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더니만 내가 딱 그짝이네.
한번 혼이 된 통 났거든요.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가 손님처럼 혼자 늦
은 밤에 핸드빽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와서 이틀 동안 꼼짝도 않습디
다. 뭔일이야 있으려나 했는데 덜컥 약을 먹고 죽었지 뭐요. 머리 꼭
대기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이 인생을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 뛴답니다.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괜스리 사람을 이리 떠보고 저리

떠보고……. 심장이 폭삭 삭아내리는줄 알았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그날 투숙했던 손님들까지 찾아내 조사를 벌이는 통에 소문이 나서
한동안 손님이라곤 얼씬도 안했어요.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길
래, 미친 년 남의 장사를 그렇게 망쳐놓는단 말이요. 죽을려면 영금정
앞바다도 있고, 영랑호도 있고, 울산바위, 육모정 솔숲은 또 좀 좋은
가. 그 좋은 장소 다 놔두고 하필이면 내 집 구석이었는지 몰라. 원 재
수가 없으려니까. 다시는 혼자 드는 여자손님은 내 안받는다고 맹세
를 했으면서도 그놈의 돈이 웬수지. 설악산 단풍놀이에 사람들이 하
얗게 몰려왔다고 T.V에선 연일 떠듭니다만 몰려오면 뭘해? 콘도인가
하는 곳이 생기곤부턴 그곳에 손님 다 뺏앗기고 마는 걸. 그리고 색시
얼굴을 보아하니 그런 무모한 짓 할 나이도 이미 훨씬 지난 것 같고
…….
“걱정마세요. 죽을려고 온 사람 아니니까.
여자의 터무니 없는 오해에 어이가 없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
다.
“그럼요. 죽긴 왜 죽어요. 이렇게 좋은 세상 놔 …….
그러나 여자의 다음 말은 문 틈에 끼어 잘려 나갔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의심의 눈길을 슬쩍슬쩍 쏟아붓는 여자의 호기심이 싫어
내가 성급하게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잠이 말끔히 달아나버렸다. 비로소 나는 속초라는 것을
알았다.
몇 시 쯤이나 되었을까? 몇 시간 동안이나 죽은 듯이 잠 속에 빠져
있었을까? 머리 맡의 스텐드를 켜고 팔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바늘이 힘겹게 12라는 숫자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다. 주인여자가 호
들갑을 떨며 깨울만도 한 시각이군.
부엌바닥에서 시들어가고 있을 시금치가 떠올랐다. 우연히 켜놓았
던 T.V에서 새빨갛게 불 붙은 설악산의 단풍나무와, 파도가 하얗게
부숴지는 속초의 영금정 앞바다를 보았던 탓이었을까? 시금치 뿌리
를 다듬다말고 나는 무엇에 홀린 듯, 핸드빽과 웃옷을 챙겨 들고 허둥
지둥 강남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내달았다. 속초행 마지막 버스에 몸

을 실었을 때, 이미 어둠은 깊숙히 머리 위로 내려와 있었다.
살아가면서 1년에 한번 쯤, 두 서너 해에 한번쯤, 꿈에서 만천동의
그 집에 가는 때가 있었다. 성한 것이라곤 눈 부릅뜨고 찾아볼래도 볼
수 없이 망가지고 부숴진 고물들로만 가득하던, 생전 해가 들지 않는
것 같이 음습하기 짝이 없던 집.
꿈 속에서 계집아이는 오늘도 잠만 잤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잠 든
눈가엔 아직 채 마르지 못한 눈물이 여전히 배어나오고 있었고.
사납게 외면해도 누군가 가둬놓기라도 한 듯, 깨고 나서도 구석방
에 틀어박혀 잠만 자던 어린 계집아이 모습은 선연하게 남아 나를 붙
잡고 늘어졌다. 그런 날이면 나는 수세미처럼 헝크러진 머리속을 속
수무책으로 바라보며 손바닥만한 집안을 지루하도록 서성였다. 때로
는 기진해져 문지방을 베고 누워 눈을 감은 채, 속초에 가봐야지. 그
집에 한번만 가봐야지.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정작 날이 밝으면 실행에 옮기는 일이 왜 그리 엄두가 나지
않았을까.
속초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이미 자정무렵이었다. 내내 꾸벅꾸벅
졸던 사람들이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자 부리나케 제각기 어디론가 떠
나갔다.
땅에 발을 내 딛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붙박혀 우두망찰 서있었
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어색하게 악수를 나눌 때의 낯섦이
왈칵 달려들어 어딘가로 선뜻 발자국을 내딛는다는 것이 도무지 엄두
가 나지 않아서였다. 코 끝에 희미하게 감지되는 비릿한 바닷내음만
아니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방금 내린 냄새나는 버스 속으로 다
시 숨어들었을 것이다.
내가 왜 이곳에 왔지?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딱하게 서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
다. 마침 방금 도착한 버스의 기사가 터미널 광장을 가로질러 부리나
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의 나를 발견하자 기겁을
하며 놀랐다.
“누구요? 누가 이 밤중에 거기 혼자 서 있는 거요?

