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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1999년 [수필-이은자]아버지의 지도(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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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2,700회 작성일 05-04-0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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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문풍지가 바람을 막아내는 소리에 나는 어렴풋이 새벽
잠에서 깼다. 그런데 그날은 그 소리가 이상했다. 나를 부르는 소리도
겹쳐 있었다. “부강아……. 부강아아….”분명 내 이름이였다. 나는
이불자락을 들쳐 쓰고 무릎을 오그려 엎드렸다. 문풍지가 멎으면 그
소리도 멎고, 문풍지가 떨리면 그 소리도 따라 들렸다. ‘아버지? 어떻
게 아버지가…….?’
나는 옆에 누운 할머니를 세차게 흔들었다. 할머니는 단숨에 알아
듣고는 정지문을 열고 뜰로 나갔다. 속옷 바람에 맨발로 싸락눈이 하
얗게 깔린 마당을 질러 대문 빗장을 풀며“부강 애비냐? 부강 애비
지?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할머니 말끝은 오열로 이어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울음은 삼켜졌고 쉬쉬 두런두런 두 분의 이야기가 이어
졌다. 그러는 동안 윗방 뒷방에서 어머니와 삼촌들과 숙모, 고모들이
한덩이로 뜰에 나왔다. 사람 망태 속에다 아버지를 싸안고 정지로 들
어왔다. 내가 아버지를 만져볼 겨를도 안주고 어른들은 입에 입에 검
지 손가락을 세워 들고 수런 거렸다. 아버지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차
비를 하는 것이다. 곧 날이 밝을터라 아버지를 안전히 숨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말그대로‘거지’였다. 인민군
탈영병인 아버지는 겨울되면 우리집에 아침마다 들러 조반을 얻어먹

고 가던 거지‘태호’의 모양보다도 더 초라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6 25가 터지던 그 해 우리는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진에 살고 있었
다. 인공치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그곳에서 북으로 백리쯤 되는 홍
원이었다. 해방 되던 해 재산을 몰수 당하고 함흥형무소에 일년반 복
역한 일이 있었다. 출소 후 아버지는 흩어진 낡은 어구들을 손봐가지
고 짠바리(근처 해변에서 잡어를 잡는 작업)를 해서 대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붉은 깃발로 휘날리며 어떠한 경우라
도 기존 질서는 파괴되야만 하던 그 시국에 아버지에게 엄청난 제의
가 들어왔다.
‘흥남 수산물 판매소 경리과장’
지금으로 치자면 수협인 셈인데 국가에서 장악하고 있는 기관이었
다. 공산주의 혁명에 악질 부르죠아, 전과자, 비당원… 아버지는 많은
밤을 갈등으로 지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받아 들이는 쪽으로
내려졌고, 우리는 직계 식구만 챙겨서 흥남으로 옮겼다. 상처가 많은
고향을 떠나고 싶었을 아버지. 대가솔의 생계마져도 흔들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더는 없었을 것이다.
흥남에서 아버지의 일상은 매우 단조로왔다. 서재에 꽉찼던 문학서
와 인문서적들은 고향집에 그냥 두고, 윗목 쪽상 위에 유독 낯설고 두
툼한 책만이 달랑 놓인 채 별반 독서도 안하셨다. 훗날 내가 철이 들
어서 알았지만 그 때 그 책은‘볼쉐비키’관련서였다. 상아알로 만든
주머니용 주판과 그 책이 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것들이란 사실도 후
에 알았다. 퇴근하고 집에 와 있는 아버지는 저녁시간 종종 직장에 다
시금 불려가곤 했다. 그게 싫어서 아버지는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자
주 바닷가에 갔는데 어떤 날은 그곳까지도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를
데려갔다.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 모든 기득권자와
유산자와 식자들을 다 제거한 그네들끼리의 회의에 아버지는 비당원
이라서 끼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식(識)자가 문제다. 소장이 주
관하는 당회의건만 식이 딸리는 소장이 결말을 내지 못하는 사안이
있었다. 당측이나 로(노)선에 관계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휴대
용 주판과 쪽상 위의 볼쉐비키는 그럴 때 아버지를 세워주는 무기였
다. 어린 눈에도 아버지는 무척 고독해 보였다. 바닷가 모래불은 물놀

이 철이 아니면 스산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그 곳에
놓아 두고 먼데 수평선만 보고 있었다. 나는 찰싹대는 파도와 술래잡
기도 하고 조개껍질을 줍기도 하고, 곱새등, 왕눈이를 쫓기도 하며 혼
자 놀았다. 내가 한기를 느끼거나 놀이에 싫증나서 당신 곁에 주저 앉
아 고무신 속에 든 모래알을 털어 낼 때야 흠짓 놀라시며 내게 시선을
옮겼다. “갈까?”
