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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1999년 [수필-강호삼]<갈뫼> 동인지와 함께 30년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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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lmoe
댓글 0건 조회 3,331회 작성일 05-04-0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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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창립총회를 열고 동인회 명칭을 설악문우회로 정했
다. 회장은 윤홍렬 선배님이, 총무는 필자가 맡기로 했다. 역시 이 창
립총회에서 동인지도 발간키로 결정을 보았는데 동인지 제명은 전술
한데로 박명자씨가 제안했던 <갈뫼>로 정하고. 동인지의 성격은 시,
소설, 수필, 동화, 동시, 평론 회곡등 문학의 전체 장르를 포함하는 종
합지 형태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모으고 동인지를 발간키로
하는 등 조직의 외형은 대략 갖추었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인지에
게재할 원고수집과 책을 만들 출판 비용이었다. 책 한권 분량의 원고
를 수집하는 일은 회원들의 몫이라 그럭저럭 해결될 일이었으나 출판
비용은 회원들이 갹출한 회비로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의논
끝에 시내 유력인사들의 찬조를 얻기로 하고 거리로 나섯다. 수산업
체와 병원 약국 등을 방문해서 취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그
반응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어서 방문 판매나 잡상인 구걸하려
온 사람 취급에 다름 없었다. 그런 중에도 도움을 준 분들은 여러분
있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케이블 카를 운영하는 설악삭도주식회
사는 지금까지도 설악문우회의 후원자이다. 속초시와 당시 시청옆에
서 병원을 운영하시던 이기섭씨, 신흥사에서도 얼마간의 출판비를 협

조 받았다. 그러나 그 액수란 출판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도움을 바라는 우리의 접근 방법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
만 당시의 속초는 명태 오징어 성어기의 유동인구를 모두 합쳐 인구
오만여의 수복지구로, 이제 겨우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는 우
리나라 최북단의 잊혀진 작은 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처음부터 아무
도 동인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동인이 구성되었으나
동인들 자신도 실제로 책이 출판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
람이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쓴 글이 활자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속초사회는 문화와 예술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
국적으로 보아도 동인지가 발간되는 도시란 거의 없었다. 한 두곳 동
인지가 발간된 곳이 있었으나 1 2호로 중단되거나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 대부분이었다. 강원도내만 하더라도 강릉의 황금찬, 윤명, 신봉
승씨 등이 이끌던 관동문학회가 구성원의 전근 서울 진출등으로 해서
동인활동이 사실상 중단돼 있는 상태였다.
이런 여건에서 동인지를 발간하겠다는 것은 사실 무모한 것이나 다
름 없는 일이었다. 어떻든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하겠다고
스스로 그 주도적 역활을 자임하고 나선 한 사람으로써는 이런 사회
적 환경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선 책을 출판할 인쇄시설이 있
는지 수소문했으나 명함이나 신문속에 넣어서 배포하는 광고지와 공
문서 양식 정도를 인쇄할 수 있는 시설 두 세 곳이 고작이었다. 그 중
에서도 조금 규모가 큰 곳이 동아서점 건너편에 있는 문화인쇄소로
보유하고 있는 활자가 많이 마모되긴 했으나 책을 인쇄할 경우 새로
주조된 활자를 서울에서 들여오는 조건으로 책을 만들기로 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쇄소였다. 더우기 우리 모두 책을
인쇄해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책의 편집은 당시 순수문예지의
원형과 같았던 현대문학의 편집을 모방했으나 조판은 인쇄소 직원의
몫이었다. 조판을 했다가 해체하고 다시 판을 짜서 인쇄를 하고 교정
은 동인들, 주로 최명길 이성선 김종영 필자가 돌아가면서 보았다. 이
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동인지 <갈뫼>가 출판되고 그 출판 기념과
문학의 밤 행사를 가진 것이 1970년 4월 21일이었다. 출판 기념 문학

의 밤에 중앙문단의 인사로는 시인이자 한학자이신 이원섭선생님을
초청하였다. 중앙문단의 인사를 초청하기로 발의가 된 것은 동인지
인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중앙문단의 저명인사를 초청하는
것에 대해서 동인들간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초청에 따른 비용도
비용이지만 문학활동에 대한 순수성을 문제 삼는 동인이 있었다. 그
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그 동안 동인들 각
자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집필한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역
량있는 동인들의 중앙문단으로의 진출을 위해서는 그 진출의 고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중앙문단으로의 진출 가능성과 동인활
동에 대한 자신감을 한 층 고조시킨 쾌거가 동인인 김종영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김종영동인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부