대꾸가 없자 사내는 금새 머릿속에 온갖 흉측스런 상상을 다 떠올
렸는지 비실비실 피해서 멀찍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왔다.
안전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던가. 사내가 문득 멈춰서서 흘깃 돌아보
며 서늘하게 내뱉았다.
“별 미친년 다보겠네. 간 떨어지는줄 알았구만.”
나는 비로소 주술에서 풀려난 듯 진저리를 치며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아마 사내의 악의에 찬 지껄임만 아니었다면 좀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서성였을 것이다.
나는 신작로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
등 불빛 아래 신작로는 어디에서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깨끗한 아스팔
트길이었다. 비만 오면 뻘건 진흙탕으로 변하던 지난 날의 황톳길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어쩌자고 내가 속초에 왔지? 무엇을 찾기 위해?
시의 외곽인 듯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술 취한 사내 하나 쯤
비틀비틀 지나갈 법도 하건만, 택시 한 대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발에 커다란 추가 매달린 것 같이 몸뚱이가 무거웠다. 얼만큼이나
거리를 헤매었을까. 불 켜진 24시간 편의점이 나타났다. 나는 그곳에
서 2홉짜리 소주 1병과 마른 오징어 1마리를 샀다. 그리고 얼마쯤 또
무거운 다리를 끌며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제목이 아주 따
뜻한 모텔 하나를 발견했다.
‘모텔, 나누는 기쁨’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모텔 이름을 읽어내려 갔다. 하늘을 배경으
로 갖가지 희망을 담고 두둥실 떠있는 거대한 애드벌룬처럼‘나누는
기쁨’은 캄캄한 밤하늘에 높이 떠서 희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금새 잔
등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이 홀가분해져,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모텔 문
을 밀고 들어섰다.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얇은 습자지에 싸인 물컵과, 일회용 칫
솔과, 하얀 타올이 머리 맡 문갑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 종이봉투 속
엔 두껑도 따지 않은 소주병과 마른 오징어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쉬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소주나 마실까했던 생각과는 달리, 잔뜩 졸린

눈으로 방을 안내하던 여자에게 금새 감염이라도 되었던지, 복도 맨
끝의 이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었다. 간
신히 윗옷만 벗고 그대로 이불 위로 쓰러진 기억이 났다.
물주전자가 눈에 띄자 단박에 목이 말라왔다. 나는 주전자 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러나 밤새도록 후덥지근한 바닥에 방치해져
있던 보리차는 갈증을 해소하기엔 너무 닝닝했다.
참을 수 없이 갈증이 몰려들었다. 주인에게 냉수를 청해마실까, 송
수화기를 들다가 나는 곧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어쩐지 한 잔의 냉수
로 쫓겨갈 갈증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밖의 찬 공기를 쐬면 좀 나아
질려나?
급해진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허둥거리며 얼굴과 머리를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우르르 교문을 쏟아져 나와 신호등 앞에 섰
다. 눈앞이 금새 환해졌다. 피어나고자, 더욱 피어나고자 아우성 치는
꽃봉오리를 보는 것 같아, 나는 가만히 꽃향기 맡는 시늉을 해보았다.
작은 풀씨라도 뒤져내듯, 나는 시리도록 청량한 그들의 해맑은 얼
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재잘재잘 이야기들로 여념이 없다. 은밀
스러운 표정으로 소근소근 속삭이는가 하면 갑자기 탄성을 내지르기
도 하고.
갑자기 소녀 하나가 팔이라도 꼬집혔는가, 높다랗게 비명을 내질렀
다. 이야기에 팔려 있던 소녀들이 일제히 말을 뚝 끊고 그녀를 쳐다보
았다. 소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까르륵 웃으며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소녀들이 덩달아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부러움을
담은 내 시선은 그들의 얼굴 위에서 비켜날 줄 모른다. 나는 한참을
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비명을 지르던 소녀는 친구의
허리를 안고 막 부풀기 시작한 가슴을 쿡쿡 찌르며 장난질을 치고 있
다. 아무 근심걱정이라곤 없는 태평한 얼굴들…….
나는 문득, 무리들과 저만치 떨어져 홀로 서있는 조그마한 계집아
이 하나를 떠올렸다. 입을 꼭 다물고, 웃지도 않고, 생전 누군가에게
비밀을 속삭이지도 않고, 세상 다 살아낸 것 같은 얼굴을 한.

길을 잃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몸이 긴장으로 빳빳해졌
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나는 조그만 계집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한다. 가만가만 지껄이는 어린 계집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다리 한 쪽 없는 고물상집 주인이 쟤네 아버지야.
친 아버진 아니고, 의붓아버지랜다.
쟤네 엄만 날마다 의붓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사는 걸.
그렇게 예쁜 여자가 매를 맞고 산단말이니?
우리엄마가 그러는데 예쁜 여자들이 팔자가 더 센 법이래.
쟤, 참 안됐구나. 친구도 없던 걸.
그래 늘 혼자서 학교에 가는 걸 봤어.
점심도 혼자서만 먹던 걸.
어느새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살아오면서 환상의 섬처
럼 가뭇하게만 느껴지던, 비현실적인 일이라고만 여겼던 일들이, 햇
빛에 반사되어 반짝!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 밑의 사금파리 조각처럼
느닷없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다니…….
나는 겨우 9살의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아이들도 아직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고, 둥둥 떠다니는 층계도 만들고, 꽃밭도
만들고, 인형도 만들다가는 금새 형체도 없이 스러지고 마는 구름조
각들을 바라보며 그저 신기해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할까? 이제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 따윈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일까? 어머니와 똑같이 먼저 남으로
내려온 남편을 좇아 오누이를 데리고 피난 나와 수용소에도 함께 있
었고, 쇠할 대로 쇠해 독이 오른 산나물을 캐다 그것만 며칠씩 삶아
먹고, 죽을만큼 밤새 토악질을 함께 하던 영옥이 엄마처럼 어머니도
개가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소나무 껍질쯤 벗겨 먹은들 어떠랴.
몰래몰래 생선 파치를 훔쳐내다 선주놈들 사나운 발길질을 좀 당한
들 대수랴. 어두워가는 시장의 한 귀에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백번이라도 시래기를 주울 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우리는 어느날
문득, 우리를 찾아 올 아버지의 발소리에 귀기울이며 기다릴 수는 없
었을까?

