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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1999년 [수필-이은자]텔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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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692회 작성일 05-04-0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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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많이 이용하는 전철은 5호선이다. 5호선 지하철 광화문
역에는 시간대를 막론하고 사람들로 붐빈다. 신분과 직업과 노소의
구별없이 사람물결로 일렁댄다. 그런 와중에 우스운 풍경이 자주 눈
에 띈다. 멀쩡한 사람이 혼자서 희죽거리거나 입을 벌죽거리면서 뭐
라뭐라 중얼거린다. 길을 걷다가, 의자에 앉다가, 차에 타거나 내리는
동작을 하면서도 계속 그런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혼잣말을 중얼대
거나 희죽희죽 웃는 사람을 볼 때, 그는 미친것이거나 이제 미쳐가고
있다라고 단정지어도 무방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결코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그네들은 핸드폰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을 따름이다.
직장생활 사년째되는 나의 막내는 자기 친구들이 이미 학창시절에
다 가지고 다니던 삐삐를 직장에 들어와서야 장만했는데 세상은 어느
새 핸드폰시대로 앞질러 와 있었다. 봄에 제 오라비가 핸드폰을 살 때
에도 그 녀석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망서리기만 했다. 자영업을 하는 오
빠에겐 필수품이지만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 안에 콕 박혀
있는 자기로서는 과용이라 했다. 그러나 광화문 거리에 나와 보면 내
막내의 삐삐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복입은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가지의 핸드폰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을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주 어릴적부터 절약, 절제에 관한한 어미의 말을
잘 따라준 녀석이다. 타당한 연유를 설명해주고 자기에게 납득이 가
면 잘 기다릴 줄 아는 아이로 자라주었다. 이젠 더는 말아야 할 것 같
다. 그 이상은 전근대적, 비효율적 만용이리라.
지하철역 벤치에 앉아 지하철를 기다리며 잠시 옛날로 생각을 옮긴
다. 아이들이 취학 전에 우리는 서빙고동에서 살았다. 그들이 자고새
면 놀러 가는 곳은 교회 마당이었다. 목사님은 서재 앞에서 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곧잘 불러들여 놀아 주셨다. 그 때는 온 동네를 통틀어
TV가 있는 곳이 교회 한 곳 뿐이었다. 그 시절은 한창 중동에 가서 돈
을 벌어 오던 때로 어떤 분이 거기서 돌아올 때 사다 기증한 것이었
다. 어린이 학교 저녁예배 직전에 TV를 켜주면 조무리개들을 모으는
데는 그 어떤 교사의 기발한 연재동화보다 확실한 효과가 있는 기재
였다. 정한 시간이 아니면 절대 TV를 켜지 않는 목사님이란 것을 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루는 제 오래비가 무슨 맘을 먹었던지 목사님 서재 문턱을 짚고
‘저희 엄마가요 우리도 코스모스 꽃이 피면 그 때에 텔레비젼을 산대
요’라고 삐죽이 말을 던진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부터 목사님은 우리
아이들에게 자주 물어보셨다. 너희집 코스모스는 아직 안 폈냐고. 그
해 코스모스는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야만 피는 꽃이였으리라. 목사님
은 아이들의 마음을 너끈히 읽으셨다. 우리 아이들이 코스모스는 아
직이라고 말하기만하면 그 말이 곧 텔레비젼을 보게 해 달라는 말인
줄 알아채시고는 잠깐씩 TV를 보여 주셨다. 약속한 대로 그 해 가을
나는 적금을 타서 19인치 흑백 TV를 사왔다. 뒷뜰엔 코스모스도 활
짝 피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이학년 되던 봄에 우리는 정릉으로 이사했다. 그
리고 나는 조그마한 가게를 차렸다. 이사통에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아니면 수명이 다한 탓인지 정릉에 와서 그 흑백TV가 자주 고장났다.
지금처럼 A/S가 잘 돼 있지 못할 때였다. 집 근처 매장에 수리비를
내고서 고쳐야 했다. 수리공 아저씨는 오기로 해 놓고도 자주 약속을
어겼다.

그 날도 나는 시간에 쫓겨 급히 부엌에 들어 갔다. 그런데 방에서
TV소리가 났다. ‘며칠전부터 분명히 고장나 있었는데.. 어느새 수리
공 아저씨가 다녀간 건가?’나는 영문을 몰라 안방에 들어가 보았다.
아랫목에 깔아두는 포대기를 덮고 오누이가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윗목에선 화면이 없는 TV가 소리만으로 연재 만화를 내보내고 있었
다.
“너희들 지금 뭐하니?”
“텔라디오 들어”
며칠 전 TV가 고장나기 전에 보던 영상을 떠올리며 지금의 저 소
리들을 그 상상 속의 영상에 얹어서 듣는 것이었다. 벌써 여러 날을
저런 식으로 만화영화를 감상했으련만 아이들은 어미에게 한번도 보
채는 일없이 진지하게, 또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텔라디오? 텔라디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와락 밀려 들었지만 다음 순간 저것도
이로울 수 있을거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상상력을 키우고
사고하는 습관도 생기고…
막내는 초등학교 내내 제 오빠의 옷을 불평 않고 물려 입고 자랐다.
막내의 대학 졸업식에 갔다오면서 또 한번 나는 그 옛날 텔라디오
가 생각났다. 그의 학교는 신촌에 있다. 차에서 내려 정문까지의 길고
도 번화한 거리는 온통 패션가다. 내가 그 나이적부터 멋쟁이는 그 거
리에서 물건을 고른다는 정평이 나있는 곳이다. 4년동안 별 이렇다할
옷 한벌 사준것 같지 않다. 그렇게 이 거리를 매일 오가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렸다. 녀석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꽤나 큰
돈도 벌었는데 몽땅 내게 가져왔다. 그 돈을 받아도 되는지 망서리는
내게 그는 말했다.
“용돈을 스스로 해결한다고 해서 모든 경제적인 부분을 부모로부
터 자립하는 건 아니쟎아. 용돈 말고도 더 많은 분량의 돈을 의존하고
있는데 뭐. 근데 이 돈만 내가 챙기는 것은 이치에 안맞는거 같아. 그
리고 엄마가 늘 그랬쟎아. 한 집안에 주머니는 하나여야 한다고. 나도
그게 좋은거 같아.”

아직도 막내는 월급을 내게 가져온다. 혼기에 찬 그의 돈을 맡는 것
은 책임마져 느껴진다. 요새는 현찰을 차곡차곡 정기적금 하는 것만
가지고는 옳바른 재태크가 못된다. 안정적이고 소득이 높은 상품을
선택하여 키워 줘야 하는데 실제로 내 둔한 이재 능력으로는 역부족
이다. 이젠 본인에게 맡길 때가 된 것 같다.
지하철이 홈에 와 닿았다. 나는 상념을 털고 일어섰다. 속된 말로
‘개도 물고 다니는 핸드폰’이다. 막내더러 속히 장만하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