검은 승용차가 아버지를 태우고 어디론가 다녀오는 날이 종종 생겼
다. ‘빨치산’에 가담하라는 회유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던 8월 어느날
우리는 흥남 비료공장이 폭격당하는 것을 보았다. 흥남공장들이 삼일
간 주야로 불바다가 된 직후 퇴근시간도 아닌데 아버지가 집에 왔다.
급히 어머니를 불러 배급통장과 도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지난달
도에 올린 결산표의 계수가 안맞는다고 호출이 왔다고 했다. 구실이
그렇지 내용은 그게 아니란걸 직감하신 듯 했다. 이번 길은 심상치 않
은 그 무엇이 있다. ‘일주일 지나도 오지 않으면 아이들 데리고 홍원
할머니에게 가 있어라. 언제고 거기서 만날 것이니 그리 알고…….’
아버지는 단숨에 이런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되돌아 갔다. 따가운 저
녁 햇빛을 마주하고서 오토바이 뒷자석에 앉아 그렇게 아버지는 흥남
을 떠났다. 아버지의 말 대로 아버지는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
다. 소장에게 물어보면 어물어물 행선지며 소재지가 묘연한 말만 늘
어 놓았다. 현지 입대 했다고도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예감을 인
정하고서 관사를 떠나서 방공호 가까운 오두막에 거처를 옮기고 홍원
가는 뱃길을 수소문 하였다. 유엔군 공습이 본격적으로 계속되고 기
차길은 군수물자 나르기에도 부족인지 밤에만 운행되므로 우리같은
입장에서 육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름에 그렇게 떠난 아버지의
소식도 모른 채 가을이 가고 겨울이 깊어졌다. 그런데 새해를 얼마 남
기지 않은 그 새벽에 아버지는 도적같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 때 우리마을은 이중구조를 가진 정세였다. 산에는 공산군, 마을
엔 국군, 치안대. 인민군 도망자로서 아버지의 신변은 아주 위험한 시
점에 있었다. 아버지의 출현은 반갑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어디론가 총총히 갔다. 돌아온 할머니
는 그 이후 우리에게 엄한 주의를 주셨다. ‘아무에게도 아버지를 말해

선 안된다. 아침저녁으로 물동이 속에 음식을 담고 드나드는 어머니
에게 아무도 말을 붙이면 안된다. 만약 그러는 날에는 아버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온 가솔이 몰살 당하는 날이다.’라는 주의를 어린 나도
알 수 있도록 다짐 다짐 시키셨다. 집 밖으로 나가 동네 아이들과 노
는 일도 은연중에 통제 당했다.
가슴 조이며 선잠을 자는 날들이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아서 다
행이었다. 국군이 주둔하고 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숨어지내지 않았
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1·4 후퇴가 감행되었다. 어쩔수 없이 우리
도 국군을 따라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이미 아버지에겐 가족을 태워
남하할 교통수단이 될만한 배가 없었다. 옛정을 잊지 않고 우리가족
을 자기들이 타고갈 목선에 동승시킨 사공들 덕택에 흥남항을 거쳐
월남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서호진 항구에 정박하는 하룻밤 동안 아버
지는 사공들에게 방한모를 짓게 하고 식량을 싣게 하고 생존에 꼭 필
요한 만큼의 물건만 통제하여 뱃짐을 줄이는 등 비장한 탈출 준비를
하였다. 마지막 철수 선박 LST가 묻 인간들의 절규를 못다 싣고 닻
줄을 끌어 올리던 그 날에 우리도 가랑잎 같은 목선에 다섯 가족의 생
명을 얹어 출항했다. 날씨가 흐리고 눈발이 얼핏얼핏 날렸지만 선택
의 여지가 없는 철수의 날이였다. 축항 끝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갑자
기 한 청년이 물 속에서 손을 올려 우리의 뱃전을 잡았다. 그는 소리
치고 애원했다. 살려달라고, 함께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누군가 사
공 한사람이 달려들어 그의 거머쥔 손을 밟아 짓이겼다. 청년은 비명
을 지르며 다시 물 속에 첨벙 떨어지고 곧 멀리 사라져 버렸다. 전쟁
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항시 그 장면을 떠올려 말할 수 있다.
그 밤에 우리는 원산 앞바다에서 수장될 운명이었다. 사공들이 제
일 겁내는 원산내기를 만난 것이다. 두 개의 돛은 이미 다 상해버렸지
만 우리는 계속해서 최대한의 속력으로 집채같은 파도 속을 뚫고 나
갔다. 갑판에 덮히는 물, 금방이라도 뒤집혀 버릴 것같은 배, 칠흑같
은 어둠, 혹독한 추위, 욕설, 아우성….