삶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피난민 수용소에서도, 다리 밑 거적데기 위에서도, 아침마다 잠을
깨면 어머니는 어디서 주운 것인지 모를 깨진 거울조각을 이리 저리
비춰가며 반듯하게 머리를 빗는 것이었다. 마법의 지팡이를 낡은 소
매 속에 감춰두기라도 한 듯, 어머니의 얼굴에선 아지못할 기운이 모
락모락 피어 올랐다. 우리 자매의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주며 어머니
는 기운차게 말했다.
“단정하게 입으려므나. 오늘은 네 아버지를 만날지 알 수 없지 않
니?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반듯하게 빗는 건 오직 네 아버지에게
보이기 위함이야. 오직 네 아버지에게…….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개가할 맘이 생겼었을까? 더
우기 한 쪽 다리가 없어 허수아비처럼 걸을 때 마다 바지 한 쪽이 흔
들거리던 고물상집 남자에게로.
영옥이 엄마 말이 맞을까?
“느이 엄마를 미워하면 느인 벌받는다. 피난 나온지 이태가 넘었지
만 느이아버 소식은 알 길이 없잖냐. 그동안 느이엄마가 얼매나 수소
문하고 다녔냐. 안할 말이다만 내 생각엔 느이아버지 삼팔선을 넘을
때 그때 잘 못 됐지 싶다. 고물상 주인 아니었다면 무슨 돈이 있어 영
희 너를 입원시켰겠냐. 자식 목숨 앞에서 느의엄마 혼이 다 나갔었다.
느의 아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쯔쯧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느이 엄만…….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의붓아버지에게 꼬투리를 잡혀 걸
핏하면 주먹으로 매 맞고 발길질을 당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어머니를 주인집 마님처럼 쩔쩔매며 떠받들던 의붓어버지는 언젠
가부터 하녀처럼 함부로 굴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걸핏하면 꼬투리를
잡아 어머니를 때렸다.
우리들의 방에 땔감을 너무 많이 땠다는 이유로, 찾아온 동업자에
게 너무 냉랭했다는 이유로, 너무 친절했다는 이유로, 쌀을 너무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그러나 언제나 귀결되는 건 하나였다.

“나무토막을 끌어안고 자도 네 년보다는 부드럽겠다. 비루먹은 개
새끼 꼴이던 것들을 금쪽 같은 내 돈 쳐들여 이만큼 사람꼴로 가꿔 놓
았으면 은혜를 알아야지, 빌어먹을 년, 흥, 나는 뭐 네 새끼들 밥이나
벌어다 먹이는 등신인 줄 아냐? 누굴 뭘로 아는 거야. 누가 모를 줄
알고?……. 네 년 머릿속엔 오직 먼젓서방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걸…….”
어머니는 우리들이 눈치 챌까, 언제나 매를 맞으며 비명을 삼켰다.
의붓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더욱 같잖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며 닥
치는 대로 망가진 고물들을 집어던지며 때렸다. 붉게 충혈된 눈을 희
번뜩이며 담배까지 피워 물고 재미난 오락게임을 벌리듯 매타작을 벌
이는 의붓아버지 입에선, 흥, 네 년이 소리 안지르고 배기나 보자. 그
런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광경들을 문 틈으로 엿보면서 속으로 소리질렀다.
엄마, 아프다고 엄살이라도 좀 부려요. 제발 아파 죽겠으니 그만 때
리라고 매달리며 사정이라도 하세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저 비명을 안으로만 삼킬 뿐이었다. 비명이 터
져나올까봐 머리에 썼던 수건을 끌러 입을 틀어막는 것이 고작이었
다.
어머니는 왜 나무토막 같이 뻣뻣하게 굴까?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
지를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저렇게 매를 맞다가는 머잖아 병신
이 되거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우리들과 도망치는 게 백번 낫
지 않을까. 영옥이네처럼 다리 밑에 천막 치고, 식구대로 깡통 들고,
이 집 저 집 비럭질을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그 집에 남아, 컴컴한 울안을 돌아 우리들
방에 밥상을 날라왔다.
어느날 언니가 울면서 말했다.
“엄마 도망가요. 우리끼리만 살아요. 차라리 거지가 되겠어요.
물끄러미 우리를 내려다보던 어머니가 한숨처럼 가만히 말했다.
“다 참을 수 있어. 너희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이까짓 건 얼마던지
참을 수 있고말고. 아버지를 만날 때 까지만, 머잖아 우리를 찾아 오
실 게다. 그때까지만…….”