분 현상모집에 응모한 동시가 당선된 일이었다. 김종영 동인은 당시
영랑동에 있는 영랑국민학교에 봉직하고 있었고 집은 중앙시장에 있
었다. 부모님이 신발가게를 하는 2층에 살림집이 있었다. 김종영 동
인의 외모는 얼핏 보아 사진에서 보는 강원도 평창출신의 작고 소설
가 이효석의 얼굴을 연상케 하는데가 있다. 큰 눈에 안경을 낀 모습도
그러하려니와 전체적인 윤곽도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말수가 적은
조용한 성격에 감수성이 예민한 크고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김종영 동인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은 우리
설악문우회는 물론 강원도내 전체문단에 소리 없는 신선한 충격과 감
동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동시에 오징어나 명태산지로만 겨우 알려
져 있는 수복도시 강원도 속초에 문학동인회가 결성되고 <갈뫼>라는
동인지가 출판된 일도 사건이라면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출판된 책
200여권은 전국각지에 배포되어 속초에도 문학과 예술이 있음을 알
리고 서울과 지방문단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출판기념회에 초청된 인사 가운데 시인 이
원섭님은 윤홍렬선배님과 혜화전문학교를 같이 수학한 분이었다. 특
히 한문학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당대 제일이라는 이가원씨와 쌍
벽을 이루는 한학자로 논어 장자 등의 역서가 있고 <문장>지를 통해
서 문단에 등단하신 분이다. 키가 크시고 얼굴이 흰 전형적인 선비이
셨는데 이 분에 대해서 특별히 잊지 못하는 것은 이 분이 <갈뫼>동인

들에게 기울인 애정도 애정이지만 필자로써는 <고향의 봄>등 동시로
써 널리 알려진 아동문학의 작고하신 이원수님과 또 동인인 이은자씨
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할뻔한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사건이 있었기 때
문이다. 1978년 11월의 초겨울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갈뫼>동인지
와 최명길형의 첫시집 <화접사>의 출판기념회 연사로 이원수 이원섭
두분이 속초에 오시기로 된 날이었다. 속초까지 가는 비행기편등의
섭외를 서울에 사는 이은자씨와 필자가 맡았다. 필자도 그 때는 집을
속초에 둔채 서울 중앙관상대 예보과에 전근을 가 있던 시기였다. 약
속한 시간에 김포공항에서 이은자씨와 함께 두분을 만나 비행기에 탑
승하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전날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에 히끗히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속초행 비행기편이 현지의 공항 활주로 사
정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낭패였다. 현지인 속초에서는 며칠전부터
두 분의 문학강연을 크게 홍보하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공
항의 장내 방송으로 속초행 비행기의 운항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확
인하는 순간 이은자씨와 필자는 동시에 낭패한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
을 마주 바라보았다. 만약 이 두분이 속초에 가지 못할 경우 현지에서
의 실망과 낙담을 너무나 생생히 알고 있는 터였다.
<강선생님 ! 어떻게 하지요?>
이은자씨의 시선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필자로써도 달리 방법이
있을리 없었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어떨까요?-
-고속버스 말입니까?-
필자가 반문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두분을 속초로 모시고 가
서 저녁 6시에 시작되는 출판기념회 전까지 설악산 관광이라도 시켜
드릴 요량으로 속초행 첫비행기편을 탑승하기 위해 아침 일찍 공항에
나온 터였다. 비행기편은 취소되었지만 이 길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고속버스를 타면 충분히 저녁 6시까지 속초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폭설이 내리지 않는한 고속버스는 예정되로 운행될 것
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가 문제였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두 분도 흔쾌히 동의하셨다. 부랴부랴 항공권을
무른 뒤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영동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지만 서울은 이따금 햇빛도 보이면서 토닥토닥 싸락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싸락눈은 휘- 바람이 불때마다 도로의 이곳저곳을
허옇게 밀려 다녔다.
다행히 고속버스는 예상되로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한발 앞
서 매표구로 급히 달려간 이은자씨가 활짝 웃으면서 버스표를 들어보
였다. 출발시간 십여분을 남기고 있어서 서둘러 터미널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중간쯤인 지정좌석에 통로를 사이에 두
고 왼쪽켠에 이원수 이원섭 선생님을 모시고 오른쪽 두 좌석에 이은
자씨가 창쪽에, 필자가 통로쪽에 자리잡고 앉았다. 눈이 내리는 음산
한 날씨인데도 버스안은 히터가 가동되지 않았고 좌석도 대여섯자리
가 빠진 잇발처럼 비어 있어 무척 을씨년스러웠다. 출발시간이 되어
서야 운전기사가 올라와 히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제서야 차안에
훈기가 돌았다. 운전기사가 터미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차를 후진시켰
다가 다시 전진 기어를 넣고 핸들을 꺽을 때였다. 미처 차 시간에 대
지 못한 여자승객 한 사람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흐릿하게 성애가
낀 승강구 유리창문을 매달리다시피 따라오면서 두들기는 모습이 보
였다. 운전기사는 그냥 못본척하고 가려고 했으나 승강대쪽에 서 있
던 검표원이 달려와서 버스문을 열도록 했다.