아버지는 몸을 동아줄로 갑판에 묶고 도사공과 함께 키를 잡고 그
밤을 버티 었다. 금강산 통천 해안은 이미 인민군 진영이 돼 있어서
철수하는 배들은 모두가 공해상으로 운행할 수 밖에 없었다. 말 그대

로 우리들은 사선을 넘어 새벽 미명에 주문진 항구에 다달았다. 하룻
밤 뱃길에 어버지와 사공들은 입술이 갈래갈래 찢어져 피딱지가 앉았
고 눈은 휑하니 십리나 들어가 있었다. 하늘이 도와서 우리는 살아났
다. 국군은 계속 후퇴하고 우리도 부산 영도섬에 정박했다. 겨우내 갑
판에 있었던 탓에 나는 폐렴이 심해졌다. 사경을 헤매는 나를 살리겠
다고 아버지는 다대포로 가족을 옮겼다. 거기서 나는 겨우 회생되었
다.
다대포는 뒷동산에 올라가 넘어다 보면 낙동강이 보이는 곳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지도를 햇볕에 말리고 아랫목에 깔아두어 구김살
을 펴곤 했다. 그 지도는 전에도 내가 몇번 본 적이 있는 지도다. 인민
군에서 도망해 올 때 그 지도가 목숨을 살렸다고 했고, 원산 앞바다를
넘어 부산까지 갈 때에도 그 지도가 여러번 목숨을 살려 주었다고 했
다. 아버지의 지도는 수첩같이 보였다. 싸이렌식으로 접은 것인데 한
쪽은 내륙의 것이고 다른 한쪽은 바다를 그린 것이다. 글씨는 모두가
일본문자였지만 분명 우리나라 지도였다. 5십만분의1 지도라는 아버
지의 설명이 어린 내게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초행길을 그
지도 한장에 의존하여 정확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는 것과 폭풍 속에
서 해안선과 섬과 항구를 찾아 배질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고 두
고 내게 의미를 갖게 했다.
지난 해부터 새삼스레 그 아버지의 지도가 생각난다. 한일 어업 마
찰이 협상테이블로 이어질 즈음 속초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기
만 했다. 그 곳 어부들은 생계에 큰 타격을 예상한다고 했다. 한일 관
계는 언제나 찜찜하고 기가 막힌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떼를 쓰
더니 조업 구획을 들고 나와 금긋기를 해댄다. 한일 어업 마찰은 결국
텃밭 싸움인 셈인데 잘될까 염려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은 체
결되었다. 표면상으로 보자면 그럴듯하게 금을 긋고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어부들은 손을 놓고 넋두리를 해댔다. ‘관리들이 뭘 아느냐.
우리에게 물어 봤어도 어디다 어떻게 금을 그어야 하는 가를 말할 수
있다. 이번 협상에서 금그은 곳은 고기떼가 지나 다닌는 곳을 모조리
일본쪽 바다로 지나게 한 것이다. 고기들도 다니는 길이 있다. 일본은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 넓은 해역을 따냈다고 해도 그건 빛좋
은 개살구다…’.
아버지의 지도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
지도는 적어도 1910년대 이전에 제작됐을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테니까. 남의 땅을 강점하고 그곳 산물
을 수탈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버지의 지도처럼 정확하고 세밀한 준비
자료를 마련해 놓은 자들이다. 지금은 그로부터 또 얼마를 발전해 온
세월인가. 우수한 수중장비와 통신기기 그리고 컴퓨터의 시대다. 아
버지 지도의 수준으로 지금까지 나아갔다면 지금쯤 그들이 갖고 있는
한반도 지도는 속초 앞바다에 암초까지라도 몇개가 어디에 숨어있는
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욕심 많은 이웃이 내집 앞 텃밭을 넘겨보고
잣대를 교묘히 대고 금을 긋는 지경에 우리는 남과 북이, 여와 야가
집안 싸움만 하고 세월을 낭비했다. 옛말에 손톱밑이 곪는건 알면서
염통이 곪는것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요즘 우리는 너무나도 근시안
적으로 미래를 설게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 아이가 잘커서 좋은 위치
에 입문하면 앞날이 보인다고 하겠지만 그네들이 놀 수 있는 마당을
확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
렸을 적에 속초 어부들의 소원은 북방한계선을 한 눈금만 더 올려줬
으면, 통신장비가 좀 나아졌으면, 배가 좀더 컸으면, 냉동 수단이 얼
음이 아니라 자체 냉동 가능했으면하는 것들이었다. 지금 그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선된 여건을 가지고 그물을 던질 바다를 잃
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부들에게 바다는 더이상 희망이 아
니라고 한다.
비단 어업뿐이랴. 지금 우리는 소를 잃고 난 뒤에 겨우 외양간을 고
치는 척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다 하면서 그들
의 텃밭도 못지켜내는 이땅의 부모들은 부끄럽지 않은가. 과연 우리
는 그 옛날 내 아버지의 지도보다 더 훌륭한 지도를 후세들에게 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