문득, 아하! 하고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참 오랫
동안 내 곁에서 잘도 서성이고 있구나.
시내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지르며 급정거를 했다. 9살의 작은 계
집아이에게서 헤매던 나는 가까스로 놓여났다. 소녀들이 몇 버스에
올랐다. 차창을 열고 정거장에 남아있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
다. 나는 서있는 소녀들 중의 소매 하나를 황황히 붙잡았다.
“학생 만천동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떤 버스를 타야 하지?
소녀가 기이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옆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속초에 만천동이란 곳도 있니?
나를 기이하게 쳐다보긴 그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줌마, 속초에 만천동이란 곳은 없어요.
그중의 하나가 야멸차게 잘라 말했다.
만천동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커다랗게 되물으려다, 나는 붙잡았던 소녀의 소매자락을 슬그머니
놓고 말았다.
속초사람이 만천동을 모른다니……. 참 별 일도 다 있군.
마침 천천히 달려오는 빈 택시가 눈에 띄었다. 반가와서 차도까지
내려서며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진즉에 택시 탈 생각을 왜 못했을
까? 뒷자리에 오르기가 무섭게 숨 넘어갈 듯 말했다.
“아저씨 만천동 알지요? 그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이번엔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골짜기 양쪽으로 미루나무가 빼꼭이 늘어서 있잖아요? 지
금은 좀 변하긴 했을 거예요.
나는 절실해진 목소리로 애원하듯 설명했다.
“만천동이 맞아요? 손님께서 혹시 잘 못 알고 계시는 건 아닐 테
죠?
기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나는 그만 언짢아져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만천동이 분명하다구요. 택시기사가 만천동을 모른대서야…….

내 퉁명스런 핀잔에 어이가 없는지 기사가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기사는 대꾸없이 가속 패달을 밟기 시작했다. 택시를 몰아가
던 기사가 뜰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 앞에 스르르 멈췄다.
“할머니, 혹시 만천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만천동을 찾고 있는데
요.
그을음이 가득 묻은 것 같은 얼굴을 한 할머니가 눈이 부신지 손가
락으로 부챗살을 만들어 햇살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쳐다보았다. 할
머니가 느릿느릿 되물었다.
“지금 만천동이라고 했소?
기사가 대꾸할 틈도 주지않고 급해진 내가 냉큼 소리질렀다.
“예 할머니, 만천동을 알고 계세요?”
“젊은 새댁이 만천동을 어찌 아누? 그 이름 안부른지가 언제부턴
데……. 30년은 좋이 됐을 걸. 교동 알지요? 바로 거기가 만천동 자리
야. 성당이 있지요? 언덕에 높다랗게 있는 하얀 천주교말이요. 그 밑
에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잖소. 바로 그 동네야. 그 이름 참 오랜만
에 들어보겠는 걸.”
손바닥으로 부비면 서걱서걱 마른 가죽 소리가 날 것 같은 노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자꾸만 고마워져 뒤를 돌아보았다.
차창 밖으로 풍경들이 강물처럼 한가하게 흘러갔다.
국화 화분을 공원 입구에 늘어놓고 손님과 흥정을 벌이는 꽃장수가
얼핏 보이는가 싶더니, 곱게 물든 단풍나무 그늘 밑을 소년 둘이 자전
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치약거품이라도 입안에 잔뜩 문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서로 마주보고 활짝 웃는 그들의 모습이 투명
한 가을 햇살처럼 맑다. 눈길이 마주쳤을 리 없건만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이 흘러가자 이번엔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영글어 가는 감
을 따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다가왔다. 청년도 곧 지나가고, 신혼부부
인 듯 남자의 팔에 매달려 막 제과점을 나서는 새댁의 모습이 다가왔
다. 바람에 휘날리는 새댁의 빨간 스카프가 방금 전 보았던 길가의 사
르비아 꽃처럼 곱다.

신혼부부도 곧 시계바늘처럼 째깍째깍 지나갔다.
막 나들이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엔 주인의 옷
자락에 훌쩍 뛰어오르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이층집 마당의 발바리 한
마리가 시점거리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발바리를 끌어안고 주인이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기가 내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아 나는
가만히 웃었다. 얼마나 평화스런 모습인가.
방금 보았던 새떼가 생각났다. 햇빛에 반사되어 유리구슬처럼 반짝
반짝 빛나는 청초호수 위에 새떼가 깃털을 날리며 한가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30년쯤 훌쩍 거슬러 올라가면 화두 하나 끌어안고 초탈의 언덕을
오르고자 안간힘 쓰는 어느 수행승처럼, 어린 계집아인 또한 얼마나
호수 건너 먼 곳의 피안을 그리며 멀리멀리 가기를 꿈꿨던가.
아주 먼 곳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먼 곳 어디쯤엔, 이야
기 속에서나 나옴직한 빛나는 삶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게라고 여겼
었다.
목이 메어왔다. 지나간 날은 왜 아직도 말라버린 우물바닥처럼, 잎
떨어진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쓸쓸히 내게 다가서는가. 누렇
게 변해버린 사진 한 장쯤 들여다보며 미소짓듯, 그렇게 무심히 웃어
넘길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헛기침을 몇번 킁킁하며 울음을 삼켰다.
곱게 물든 가로수잎들이 바람에 편편히 떨어져 내렸다. 보도 위에
털썩 주저앉아 젊은 아낙이 아이와 함께 나뭇잎을 줍고 있다. 평화스
러운 모습이었다.
멀리 속초시가지가 한눈에 보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빌딩
들과, 눈이 모자라게 자욱히 늘어서 있는 아파트들이 울창한 숲을 보
는 것 같다. 너무나 낯설어, 여기가 속초가 맞긴 맞나? 의구심마저 일
었다.
부숴진 역사 주변에 때묻은 천조각들처럼 곳곳에 널려있던 피난민
들의 천막집은 내 상상이 빚어낸 것일까?
폭격에 군데군데 철로가 끊긴 녹쓴 철로변을 따라 한없이 먼 곳으
로 가고자 꿈꾸던 계집아인, 내 꾸며낸 이야기 속의 거짓 인물이었을
까?

