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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춘 문에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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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정남
댓글 5건 조회 4,477회 작성일 13-01-2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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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이정훈씨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버지·아내에게 치여 바지저고리가 된 느낌
"이런 꼴 보려고 사나" 세상에 부대껴 힘들 때 무언가를 쓰고 싶어져

 

2013년도 신춘문예, 최고 화제의 인물은 아마도 시 부문에 당선된 이정훈(46) 씨가 될 것 같다. 강원도 평창군에서 보낸 이 씨의 투고작은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아버지, 가족의 애증을 간결하게 표현해 일찌감치 심사위원들에게 낙점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끝낸 후 당선자 통보를 하기 위한 전화통화에서 이 씨는 "20년차 화물트레일러 운전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해 자리에 있던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

평창군에서 다섯 번째로 경운기를 살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모두 서울에서도 보낸 이씨는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매달리느라 4학기 학점 '합계'가 2.0이 안 돼 학점미달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강원대에 다시 입학하여 졸업하고 선택한 직업은 화물트레일러 기사였다.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지만 굳이 그는 그 길을 택했다.

"학교 잘리고 구치소에 갔다 오며 근골노동에 대한 선망이 생겼어요. 잘 난 세상을 잘나게 움직이려는 경향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청년시절)는 학벌지상주의라든가 이런 게 싫어서 팔다리 움직여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동해 삼척과 담양 제천 영월의 공장단지에서 전국 각지 레미콘공장으로 시멘트를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다. 수하물 중 시멘트를 주로 옮기는 이유는 '노동의 현장'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란다. "몸보다는 노동여건이 열악한 점이 힘들어요. 20년째 운임비가 똑같은데, 이제는 화물차 번호판까지 3,000만원씩 거래돼서 3년 전에 화물차 회사에서 제 번호판을 강제로 떼어갔죠. 화물차는 제 소유인데 말이죠."

그가 시를 쓰게 된 건 40대에 접어들면서라고 했다.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가장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가슴 속은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넘지 못할 산 같은 존재였고, 집안의 헤게모니는 자식세대로 넘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가정의 주도권마저 부인에게로 기울었다.

"마흔 무렵이었는데, 잠이 안 오고 밥도 못 먹겠더라고요. 제 발로 정신과 상담을 하러 갔어요. 고해성사하듯 두 시간 떠들고 나니까 의사가 저에게 남아있는 게 뭔지 물어보더라고요. 40대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바지저고리가 된 느낌이 심했어요."

그때 우연히 듣게 된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강좌에서 고형렬 시인을 만나게 되면서, 이 씨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랬다. 그렇기에 그에게 창작은 일종의 힐링이었다. "현실에서 부딪히고 상처받고 깨진 마음을 그대로 적어보려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나오는 시는 보람이었고 기쁨이었죠."

주로 일하는 틈틈이, 트레일러와 식당에서 시를 썼지만 노동현장을 직접 담은 시는 거의 쓰지 않았다. 잘못 쓰면 선전문구처럼 읽히고, 잘 써봐야 80년대 민중시 아류처럼 보여서 피하고 싶었단다.

"저는 기쁘거나 슬플 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이런 꼴 보려고 사나?'할 때 뭘 쓰고 싶어져요(웃음). 세상에 부대끼면서 힘들면 힘들수록 옛날 살던 강가나 산골짜기, 나를 그렇게 예뻐해주던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골방 같은 데로 가고 싶죠.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 집을 허공에 짓는 거예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서 4년 전부터 신춘문예와 공모전에 투고를 시작했다. 노트북에 정리된 80여 편의 시는 고향과 가족에 관한 시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등단작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 씨의 시에서 아버지는 호랑이로 자주 비유된다.

작은 문예잡지 공모전 최종심에서 몇 번 고배를 마셨다는 그는 3년 전 한 지인으로부터 "당선됐다"는 장난전화를 받은 후부터 당선통보를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당선통보 전화통화에서도 "장난하지 말라"며 기자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씨는 "전화 끊고 나서 30분을 울었다"면서도 여전히 등단이 실감나지 않는 듯 인터뷰 당일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가족과 고향 말고 무엇을 더 쓸 수 있을지 고민"이라면서도 이씨에게 시 쓰기의치유효과는 탁월한 듯 보였다. 짐짓 명랑하게 과거 상처들을 고백하며 들뜬 이씨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신춘문예 수상소감, 미스코리아 수상소감처럼 써볼 게요."

 

[2013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당선소감


"세 번 도리질했는데… 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
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
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
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
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 놓으면
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
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
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
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
딱!
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
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
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2013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당선소감

 

이병국
△1980년 인천 강화군 출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인하대대학원 석사 수료(현대문학)


 

대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창이 나 있었습니다. 늘 한쪽 창의 불이 꺼져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했던 때가 있습니다. 어둔 방에 불을 켭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고 빈방에서 저와 아버지에 대한 시를 씁니다. 월미도 유람선에서 쓴 시를 교실 뒷벽에 붙여놓았던 고등학교 2학년에서 어느덧 미끄러져 서른을 훌쩍 넘겼습니다. 신문에 제가 쓴 시가 놓이게 된다니 제 마음에 창 하나가 밝게 빛나게 되네요.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번 생일이 1월 1일인데, 생일 선물을 너무 거창하게 받네요. 밖에 내놓은 아들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그 곁에 함께 하는 분당 아버지께도 감사드려요. 최원식 선생님, 김명인 선생님을 비롯한 인하대학교, 대학원 선생님들과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탁경순 선생님, 꼭 찾아뵐게요. 강영숙 선생님, 이름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금 옆에서 절 응원하고 같이 웃어주는 그녀, 고마워요.

