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뫼 호수별 보기

29호1999년 [수필-이은자]쉘브르의 우산과 짜장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827회 작성일 05-04-05 21:43

본문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는 D친구의 가게에 전화를 넣어 우리가족
저녁식사를 예약했다. 친구의 아내는 언제나처럼 내 전화를 살갑게
받아주었다. 그들 가게는 강남역 부근에 있다. 좀 외진듯한 곳인데도
그 부인의 솜씨가 특별해서 오랫동안 꽤나 알토란같이 꾸려갔는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좀은 미안하고 또 아
쉬웠다. 그간 별반 이용하지 못한 것은 먼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항
시 빠듯한 내 가계부 사정 때문이었다.
가게를 치우고 뭘 할건가… 동창생들은 한결같이 염려한다. 어느새
대부분이 공직생활에서 정년퇴임, 명퇴하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
리라.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걱정하지 않는다. D의 아내를 나는 잘 안
다. 그는 활달하면서도 사려깊은 여인이다. 돈을 벌줄도 알지만 쓸데
를 더 잘아는 사람이다. 대책없이 생업을 치워버릴 사람은 아니다. 우
리가 조용히 있어주기만 하면 언젠가‘짠’하고 무엇을 열어보일 것이
다.
D친구와 나는 속초고등학교 7회 동창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닌 고향 친구다. 당시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반은 남학생반
여학생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렇지만 입시준비를 위한 보충수업만

은 남녀합반으로 운영되었다.
D는 물리, 수학에 뛰어났다.
삼각함수와 인수분해……. 웬만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정복할
수 없는 과목들. 그는 막힘이 없었다. ‘루트’의 값을 암기하는 것은
원소기호와 그 가(價)를 외는 것 만큼이나 힘들었다. 대학노트 두 페
이지 분량이나 개진해야만 얻어내는‘근’을 구해내는 그의 저력에 나
는 반해버렸다.
보충수업 때 교실 맨 앞자리, 교탁 코 앞에 D와 나는 책상 짝이 되
서, 머리를 맞대고 대수자의 눈금을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선생님들
은 물론, 반아이들 중에 아무도 야유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 자리는
어느덧 D와 내게 묵인 된 자리였다.
그 때 내겐 대수자가 있었다. 우리교회에 속초중학교 수학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대수자를, 그 보물을 일주일에 2, 3일씩 빌려 주셨
기 때문이다. 대수자는 두 세 페이지 헤메며 필산해야 하는 작업을 단
몇줄로 축소시켜 주는 마술램프 같은 것이었다.
모의고사가 잦아질 때 D와 나는 꾀를 냈다. 수학, 물리, 화학은 D
가 국어, 영어, 사회는 내가 맡아 요약을 해서 교환하고 가끔 보충설
명도 해주며 시간을 아꼈다.
우리가 아무리 모의고사 성적을 올리고 밤잠을 줄이건만 대학에 갈
수 있겠는지에 관해서는 둘 다 확답을 갖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네
부모들은 절대 가난 앞에 노출된 상태였다. 너무나도 초라한 그 분들
은 우리가 비벼댈 언덕이 아니였다. 우리 역시 떼 쓸만큼 철부지도 아
니였고…
그 부분이 우리들의 가장 큰 슬픔이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청호동 그 자리에 D친구의 옛집이 있다. 그 때
친구의 아버지는 그 집 마당에 건조장을 하고 있었다. 교회에 절기가
많고, 그 때마다 우리는 합창과 성극을 했다. D는 어떤 순서에도 끼지
않았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 들뜬날 낮부터 아이들은 교회로
모여왔다. 저녁에 있을 축하행사 총연습을 위해서였다. 나는 이웃에
사는 후배와 함께 D의 집으로 갔다. D는 고무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
를 신고서 자기 아버지를 도와 젖은 명태며 엮은 양미리를 덕대에 올