나를 밴줄 알지도 못한 채, 6.25가 터지자 아버지는 삼팔선을 넘어
남으로 피난했다. 꼭 돌아오겠소, 라는 약속만을 남기고.
고향집에서 안타까이 돌아올 아버지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이던 어
머니는, 중공군이 밀려오자 무작정 집을 나섰다. 네 살배기 언니 손을
잡고, 뱃속의 나를 끌어안고, 어머니 머릿속엔 오직 죽으나 사나 늬
애비 찾아가자, 라는 일념 뿐이었단다.
속초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나는 내 삶의 닻을 올렸다. 자라면서 내
가 보았던 풍경 또한, 폭격으로 부숴진 철로와, 넝마조각처럼 곳곳에
널려있던 피난민들의 천막집과, 떼를 지어 몰려다니던 깡통 든 어린
거지들과, 보퉁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아들의 손을 잡고 남으로 피난
하는 모습의 모자상(母子像)이 조각된 수복탑이었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벌리던 희화적인 풍경이 아니었대도, 이
미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엔, 산에서 산딸기 대신 주워온 탄환껍질의 차
디찬 감촉과, 지렁이처럼 길게 철조망이 늘어서있는 삼팔선과, 모자
상을 조각한 수복탑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원천봉쇄적 사고를 형성
하였는지도 모른다.
내게도 꿈이 있었을까? 세상을 향해 내 자신에 대해.
영희야, 우리 함께 미래를 꿈꿔 보자. 꽃밭에 채송화도 나팔꽃도 심
으면서…….
그러고 보니 한 때 그를 통해 꿈 꾼 적이 있다.
그가 열기에 휩싸여 속삭일 때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그의 사랑
이 내 안에 생명있는 물체로 환히 타오를 수 있기를 바랬다. 내 피안
의 상징이기도 했던 나팔꽃이 피어있는 집…….
여름부터 가을까지 아침마다 눈을 부비고 나가면, 기와지붕과 나무
울타리를 타고 나팔꽃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며 피고 있는 집이 이
웃에 있었다. 내 또래의 계집아이가 살고있던 집.
햇볕이 진종일 마당 가득 환하게 쏟아져 내리던 그집엔, 나팔꽃말
고도 수 십 종류의 이름 모를 꽃들이 서리가 내릴 때까지 앞다투어 피
어나고자 아우성이었다.
빨간 리본을 머리에 꽂은 계집아인 가끔씩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세발자전거를 탔다. 계집아이 등 뒤엔 영낙없이 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을 퍼부으며, 다칠세라 지키고 섰는 그애의 젊은 부모가 있었다.
마당 가득히 망가진 고물들만 쟁여있던, 그래서 언제나 음습하기
짝이 없던 내가 살던 집과는 영 딴 세상인 그집은, 얼마나 내게 은성
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던가. 더 이상 더위를 참아내지 못할 지경의 한
낮에도 나는 곧잘 더위 꼭대기에 나가앉아, 머리카락 속을 파고드는
짧은 기쁨을 위해, 그집의 나팔꽃 넝쿨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여느 여자들처럼 나 또한 주례 앞에서 그에게 공순과 정절을 맹세
했었다.
정돈된 거실, 찬장속의 말갛게 닦인 그릇들, 아침마다 손을 흔들며
일터로 떠나는 그의 든든한 뒷모습, 그의 따뜻한 손, 어느새 익숙해져
가는 그의 잠버릇, 군데군데 비음이 섞여드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 그
가 물어나르는 바깥소식, 침실의 꽃무늬 커튼, 식탁 위의 싱싱한 장미
꽃 한 송이……. 시간이 조용히 지나갔다.
어느날이었을까. 찬거리를 사기위해 동네의 재래시장에 나갔을 때,
누군가 다급히 쫓아오는 기색이더니 사정없이 내 등을 나꿔챘다.
“이게 누구냐, 영희, 영희가 맞지?”
뜻밖에도 주름살 투성인 영옥이 엄마였다.
“살아있으면 언젠가 만난다더니만 여기서 널 만날 줄이야. 너의 엄
마 그렇게 죽고, 너희가 속초 떠난 지가 언젯적이냐? 15년도 더 됐
지? 그런데도 내가 널 한눈에 알아보았구나. 배추장수한테 네가 생긋
웃는데 볼우물이 깊이 패이더구나. 영락없는 늬이 엄마 젊었을 때 얼
굴이야. 결혼은 했니? 좋아뵈는 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구
말구. 딸년 팔자도 에미 팔자 닮는다는 말은 괜한 소리야. 부디 널랑
은 엄마 팔자 닮지 말아라. 잘살아야 하구 말구……. 다 잊고서…….”
눈물 콧물 다 뿌려가며, 언제까지나 내 손을 놓아줄 줄 모르는 영옥
이 엄마 손을 슬그머니 떼놓고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후부터였을 것이다. 아주 미약한 숨결처럼, 가느다란 입김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언듯언듯 나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
한 것은.