-씨발! 무슨 지랄하다가 차시간을 놓쳐.-
운전기사는 무엇 때문인지 기분이 몹시 안좋은 것 같았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애궂은 버스 승객들을 상대로 자신의 얹짢
은 기분을 토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삼십대 후반쯤으로 돼 보이는
곱상한 얼굴을 가진 여자승객이 허겁지겁 버스에 오르자 운전기사는
-여보시오. 대체 뭐하는거요. 당신이 이 버스 대절했소-라고 다시 큰
소리로 무안을 주었다. 운전기사는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
나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음에 틀림 없었다. 너무 심하다 싶었지
만 운전기사의 기세가 하도 등등 해서 누구 한사람 여자의 편을 들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어라 했다가는 당장 구정물 같은 불호령을
들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어떻던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접어들었다.
겨울의 정취는 뭐니 뭐니해도 눈이다. 함박눈이 펑펑 내려서 온 산

하가 백설의 하얀 눈에 뒤덮인 정경이란, 우리가 일상의 찌든 사회생
활을 하면서 잊어버리고 지냈던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술과 같은 힘이 있다. 더구나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세상사 모두 잊
고 홀가분하게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것이 없는
터다. 함박눈이 내리는 건 아니지만 차창에 부딪혀 녹으면서 미끄러
저 내리는 눈을 보며 필자는 오히려 비행기 결항이 잘되었다는 생각
을 했다. 필자는 당시 집이 속초에 있었고 직장이 서울에 있어서 한달
평균 두 번 이상 속초와 서울을 가고 오고 했으나 교통비 탓도 있지만
대부분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비행기 여행이란 시간을 줄이
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순수한 여행이
라는 측면에서는 버스에 견줄바가 아니다. 더구나 영동고속도로를 달
리면서 버스 차창으로 보는 강원도의 사계는 어느 계절이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우아하고 덕스러운 새악씨가 부시시 긴 잠에서 깨어
나듯 온 산하가 여린 새싹을 밀어 올리는 봄이면 봄대로, 한 껏 물이
오를데로 오른 성장한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만산이 홍엽으로 울긋불
긋한 가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눈 덮인
강원도의 들녘과 겨울의 설악산을 보지 않고는 감히 강원도의 사계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겨울 그것도 눈오는 날에 만
사를 제쳐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하
나의 행운일 수 밖에 없었다.
이원섭 이원수 두 선생님은 버스가 출발하고서 처음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고속도로로 들어선 버스가 본격적으로 제 속력
을 내면서 달리기 시작한 후부터 주무시는지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이은자씨와 필자도 오늘저녁 속초에서의 행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을뿐 입을 다물고 저마다 눈내리는 차창밖을 내다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버스가 신갈 인터체인지를 지나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눈발은 제법 굵어지고 내린 눈이 도로에 쌓이고 있었다. 버
스안은 단조로운 버스엔진이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문득 필자는
아! 이 눈내리는 날 눈으로 인적이 모두 끊어진 산장에서 참으로 다정
한 사람과 함께 벽난로에 장작불 활 활 지피고 따뜻한 커피 한잔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버스가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중앙선을 넘는
다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를 들어 앞을 보는 순간 운전석 앞 창을 통해
도로 왼쪽의 산기슭을 절계한 바위벽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었
다. 이어 쿵!하는 소리가 앞쪽에서 나고 버스가 뒤로 조금 튕겨져 나
간다는 느낌과 함께 버스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드러 눕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드러눕는 반동으로 다시 버스가 바닥을 위로하고 반만큼
차체를 일으키다가 유리와 차체 찌그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필자
가 앉았던 차창을 바닥으로 하고 옆으로 눕는 것이었다.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상황은 순간적인 것이었다. 비명과 함께 안전밸트를 매지
않았던 두 사람이 버스안을 이리저리 딩굴었다. 창쪽의 이은자씨는
땅바닥에 허리를 구부리고 누운 꼴이었다. 버스는 옆으로 누운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필자는 이원섭 이원수 두분의 안전이 염려되
어 먼저 눈을 들어 위쪽을 보았다. 순간 그 경황중에도 픽-하고 웃음
