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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권정남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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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숙자
댓글 6건 조회 4,381회 작성일 09-10-2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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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나무, 열반에 들다  
                
                            
여행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 지구상에 존재 하고 있던 물상들이 소멸되어 가는 모습을 종종 볼 때가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마다 슬프기보다는 숭엄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순간의 빛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아침이슬이나 무지개도 그렇고 저녁노을의 장엄함은 소멸되기 직전, 그 절정이 눈부시다. 어쩌면 사라지는 것은 영원과도 통하는지도 모른다. 곡식을 거둔 텅 빈 들판이나 인류를 위해 한 생애를 바치고 떠나는 성자의 뒷모습이나 몇 백 년 동안 지상에 버텨오던 오래된 나무가 그 수명을 다 했을 때의 그 장엄한 모습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곤 한다.
맑은 하늘과 푸른 계곡물이 잘 어우러진 오대산 전나무 숲엘 갔었다. 말로만 듣던 전나무 숲은 그야말로 대자연이 그려 놓은 멋진 한 폭의 수채화였다. 구척장신의 미끈한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 양옆으로 줄서 있는 나무들이 흡사 푸른 제복에 금단추를 달고 행진하는 사관생도들 같았다. 쳐다보는 순간 숨이 막혀 왔다. 눈부신 젊음, 멋진 남의 남자를 훔쳐 본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늦가을 햇살이 숲 사이로 빠르게 빗금 치고 있고 뾰족뾰족한 전나무 이파리가 파란 허공에 바늘 침을 놓고 있었다.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함께 웃고 떠들던 일행 중의 한명이 잘생긴 전나무를 보니 전나무를 닮았던 첫사랑 남자가 생각난다고 했다. 왜 그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잘 생기고 멋졌지만 결혼상대로는 부담스러웠노라고 했다. 성악을 전공했던 그가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멋진 나무 한 그루 같다는 생각을 늘 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유학을 떠났고 그 후론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녀의 가슴 아린 첫사랑 얘기와 저마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 얘기로 수다를 떨며 우리는 늦가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다가 보니 눈앞에 거대한 전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나무 허리에는 커다란 딱따구리 집이 캄캄한 우물처럼 패어져있고 나무 밑 둥은 뚝 부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쓰러진 장신(長身)의 전나무, 흡사 오대산 정상에서 누군가가 그리워 평생을 울고 서있던 거대한 전신주가 쓰러져 있는 것 같다. 침묵하고 누워있는 거구의 주검 옆에 누군가 나무로 된 묘비명을 세워 놓았다. ‘이 전나무는 2006년, 10월 강풍에 쓰러진 오대산 전나무 숲의 최고령 전나무입니다.’ 하고 기록 되어있었다. 삼백 칠십 년 동안 월정사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최고령 전나무가 강풍 때문에 수명을 다 한 것이다. 갑자기 숙연해졌다. 삼백 칠십 여 년 동안 숲을 지켜온 거구의 전나무라! 그 전나무가 열반에 들던 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풍때문에 천지(天地)가 개벽하는 것 같았으리라. 전신으로 강풍을 버티다가 끝내 몸을 내줘버린 전나무, 그날 쓰러지던 모습 그대로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있던 이파리들과 나뭇가지들이 오체투지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쓰러진 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텅 빈 긴 터널 같기도 하고 캄캄한 동굴 같기도 했으며, 숨바꼭질 하듯 다람쥐가 쉴 사이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삼백 칠십여 년 동안 속을 다 비워 내고 무량 세월을 견뎌낸 저 공허의 자리에 숨을 불어 넣으면 지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퉁소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질 것 같았다.
문득 한평생 자식들에게 고갱이 속까지 다 내주고 텅 빈 몸으로 임종을 맞이하는 세상 어미들 몸뚱어리 같았다. 수많은 날 자신을 위해 채우기보다는 자식들 앞에 내 주기에 바빴던 눈부신 모성이 긴 주검으로 누워있었다. 가을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시신을 염해주고 새들의 지저귐과 계곡물소리가 숭엄한 주검 앞에 명복을 빌어주는 것 같았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외모에서 그 품성이 우러나오는 법이다. 전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사철 푸르른 빛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가 하면 불의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주관이 뚜렷하고 자존심이 강한 카리스마 기질을 소유한 통치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숲을 지키고 섰는 고고한 귀족 같은 모습이 외모에서 풍겨 나오기도 하고 멋진 남성이듯 뭇 여성들의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하지 않는가, 삼백 칠십 여 년 동안 한 자리에서 비바람 맞으며 별 바라기를 하다가 오대산 전나무 군락지 그 배경의 중심에서 생을 마감 한 것이다. 마지막 열반의 순간 까지 사리(舍利)하나 조차 남기지 않은 채 무욕의 삶을 실천한 노스님 같은 모습이었다.
가을 햇살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누워있는 구척장신(九尺長身)의 전나무, 누워있는 그 자리가 적멸보궁(寂滅寶宮)이고 최고의 기도도량이리라. 한 평생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가는 내력을 생각 하며 천천히 단풍이 불을 뿜어내고 있는 전나무 숲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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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자님의 댓글

최숙자 작성일

  늦은 가을밤 바람소리에 뒤척이다 눈에 띈 신문 한장 <br />
열반에 든 나무들 숨소리가 나태한 저의 정신의 벽을 후려치네요 <br />
하여, 다시 붓자루를 집어듭니다 좋은글 너무 사랑스럽고 읽는 동안 <br />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산다는 의미를 돌아보기도 하고<br />
한마리 새가 되어 전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묵념에 잠기는<br />
마른 잎새들의 눈물을 만져 볼 수 있어서 행복 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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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만님의 댓글

김춘만 작성일

  수필을 쓰고 싶으시다더니 ... 그래요, 내년쯤엔 시인이 쓴 수필집 한권 만나볼 수 있길... 잘 -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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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남님의 댓글

권정남 작성일

  숙자님! 설악 신문에 실린 부끄러운 글을 게시판에 올려 주셨네요.  제 손을 떠난 글들을 읽어 보면 언제나 얼굴이 화끈 거려지네요. 근간에는 시에서 못다 쓴  늘 가슴 안에 모래처럼 서걱거리고 있던 이야기들을 자주 수필로 쓰고 싶어지데요. 그런  순간이 행복해지는 건 왜그런지 저도 모르겠네요. 시인이 외도를 하면 안되는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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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재순님의 댓글

채재순 작성일

  깊이가 느껴지는 글을 읽으며 행복했습니다.<br />
수필가들이 바짝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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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님의 댓글

지영희 작성일

  산책하고 온 기분입니다. <br />
그 곳의 전나무 산책길, 명상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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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선님의 댓글

최명선 작성일

  "열반의 순간 까지 사리(舍利)하나 조차 남기지 않은 채 무욕의 삶을 실천한 노스님 같은 모습"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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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지나간 어느 시간을 반추해 보며<br />
가슴에 첩첩 닿는 글,<br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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