나는 훔칠 놀랐다. 무엇을 불안해 하는가? 오늘도 된장찌개는 맛있
게 끓고 있고, 그릴 속의 생선도 연기를 피워올리며 노릇노릇 알맞게
구워지고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 누구나 살아가면서 반갑지 않은 사람따
윈 수 없이 만나기 마련이지.
식탁 위엔 어젯밤 그가 선물한 장미꽃이 향기를 뿜어올리며 싱싱하
게 피어 있잖아. 오늘밤도 우리는 미래를 꿈꾸며 사랑을 나눌테고, 주
말엔 교외로 나들이를 나갈 거야. 견고한 성(城)이잖아. 누구의 침입
도 결코 용납할 수는 없어.
그러나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불안감은 여전했다. 그런 느
낌은 전생의 한순간처럼 때때로 되살아나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
이. 나를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어느새 관성이 붙은 성마른 섹스가 끝난 후, 등을 보이며 돌아눕던
그가 불쑥 말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딱한 생각이 들어. 웬 피해의식이 그리도 깊
은 거야? 단단한 껍질 속에 몸을 감추고 숨어있는 조개를 보는 것 같
아. 건드리면 더욱 깊이 숨어버리는 조가비말이야. 지쳤어.”
불시에 발가벗겨진 꼴이었다. 나는 한동안 수치심으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그는 차츰 아주 늦게 들어왔다. 어쩌다 한밤중 눈을 떠보면 깜깜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다 그가 장미꽃을 내게 선물하기도 했지만, 둘 다 멋적어 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장미꽃을 선물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일터로 떠
나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 그를 나는 아무 느낌도 배제한채 베란다에
서서 지켜보기도 했다.
어느새 퇴화되어 어린계집애처럼 납작해진 내 가슴 위에서 며칠씩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일었다.
어느날 막 회사에 도착한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아주 잠깐 정
이 뚝뚝 떨어지던 예전의 그의 목소리를 상기해 냈다. 그의 목소리는
그러나 아주 건조했다.

“미국지사에 지원을 했어. 오늘 오후에 출국해야 돼. 어젯밤 얘기
할까 했지만 전화로 얘기하는 것 하고 뭐가 다르겠어. 사람을 보낼테
니 간단하게 짐을 보내줘. 필요한 건 현지에서 구입할 테니까 많이 보
내지는 말고. 3년 동안이야. 그동안 우리,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
재인지 다시 조명해 봤으면 해.”
“손님, 여기가 손님이 찾으시던 동네인데 내려드릴까요?
아파트 동체들이 숲처럼 빼꼭한 단지 초입에서 문득, 택시를 스스
르 멈추며 기사가 물었다.
요금은 6400원이었다. 나는 만원짜리 지폐를 꺼내 기사에게 내밀
며, 거스름돈은 그냥 가지세요 . 말했다. 기사가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는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도무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다.
넓게 포장된길을 사이에 두고 아파트 단지 초입에 약국, 슈퍼마켓, 문
방구, 제과점, 꽃집들이 번화하게 늘어서 있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햇살은 아직 밝았지만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대도 내 한기는 여전했을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잠깐 했다.
만천동은 어디쯤일까?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는 가난했던 동네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는 동네 어귀에 윤기나는 이파리를 바람에 뒤척이며 평화롭게 서
있던 미루나무들을 떠올렸다.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청초호수는 겨울의 초입에서 이미 두텁게
얼어붙었고 멀리 설악산 계곡을 핥아 내려온 바람소리는 섣달 그믐밤
이 아니었대도 무엇 한가지 넉넉한 것이라곤 없는 만천동을 더욱 쨍
쨍 얼어붙게 만들었다.
잎이 필리 없건만, 어린계집아인 설을 지내면서부터 줄곳 동네어귀
의 죽은 듯 서있는 미루나무를 안타까이 내다보았다.
어느날 죽은 듯 서있는 나무에 어린잎이 노란기운을 뿜으며 꼬물꼬

