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29호1999년 [동화-이희갑]해 뜨는데 부터 해 지는데 까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811회 작성일 05-04-05 21:41

본문

“기상! 기상! 기상이다.
아빠가 외치는 소리에 민아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민
아는 눈을 비비며 텐트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왔습니다.
아빠는 민아를 덜렁 들더니 바닷가 모래밭으로 마구 내 달렸습니
다.
“아빠. 어지러워요. 아빠, 참!
“밤새 우리 민아 옆에 붙어있던 잠놀부가 이젠 달아났겠지?
아빠는 민아를 내려놓고 붉으스레 물든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엄마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아빠의 팔짱을 살며
시 꼈습니다. 민아도 아빠의 다른 팔에 자기의 가느란 팔을 걸어봅니
다.
붉으스레하던 수평선 위의 하늘이 점점 더 붉게 변하고 있습니다.
밤새 바다를 심술궂게 짓누르던 검은 구름이 수평선 위에서 점점 사
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푸르던 바다도 점점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수평선 위에 떠 있는 고기잡이 배 몇 척이 수평선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갈매기들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바다 위로 멋진 날갯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 뜨는데 부터 해 지는데 까지
민아네는 오늘 떠납니다. 아직 아빠의 휴가가 이틀이나 남았지만
오늘 아침 해뜨는 동해바다에 서 있는 날은 마지막입니다.
아빠는 올해 이상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주일간의 휴가를 동해에
서 사흘, 서해에서 이틀. 집에서 이틀. 이것이 아빠가 세운 엉뚱한 계
획이었습니다.
동해바다에서의 사흘은 이해가 되지만 나머지 일정을 잡은 아빠의
꿍꿍이 속을 민아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유난히 맑고 파란 물감이 진
하게 넘실대는 동해바다에서 더 긴 휴가 시간을 갖는게 민아의 바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의 계획을 알고 난 뒤, 엄마에게 일정을 변경
하자고 떼를 써 보았지만 엄마도 통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빠는 동해바다 해수욕장에서 보낸 이틀 동안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수평선을 향해 서 계셨습니다.
“이번에도 글렀어, 어젠 안개가 뽀얗게 끼더니 오늘은 웬 검은 구
름이 저렇게나 수평선 위에 첩첩이 쌓여 있는지---”
민아의 귀에 들어오는 아빠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비록 민아의 단
잠을 앗아갔지만 가슴 뭉쿨합니다. 해돋이를 보는 순간 그 동안의 어
려움을 싹 지워버리겠다는 아빠의 생각이 민아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
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걱정을 알아주기라도 하듯이 수평선 위 검은 구름은
몇 조각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해님이 새빨간 모
습으로 둥근 머리를 쏘옥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불덩이를 속에
다 안은 커다란 풍선이 점점 부풀려지다 불쑥 솟아 오르고 있는 모양
같았습니다.
“오, 저 태양! 저건 희망이다! 시작이다!
아빠는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아빠가 이번에 동해바다에 온 건 오직 해돋이를 보려는 생각이었습
니다. 점점 기울어 가던 회사. 아빠도 어쩔수 없이 회사를 나와야 했
던 아픔. 다른 일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실망의 한숨만 내
쉬던 날들. 며칠이고 집 안에서 꼼짝 안하고 누워만 계시던 아빠.
“희망까진 버리지 않으셨겠죠? 우리가 사는 길은 당신이‘할 수 있
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뿐이예요. 희망은 당신꺼예요. 희망까지 잃지

마세요.”
하며 우시던 엄마의 말씀이 아빠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보 그렇지? 희망까지 잃어버릴 순 없겠지? 누구도 내 희망까지
는 빼앗을 순 없는거야.
아빠가 희망을 이야기 하며 생기를 찾은 그 때부터 엄마는 더 눈물
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위로해 주시던 아빠의 모습
이 민아에게는 늘 마음 속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매일
할 일 없이 노는 사람이 휴가란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아빠는 이번
휴가는 해돋이를 동해바다에서 맞이하는 걸 목표로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날씨 때문에 해돋이를 못 보았으니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겠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 날의 그 희망을
어두운 밤 지나 가고 폭풍우 몰아쳐도
동녘엔 광명의 햇빛 눈부시게 비치네----
아빠의 굵직한 음성과 엄마의 맑은 높은 음성이 화음을 맞췄습니
다. 민아는 아빠가 저런 좋은 노래도 알고 계셨으면서 왜 여지껏 집에
서 한 번도 부르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평선 위로 덩실 모습을 다 들여낸 해님이 어느새 붉은 빛에서 밝
은 빛으로 빛깔을 바꾸면서 아침 바다를 번뜩번뜩 빛나게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민아네 가족 얼굴에도 빛나는 해님의 모습이 환하게
부딪혔습니다. 아빠는 노래를 다 부르더니 엄마와 민아를 꼭 품에 껴
안았습니다. 엄마의 눈가에도 아빠의 눈가에도 사르르 밀려오는 바닷
물처럼, 볼을 적시는 또 하나의 바닷물을 보았습니다. 기어코 민아도
밀려오는 파도 자락 위에다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자, 서둘러 떠나자. 이제 서해로 가는 거야.”
아빠가 서둘렀습니다. 텐트는 아빠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금방 쭈글
쭈글 모래밭에 뉘어졌고, 나머지 짐은 엄마의 빠른 손놀림으로 어느
새 승합차 안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부르릉!”
아빠가 숨을 한 번 크게 내 쉬더니 악셀을 지긋이 밟았습니다.
민아는 이제 다시 활기를 찾는 해수욕장의 모습을 눈에 담고 가려
는 듯, 눈길을 바닷가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운전하는 승합차는 어느새 설악산 아래로 내달렸습니다. 점
점 멀어지는 바다를 보며 아쉬워하던 민아는 문득 승합차 안에서 코
를 킁킁거렸습니다. 어느새 동해의 바다 냄새는 민아를 따라들어와
미시령 고개를 함께 넘었습니다.
이제 아빠가 계획한 또 다른 여행, 민아가 이해하기 힘든 여행이 시
작되었습니다.
달리는 차창밖으로 푸르른 여름날의 시골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옥수수가 서있는 구불구불 산비탈을 지나 파낸 감자 알갱이들이 뒹구
는 들녘도 지났습니다.
매미 소리가 귀따가울 정도로 요란한 미루나무 가로수 숲을 지나
고,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손을 흔드는 계곡 위의 다리를 건넜습니다.
넓은 강 위를 달리는 수상 스키와 한참을 속력 내기를 하며 달리기도
했습니다. 시골장이 열려 사람들이 북적대는 길 한가운데를 겨우 빠
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뽀얀 안개 같은 것을 뿌리며 논에서 병충해를
막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도시 한가운데를
도시의 차들과 한데 어울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민아네는 고속도로에 들어섰습니다.
아침 바다에서 본 해님이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구며 뜨거운 아지랑
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신나게 달
렸습니다. 하지만 곧 꽉 막힌 도로에서 땀 흘리며 턱 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거 야단났네. 해지기 전에 서해바다에 도착해야 하는데---”
민아는 하늘을 흘끔 쳐다보았습니다. 해님은 이제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힌 도로는 좀처럼 뚫릴 생각을 하질
않습니다. 제자리에 멈춘 차들의 긴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
어져 있었습니다.
민아네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도로의 무더위가