이 나왔다. 두분 선생님이 마치 엮어놓은 양미리처럼 안전벨트에 묶
여 공중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두분 다 다친 곳은 없는 듯
이 보였으나 두분 모두 연세가 높으셨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네 괜찮아.>
이원수 선생님이 입가에 그 분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
를 지어 보이면서 안심하라고 아래쪽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이원섭선생님도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필자가 먼저 안전밸트를
풀고 일어나자 이은자씨도 묶인 안전밸트를 풀고 일어나 함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두분을 모시고 깨진 버스 뒤 유리창을 통해 엉금엉금 기
어서 밖으로 나왔다. 버스안에 있을때는 몰랐는데 바깥은 눈발이 더
욱 굵어져 있었고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었다. 다행히 안전밸트를 매
지않았던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친 승객들이 없는 듯이 보였다. 운
전기사가 졸음 운전을 하느라 버스의 속력을 내지 않아서 그나마 큰
부상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버스 밖으로 나온 우리는 버스
가 뒹굴어진 위치를 보고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만약
에 버스가 바위벽에 좀 더 세게 부딪혀 그 반동으로 한번만 더 뒹굴었
다면 버스 승객중 누구 한 사람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

문이었다. 버스가 드러누운 갓길 바깥쪽이 아득한 낭떠러지였던 것이
다.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는데 같은 회사 소속의 강릉행버스가
와서 그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왔고 버스회사의 사고경위와 뒷수습도
알아볼 사이도 없이 우리는 다시 속초행 시외버스를 타고 행사 십여
분 전 아슬아슬하게 행사장에 도착해서 그 행사는 아무 차질없이 예
정대로 성황리에 치뤄졌다.
이십여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따금 그때 깨어진 버스 뒤 유리창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와 대책없이 눈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쏟아지는 눈을
백발이 성성한 성긴 머리칼에 그대로 맞으며 서 있던 두분 선생님과,
죄송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그 옆에 서 있던 이은자씨와 필자의 모습
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릴 때가 있다. 이원섭선생님은 어떤 의미
에서 설악문우회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하셨던 분이다. 이원수
선생님은 이미 타계하셨고 이원섭선생님은 이러저러한 핑계로 찾아
뵌지 오래지만 이은자씨와는 지금도 만나면 가끔 그때의 참담하고 가
슴 졸였던 일들을 회상하기도 한다.
필자는 1978년 직장 관계로 속초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고향은
아니지만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인구 5만여의 소박한 속초에 정
이 들었다. 그 곳에서 사랑도 했고 결혼도 했다. 시영주택일 망정 대
지 70여평의 집도 장만했다. 집의 정원에는 복숭아와 배나무를 심고
잔디도 가꾸고 꽃나무도 심었다. 현관 앞에는 지지대를 만들고 등나
무도 심었다. 늦은 4월에 피는 포도송이 같은 보라색 등나무 꽃과 여
름의 시원한 그늘 속에 내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큰 아이 혜연이와 둘째인 형구가 1973년 74년 연년생으로 그 집에서
출생했다. 순백색의 스피츠 한 마리도 키웠다. 집사람은 28집에서 잠
깐 이야기를 내비쳤던 내 평생의 채권자이다. 필자가 갑자기 속초에
서 김해로 전근이 되었을 때 돈 2만원을 빌렸던 동인중 한 사람이었
으나 설악문우회 발기 멤버는 아니다. 설악문우회 초창기에 회원을
더 늘릴 필요가 절실했었다. 그래야만 자질 있는 동인을 발굴 할 수
있고 동인지 발행기금의 부담도 덜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동
인을 결성할 때처럼 학교에서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제자들의 명단을
윤홍렬 선배님으로부터 넘겨 받았는데 그 명단중에 지금의 집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속초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북쪽으로 가면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
리라는 곳이 있다. 아야진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명태와 오징어를
잡는 작은 포구로 전형적인 어촌인데 이곳 아야진 국민학교에 집사람
이 재직하고 있었다. 회원 가입을 위해 여러번 성가실 정도로 전화를
했다. 회원 가입을 위한 전화는 동인 결성 당시 다른 회원들에게도 집
요하도록 했고 집사람에게 한 전화도 그 연장에 다름 없었다. 오직 문
학에 자질 있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가입 시켜 동인회를 튼튼히
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이었다.