물 돋아나고,이윽고 윤기나는 이파리들로 어서어서 자라나 만천동의
추위를 몰아내리라.
딱히 만천동을 그리워했던 것도 아니면서 쉬 떠나지 못하고 나는
왜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가. 오히려 살아오면서 흑판의 글씨를 지
우개로 지우듯, 기억 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어했던 곳이 아닌
가.
며칠을 두고 샅샅이 뒤진다해도 만천동의 그림자 한자락 만나기는
커녕, 나를 알아보는 이 또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러나 신기하리만치 형체도 없이 사라져간 동네에 대한 아
쉬움이랄까, 그리움이랄까,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삽시간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묻고 싶어졌다.
만천동을 아시나요? 게딱지처럼 낮은 천막집속에서 피난민들이 얼
기설기 모여 겨울을 견디던 그 동네를 아시나요?
나는 너무나 낯설게 변모해버린 길목들을 행여 낯익은 모습 하나
뒤져낼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자꾸만 기웃거렸다.
선창으로 넘어가던 고개는 어디쯤이었을까. 아침마다 이슬을 매달
고 앞 다투어 꽃이 피던 그 집은 어디쯤 있었을까. 나팔꽃이 음악선율
처럼 바람에 흔드리며 피어나던, 내 피안의 상징이았던 그 집…….
자신의 배회가 불어오는 바람을 접으려는 노력과도 같은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곳을 쉬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렸다.
두리번거리며 카센타 앞을 지날 때였다. 휘발성이 강한 신나냄새
탓이었을까. 마당 가득히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구들과 폐타이어 탓
이었을까. 길목들을 내내 기웃거리면서도 짐짓 외면하고자 애썼던 또
하나의 전경이 뚜렷이 떠올랐다. 음습한 마당 곳곳에 망가지고 부서
진 고물들만 사방에 널려있던 집. 생전 볕이 들리지않아 잡초들이 어
린 나의 키를 웃돌게 자랐었고,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위태해 뵈던
초가지붕위까지 이끼와 푸른 풀이 무성히 자라 유령의 집처럼 음산하
고 괴기스럽기까지 했었지.
날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빈도 또한 훨씬 잦아지던 의붓아버지
의 폭력처럼 어느새 어린 내 가슴속에도 그를 향한 살의가 나날이 독

버섯처럼 자라났었다.
산에 탄환껍질을 주우러갔던 그가 지뢰에 너덜너덜 헤진 주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끝내 나는 독을 묻힌 화살을 쏘아 그를 정통으로
맞혀버렸을 것이다.
목전에서 살의로만 끝날 수 있었던 행운에 나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를 화장한 후, 어머니는 고물상을 가차없이 팔아 넘겼다. 우리는
곧 그토록 간절히 바랬던 것처럼 오붓한 세식구만 되어 삼거리의 파
란대문이있는 스레트집으로 옮겨 앉았었다.
아침에 눈뜨면 철벅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니던 성난 의붓아버지의
발자국소리가 때로는 환청으로 남아 때때로 나를 놀라게도 했었지만,
그러나 마디마디 걸찍하게 괴어있던 의붓아버지에 대한 독한 기억은
어느 새 스르르 잊혀져갔다.
막막한 또하나의 기다림이 거의 신앙처럼 변질되어 가던 무렵, 예
기치 않았던 행운이 우리를 또 찾아왔다. 우연히 언니가 조간신문의
한귀퉁이에서 우리를 애타게 찾고있는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면 나는 자전거를 탄다. 꽃밭 넓은 집 계집아이처럼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세발 자전거를 탄
다. 날이 어둡도록, 치마가 후줄근해져 종아리에 끈끈하게 감길때까
지, 나는 언제까지나 동네를 돌며 자전거를 탄다. 내이름을 부르며 아
버지는 나를 찾아 나서리라. 이윽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
로 돌아오지. 돌아오는 길목에서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부른다. 생애 최
초의 노래가 될, 낮에 학교에서 배워온 노래를 커다란 목소리로 함께
부른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피었습니다. 아빠
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언제나 보기좋게 배반을 당하기 마련이던가 .아버지
를 만났다는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아지못할 서늘한 기운이 소
릿기 없이 우리를 침식해 들어왔다.
아버지는 매일 밤 몸을 가누지 못하게끔 술이 취해서 걸레처럼 구