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에도 몇차례 D를 데려갈 요량으로 문간
방에 쳐 쌓은 초벌 말린 오징어를 펴서 재는 일을 여럿이 해치우고는
D의 아버지에게 허락을 얻어낸 적이 있었지만 그 날 그 젖은 일은 아
무도 거들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D의 아버지는 나를 소중하게 대해
주셨다. 내 아버지와의 교우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그분의
치켜 뜬 눈매는 우리들의 속셈을 아셨음이라. 기가 눌리게 무서웠다.
우리는 기가 꺾여 우물쭈물 인사하고 대문을 나섰다. D를 못데리고
우리끼리만 갯배를 건널 때 괜스리 눈물이 핑 돌았다. D는 밤 늦게 교
회로 왔고 새벽송 돌 때는 함께 돌았다.
입시원서를 발송하고 시험치르러 떠나던 날 D의 좁은 문간방에 너
댓명의 동지가 추덕추덕한 오징어 더미를 한켠에 밀쳐 놓고 둘러 앉
았다. D의 어머니는 마치 군에 나가는 아들 송별회나 하는 듯 우리에
게 군불까지 지펴주셨다.
D는 부산수산대학에 원서를 냈다. D는 그 학교의 보장된 장학금과
그 곳에 그의 고모가 살고 있는 점 때문에 그 학교를 지원하게 되었
다. 그는 우리들보다 이틀쯤 먼저 길을 떠나야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송했지만 D의 부모님이 묵인해 주어서 술을 먹었다. 남자들은 어땠
는지 몰라도 여자들은 처음 먹어 보는 술이었다. 몇 마디 노래도 불려
졌다. 공연히 눈물도 흘렀다. 이렇게 헤어져 진학의 꿈을 꾸어 보지만
보장이 없는 미지의 세계, 추운 타향살이 전야제라 해놓고 서로가 불
쌍해서 울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지 전혀 기억나
진 않지만 이홉들이 소주병 두개를 가지고 우리는 밤을 지샌 것이다.
그 새벽 우리들은 청초호 갯배줄을 함께 당겨 넘어왔다. 저마다의 눈
망울엔 물결따라 너울지는 불빛만 아롱졌다.
196X년 봄 방학인 듯 하다. 7회 동창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 광장, 동창회 장소가 고작 서울역 광장이란 연락을 받고서도
망서릴 이유가 없었다. 3년만에 만나는 고향 까마귀들은 그렇게라도
서로를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오래 기다려서 추운 친구들은 역전 다
방 한구석에서 잠시 잠시 몸을 녹이고 나오기도 했다. 그간 편지 한장

없던 D를 거기서 만났다. 그 때까지도 우리 대부분은 우편물을 주고
받을만한 주소하나 변변히 갖지 못하고 고학생이란 이름으로 여기저
기 얹혀 살거나 떠돌며 살고 있었다.
D는 틀림없는 대학생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면 누구나 입는 까만색
스텐카라 깃을 세운 정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왜 그리 추워만 보이던
지…….
나는 또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삼년 세월 속에 나는 대학생이였다가, 낙향해서 야학선생이였다가,
서울시청 촉탁직원이였다가 이제는 신접살림 차린 새댁으로 그 앞에
선 것이었다. 잔설이 녹는 바람이 찬데 따끈한 차 한잔없이 광장에 모
여 한바탕 왁자지껄 웅성대다가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갔다. D는 너
무 일찍 끝나버린 동창회에 어리둥절 했다. 그는 저녁 차표를 끊어 놓
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둘만이 있게 되었다. 주위에 아무도 아는 사람없이 황량한 서울역 광
장에 춥게 춥게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옷 소매를 잡아 끌었다. 미리 정
해 둔 곳도 없이 그저 길따라 걷다보니 명동입구에 닿았고 그 곳에 극
장이 있었다. 삼류극장인데 두 편의 영화를 연속상영하는 극장이었
다. 딱히 시간 보낼 곳이 없었던 우리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남녀 단
둘이 대낮에 버젓이 극장에 들어가는 일은 고향에선 어림도 없었다.
이런 자유로움이 실감나지 않았다. ‘쉘브르의 우산’
그 중 한 편의 영화였다. 우리가 몇해 전 떠나온 바닷가 마을, 가난
했지만 부모슬하에 살던 집이 있는곳, 아이들처럼 천진스런 남녀주인
공, 그리고 빨강, 노랑, 파랑, 예쁜 우산과 빗물이 흘러내리는 쇼윈도
우…….
몇 년간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남자가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 낸
소꼽동무는 만삭이 된 몸으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너무너
무 반가와 하는 장면이 왜 그리도 서럽고 아프던지. 오늘 우리가 헤어
지고 또 몇 년 뒤에 다시금 만날 때 서로 어떤 모습일까? 영화관을 나
와 서울역까지 다시 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영화자체가 슬픈 것이였던지 아니면 우리 처지가 슬펐던 것인
지…. 지금도‘쉘브르의 우산’은 내 기억에 슬픔으로 각인돼 있다. 그