당시 설악문우회가 계기가 되어서 결혼을 한 사람으로는 필자 말고
또 한 사람 이성선형이 있다. 이성선형은 속초고등학교를 거쳐 고려
대학교 농대를 졸업했다. 농대에 입학한 것은 순전히 부모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전공을
살려 잠깐 속초시의 농촌지도직 공무원으로 있었고 그무렵이 우리가
문우회를 결성하기 위해 만났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성선형
의 시(詩)는 문우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상당한 문학적 수업이 있었
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어서 이미 그의 습작 시(詩)는 한 사람의 시인
으로써 풍부한 감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문우회 회원의 누
구보다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주목
을 받았다. 그러한 주목은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한양대학교 교
수로 재직하던 문학평론가 윤재근씨가 주간으로 있던 <문화비평>이
라는 계간지에 게재된 4편(?)의 시(詩)작품이 그것이다. 이 시들은
당시 서울의 중앙문단에 상당한 신선감을 던졌던 것으로 그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이원섭선생
님의 추천으로 당당하게 중앙문단에 등단하는 설악문우회 회원의 첫
번째 주자가 되었다.(김종영씨가 조선일보 현상모집에 동시가 당선되
었으나 당시 문단에서는 현상모집 당선을 1회 추천으로만 인정, 다시
한번 추천을 받아야만 등단으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등단과 함께 사
소한 일련의 오해들이 후일 그가 설악문우회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
다.
이성선형이 부인 최영숙여사와 만나 고운 인연을 맺게된 것은 같은

영랑국민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아동문학의 김종영씨 소개로 비롯되
어졌다. 이성선형과 김종영씨 두 사람은 같은 설악문우회 회원이기
이전에 속초고등학교 선 후배 관계였지만 설악문우회 회원으로써 만
남이 더 구체적인 사이로 발전했다는 생각이다. 당시 회장을 맡으셨
던 윤홍렬선배님과 박명자씨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미혼으로 이십대
초반과 중반인 회원도 있었으나 필자와 최명길 이성선형은 모두 삼십
대인 설흔살 전후의 나이였다.
속초가 전국적으로 알려진것은 순전히 오징어와 명태와 설악산 때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속초와 설악산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된 하나
의 작은 계기가 1969년 겨울에 있었다. 불행히도 설악산에서 등반훈
련을 하던 산악인 11명이 폭설로 눈사태가 나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었다.
정말 그해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그해 속
초지역의 폭설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1969년 2월 21일의 공식
적인 적설 기록은 1미터 23.8센치미터였다. 이 기록은 지금의 속초시
청 뒷 마당에 있던 백엽상 주위에 쌓였던 눈의 깊이였다. 당시 필자가
중앙관상대 속초출장소 기상기원보라는 직책으로 미지의 땅 속초에
와서 겨우 2개월 25일째 근무하던 날 관측한 기록이다. 지금도 그 당
시의 폭설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기상대 사무실을 속초시청 2층
수산과와 같이 쓰고 있었는데 매 30분마다 밖으로 나가 눈속을 엉금
엉금 기어가서 눈의 깊이를 관측하고 SSB라는 무전기로 중앙관상대
를 호출 관측한 자료를 송신했다. 이나마 나중에는 전기가 끊겨 관측
한 것을 야장에 기록만 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전화는 그 이전에 일
찌감치 불통되었고 속초시내에서 외부로의 통신수단은 오직 경찰서
와 우리(관상대)의 무전시설뿐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발전기
를 가동시켰으나 그것도 이내 기름이 떨어져 중단되었다. 당시의 공
식적인 적설관측 기록은 앞서 언급햇듯이 필자가 관측한 1미터 23.8
센치미터였지만 설악산의 경우는 골짜기에 따라 3에서 8미터의 눈이
쌓였다고 한다. 밤낮으로 영랑동의 등대에서 울리던 무적소리와 하늘
가득히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을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산안인들이 설치하고 잠을 자던 텐트가 밤사이 눈사태를 만나 눈
속에 묻힌 사고는 적설의 최고기록을 관측했던 2월 21일보다 며칠 전
에 발생했으나 내리는 폭설 때문에 구조대가 사고현장에 도저히 접근
할 수가 없어서 오로지 내리는 눈이 멎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는 사이 이 사고소식은 속초발 기사로 전국각지에 보도되었다. 당시
에 활약했던 속초주재의 중앙지 기자로는 현재 속초시의 민선2기 시
장을 연임하면서 활발한 시정을 펼치고 있는 동문선(조선일보) 시장
님과 최용문(서울신문) 장창영(중앙일보)등 제씨였다. 이분들은 설악
문우회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호의를 보여주어 지방주재기자로 한
계도 있었으나 단신의 짧은 기사일망정 가끔 설악문우회의 활동을 송
고하여 신문의 지방판에 나기도 해서 회원들을 고무시켜주기도 했다.
바로 이 무렵부터가 수복지구로 우리의 행정력이 미칠수 있는 최북단
의 작은 도시 속초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