겨져 돌아왔다. 처음엔 어머니가 달려들어 아버지의 신발을 벗기고,
옷도 벗기려 애썼지만, 몸도 가누지 못할 그 지경에서도 아버지는 냉
정하게 어머니의 손을 뿌리 쳤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노여움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얼마나 못견디게
괴로우면 아버지는 밤마다 술을 마실까. 남자인 아버지는 오히려 절
개를 굿굿이 지키며, 오직 우리들만 십수 년을 찾아 헤매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공순과 정절을 아버지에게 굳게 약속한 어머니는 약
속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오히려 훌쩍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개가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떠했는가. 아버지와는 결코 머리
카락 하나조차 비교할 수 없는 형편없는 위인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동안 목숨을 연명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버지에게 미안하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런 마음이 배가 될수록 어머니에게 냉랭하게 구는 것만이 아버지의
노여움과 서운함을 반감시키는 한 방법이라 굳게 믿었었다. 언니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결속되어, 어머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이래 가장 용감하고 잔인하게 어머니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리고, 목메인 음성으로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제각기 다른 방에서 낯선 사람들처럼
잠드는 날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노력은 빛을 잃어갔다.
어머니가 입은 옷은 자꾸만 헐거워져 갔다. 머리도 빗지않는 날이
많아졌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어둠속을 그림자처럼 집안을 끊임없이
배회하던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 ……. 살아오는 동안, 그 소리는 얼마
나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삶의 무게로 남아 있었던가.
나는 그 무렵 막연한 예감 하나에 시달렸다. 불안이 가슴께의 어느
부문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라 신경부리를 톡톡 쪼아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터무니없는, 그저 막연한 기우일 뿐이야.
그러나 막연했던 예감은, 영금정 바위 위에 달랑 고무신 두짝만 남
겨놓고 바다에 몸을 던진 어머니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멍게를 잡는 해녀들 손에 어머니의 집더미처럼 퉁퉁 불은 시신이
건져지던 날, 방문을 닫아걸고 언니는 실신할 정도로 통곡을 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근거렸다.
아버지와 나는 비가 연일 주륵주륵 내리던 어느날, 도망치듯 새벽
에 속초를 떠났다. 언니가 옷가지를 챙겨들고 우리곁을 떠난 건 그보
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아직껏 언니가 어떤 삶을 살아
가는지 풍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다.
노무자로 지원해 간 아버지 또한 연일 40도가 웃돈다는 사우디의
건설현장에서 오늘도 턱에 차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등짐을 나르는
것으로 회한의 길을 가고 있으리라.
문득, 스며드는 한기에 진저리를 치며 나는 앞섶을 여미는 시늉을
했다. 도무지 낯설기만한 이 거리를 나는 언제까지 배회할 것인가.
수녀 둘이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언덕위에 하얀 성당이 있지요? 그밑에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잖
았소. 거기가 바로 만천동이라 부르던 곳이야 .
친절히 일러주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수녀들의 걸음걸이가 한가한 걸 보면 산책이라도 나선 모양이었다.
발자국을 옮길때마다 허리에 찬 묵주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 거리는 왜 이리 평화가 넘쳐 흐르는가. 아무리 눈 부릅뜨고 샅샅
이 뒤져도 30년 전의 독한 상흔은 아무곳에도 없다. 화사한 색깔로 갓
도색된 아파트 동체들도, 번화하게 늘어선 가게들도, 바퀴가 조금 들
린 듯 경쾌하게 달려가는 차량들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까지도
다 평화가 넘쳐 흘렀다. 멀리 대형 쇼핑센타에 내걸려 깃발처럼 바람
에 나부끼는 현수막까지 평화가 넘쳐 흘렀다.
나는 지나가는 아무라도 붙잡고, 술주정 하듯, 주절주절 얘기하고
싶다.
이 거리는 왜 이리 평화스러운가요. 언제부터 평화가 넘쳐 흐르는
것인가요. 나를 보세요. 모든 것을 다 잃고 원망만 가득 남았잖아요.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답니다. 가족은 뿔뿔이 해체
되었어요. 생에 대한 믿음 또한 사라졌어요. 시간이 기억 속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리라 믿었어요. 그런데 나는 아직 이모양인 걸요. 남은 세
월 마저 그렇게 살긴 싫어요.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며 독한 기억을

끌어안고, 원망만 하며 살긴 싫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스로운 일이지
요. 전쟁이 있었을 뿐이잖아요. 누구의 힘으로도 어쩔수 없는…….이
젠 잊어버릴 거예요. 만천동은 사라진 이름인걸요. 지도 위에서 지명
조차 없어진, 옛 동네 말이예요, 이 거리만 기억할 거예요. 활기가 넘
쳐 흐르고, 평화가 충만한 이 거리만 새로이 간직할 거에요. 없어진
지명을 끌어안고, 심술굿게 늙어갈 순 없잖아요. 살아있는 것들에 대
해, 행복한 사람들을 향해, 질투만 퍼붓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
더할나위없이 애정을 가질 거에요. 지나간 내 어두운 시간들까지도
이젠 한없는 애정으로 보듬어 안을 거에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택시가 앞에 와서 슬며시 멎었다. 나는 무작정
택시에 올랐다.
“어디로 가실까요?
아파트숲을 한 바퀴 돌아, 쇼핑센타 앞에서 유턴을 하며 기사가 물
었다.
“대청봉으로 갑시다.
“대청봉요? 설악산 정상의 대청봉 말인가요?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요. 대청봉 꼭대기에 올라 신선이 되고 싶은데요.
“하하…….농담을 하시는군요.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유쾌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영금정, 영금정으로 가세요.
파도는 눈이 닿지 않는 먼곳에서부터 슬금슬금 밀려왔다.
나는 바위 위에 꼼짝도 않고 앉아, 발 밑에서 가볍게 부서지는 파도
를 눈이 아프도록 지켜보았다. 쪽빛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는 영금정
의 바다는 잔잔한 물결탓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다.
내 상상 속의 바다는 늘 성이 나있었다. 어쩌다 꿈에서 만천동의 어
린 계집아이를 보았을 때, 나는 영락없이 성난 영금정의 바다를 떠올
렸다. 집채만한 파도가 바위위에 달랑 얹힌 어머니의 고무신을 흔적
도 없이 쓸어가고, 집을 덮고 온 동네마저 순식간에 덮어버리고 마는
김성숙 241
성난 바다…….
어머니 바다가 왜 이리 평화롭습니까? 나는 오늘 드디어 쪽빛 바다
깊은 곳에 당신을 묻으려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