때 내 손에는 겨우 짜장면 한 그릇 살 돈 밖엔 남지 않았다. 걷는 동안
내내 나는 망서렸다. 한 그릇 사서 나눠 먹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때 나는 결핵 중등증 환자였다. 건강한 몸둥이 하나가 전 재산인 D에
게 병을 옮겨 줄지도 모르는 일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노량진행 버스 속에서 나는 꼬깃꼬깃한 잔돈을 D에게 내밀었다.
‘밤기차라서 춥겠네. 뭐 짜장면 같은거로 요기나 하고 가.’주위를 의
식해서 D는 머쓱해 했지만 나는 그의 바지 호주머니 속에다 내 초라
한 돈을 넣어 주었다. 그렇게 두번째 작별을 한 D는 몇년동안 태평양
바다에서, 라스팔마스에서, 타고타고에서의 스탬프가 찍힌 편지를 보
내왔다. 나도 내 병세를, 회복됨을 적고 고향에서 올라오는 소식도 곁
들여 답장을 부쳐 주었다.
D가 장가 가던날 나는 유치원생이 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결혼을
하고서도 D는 그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신조선(新造船) 선주들이 앞
다투어 데려갔다. 그는 선장으로서 성공하고 있었다. 여러 항차에 큰
돈도 얻었다. D가 떠나 있는 동안 나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또 다른
우정을 쌓으며 지냈다. 그의 시집살이와 내 사업문제도 서로 의논하
고 연극도 보러 다니고, D의 소식도 함게 나누며 가깝게 지냈다.
연전에 그 호랑이, D의 아버지를 벽제 화장터에서 한 삼태기의 재
로 마주했을 때 고인에게 왜 그리 미안하던지. 청호동 덕걸이 마당에
서 D를 빼내던 때가 미안했다. 철부지 우리의 행동이 그 분을 그 노역
에서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어른은 내 친구 D같은
장한 아들과 좋은 며느리를 두어 소위 말하는 늙막에 호의호식하고
수를 다 누린 뒤에 큰 고통도 겪지 않고 생을 마감하셨으니 복이 많으
신 분이라 여겨진다.
D는 결혼이 늦었지만 충분히 보상받고 산다. 그의 아내의 열린 마
음 덕분에‘극단 미추’에 비밀당원(?)이더니 지금은 어엿한 홍보부장
이다. 교회학교 성극에 늦은 관객이더니, 지명도 높은 극단의 한몫 가
족이 되있다.

D가 바다생활 종지부를 찍고 서울에 왔을 때부터 지금의 가게를
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그 기간동안 방황도 심했다. 그 위
기의 시간들도 아내의 인내와 슬기로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 무
렵 나는 그들 내외가 베푸는 양질의 점심을 여러번 얻어 먹었다. 과히
식도락이라 할 수 있으리만치.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옛날 짜장면 한그
릇이 생각나서 격세지감 같은 걸 느꼈다. 한번도 나는 D에게 그 날 짜
장면을 사 먹었는지 아님 밤새 굶은 채로 밤차를 타고 갔었는지 물어
보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더욱 모르는 일이겠지. 대체 내가 짜장면
몇 그릇 값으로 되돌려 받고 있는지 셈이 안간다. 언젠가 동창들이 모
여 담소하는 중, D의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남녀간에 과연 우정은
존재할까 의문이였지만 ㅈ씨와 내 남편을 보면서 그게 가능하다는 생
각을 한다고.
모든 우정이 그렇듯 서로에게 무례하면 안될것이다. 피차간에 속박
감을 주어서도 안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어야만
된다. 특히 남녀간에 우정을 잘 보존하려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거
리를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는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된다.
‘쉘브르의 우산’
기억속의 그 내용은 희미하지만 그 영화제목이나 주제 음악을 대할
때면 지금도 왠지 가슴 한켠이 아릿하다.
그 날의 우리는 너무도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