몸에 얼른 달라 붙었습니다.
“사고가 났어. 차들끼리 서로 먼저 가려다 부딪혔어.”
“이게 웬 꼴이람. 이럴 땐 집에 가만히 있는게 최고야.”
“휴가철만 되면 한꺼번에 이 난리를 치니----”
길가에 나와 앉아 도로가 뚫리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아빠는 초조한 표정을 짓다가 엄마가 물끄러미 쳐다보니까 씩 웃었
습니다.
민아네가 서해바다 해수욕장에 도착한 시간은 막 해가 지려는 시간
이었습니다. 아빠는 승합차를 세워놓고 짐도 내릴겨를 없이 엄마와
민아의 손을 잡고 해수욕장안을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뜨거운
모래밭이 발바닥을 따끔따끔 찌르고 있었습니다.
수평선 위 하늘에는 어느새 그 밝던 빛은 없어지고 다시 붉으스레
한 해님이 떠 있었습니다. 이제 곧 해님은 서해바다 끝으로 잠수하려
는 듯이 점점 기울고 있었습니다. 민아는 이제 아빠의 생각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해 뜨는 모습과 저녁에 해 지는 모습을 하
루 날에 다 보시겠다는 아빠의 숨은 뜻은 쉽게 알 수 없었습니다.
밀물이 되어 들어오는 서해 바닷가에는 제법 바람이 세게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엄마, 민아는 바닷가 높다란 둑 위에 나란히 앉았
습니다.
하루 종일 너무 지나치게 뜨거운 열을 토해 내고 이젠 지쳤는지 해
님은 동그란 랗고 평온한 모습이 되어, 민아네 가족들의 얼굴 위에서
빨간 빛으로 어른거렸습니다.
민아는 아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빠의 얼굴을 어느 때 보다도
평안했습니다.
“민아가 궁금한 모양이구나. 오늘 왜 해 뜨는데서 부터 해 지는데
까지 왔는지. 물론 해 뜨는데서 아빠는 새로운 생각과 각오를 다짐했
지. 이제 해 지는 데 와서아빠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가 민아의 손을 힘주어 잡았습니다. 민아는 우물쭈물 하였습니
다.

“오늘 우리는 이 곳까지 오면서 많은 일을 보고 겪었지. 사람의 하
루란 이런 거란다. 그리고 사람의 일생도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
해. 신나는 일 다음엔 답답한 일이 있었고 산골짜기를 지나면 평지가
나왔지.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지나자 꽉 막힌 도로를 만났어. 그리고
우리가 웃을 때 교통사고로 우는 사람이 있었지.”
해님을 처음 만날 때 모두 희망을 가졌지만 해님이 넘어갈 때 희망
도 시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아빠는 아침의 희망이 아직도 마음 속
에 그대로 살아 있는지 그걸 시험해 보고 싶었어.
민아는 깊은 뜻은 몰라도 아빠의 생각을 이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해님이 진다고 아쉽다고 생각 안해. 해님도 하루종일 얼마
나 많은 일들을 보았겠니? 그러나 해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저렇게 붉
게 타는 거야. 저 붉게 타는 뜨거움으로 내일 다시 솟아오를게 분명하
니까. 아빠는 지는 해 앞에서 더 앞날의 희망이 결심으로 굳어진단
다.”
해님이 서서히 수평선 너머로 잠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님이
남겨 놓은 고운 노을은 하늘과 바다를 그지없이 아름다운 빛깔로 바
꾸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양쪽에서 굳게 손을 붙잡은 민아네 가족들 눈동자 속에 그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머물러 물결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