 

그저 말 많은 선배에서 그래도 신춘문예 당선된 선배로 남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네요. ‘멋진수요일’, ‘청하’, ‘시선’. 대학 때 만난 학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숱한 세미나와 술자리들이 모두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곁을 함께 한 선후배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즐겁게 시, 쓰겠습니다.

 

 

 

심사평

 

장석주, 장석남 시인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좋은 시의 덕목으로 꼽을만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껍질을 깨라! 도약하는 힘을 보여라! 마치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 그렇듯이.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고, 사물의 새로움과 내면의 고매함을 융합하며 붉은 보석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발레리, 「석류들」) 상상력은 늘 그렇게 독자를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이모의 가까운 해변」「골목을 들어올리는 것들」「향리의 저녁 일지」「발의 원주율」「어제의 인사」「끌어안는 손」「오늘 너의 이름은 눈」「친구들」「가난한 오늘」「迷路庭園」「밀의 기원」「꽃 앞의 계절」 등을 최종심에서 읽었는데, 그것은 개성과 환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서 무르익어 스스로 내면을 깨고 터져 나오는 시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서정을 찾기 힘든 대신에 낯선 감각과 의도된 착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흐름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는 서너 편의 시를 손에 쥐고 오래 망설였다.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체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풂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싯구와 싯구 사이에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난한 오늘」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201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당선 소감]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찌개가 끓고 있는 밥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텅텅 비어 있던 배 속이 밥알 대신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차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가 있구나. 우습지만, 당선 연락을 받고 처음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달려와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금세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무엇을 써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시인이 된다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사이에 이토록 깊은 거리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간밤의 꿈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받아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가 시였을까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 텅 비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시 쓰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투고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방점이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놓으면 온다는 이치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길을 숙명이라 믿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게 써나가겠습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셨던 박주택 선생님,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의 길을 알려주셨던 정우영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와 확신을 주었던 이체, 강진, 동운. 주모동의 단테. 문예창작단의 선후배들. 당신들이 제게는 써야 하는 이유들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인 용준, 한상, 지홍, 경록, 정훈. 내일도 오늘처럼 끈끈하게 살아갑시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기 힘든, 하지만 언젠가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그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방황을, 성장과 배움을 당신을 통해 겪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나 자신보다 아껴주는 금희와 부모님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난 기분입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1989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재학 중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을 보며 새롭고 다양한 개성과 시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 가운데 이소연의 ‘활과 무사’ 외, 노정균의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 외,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 외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우선 언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그것을 삶의 지렛대로 끌고 가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소연은 ‘활과 무사’ ‘늑골이 빛나는 발레 교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감각적 투시, 대담한 언어 구사로 산뜻함을 드러내었고, 노정균은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와 ‘입양’을 통하여 우리말의 어미를 “…다.”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각운을 통하여 사유가 리듬을 불러오는 작법의 시도를 보여주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2013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쇼펜하우어 필경사 /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당선 소감(김지명)

 

꿈 높이 구두를 갈아 신은 아침 같았다. 불현듯 다가온 당신이 동굴 밖에 인형 하나를 그리며 소란했다. 당신의 소리 없는 노래를, 안무 없는 춤을, 감정 없는 사랑을, 동굴 속 어둠을 빌려 수없이 적었다. 당신과 내가 짝짝이 신발이란 걸 알아차린 어느 날, 당신은 떠났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호흡인 나날을 보냈다. 불안은 짐승 여럿이 사는 움막에서 동거했다. 침묵으로 수태 기간을 보내고 당신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날 알아볼 줄 알았다. 꿈 높이 구두로 능동의 영토에 첫 발자국을 만든다. 이제 또 다른 불안을 내 허파에 기른다.

 

모험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멀리 볼 수 있는 안목과 죽음을 담보로 시작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작정 시를 좋아하던 설렘을 어깨 힘줄로 길러 준 선목문학회, 에이스동인 혜경, 정현, 성진에게 고마운 마음 전한다. 끝으로 오랫동안 후견인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딸에게 기나긴 고마움을 표한다.

 

◇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논리논술 강사

 

 

 

 

◆심사평-해마다 시 쓰기 열정 많아 향후 발전 가능성에 무게

 

예심을 통과한 열네 분의 작품들을 선자들이 숙독하고 논의했으나, 아쉽게도 올해엔 한눈에 띄는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기본기는 갖췄으나, 그 ‘너머’에 이르도록 끌고 가거나 들어 올리는 힘을 내재한 시편을 찾아내기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한 추동력이란 삶을 바라보는 서정적 진정성의 관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언어 자체가 직조해내는 미묘한 ‘아우라’를 통해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네 분의 작품들이 집중 숙고되었는데, 김지명의 ‘쇼펜하우어 필경사’, 지연식의 ‘가금의 서’, 박은선의 ‘흔적 하나’, 이도은의 ‘엄마는 외계인’이 그것들이다. ‘가금의 서’는 가장 활달한 지적 실험정신과 개성 있는 텍스트적 상상력을 보여주어 주목되었는데, 과유불급이랄까 시에 녹아들지 못한 생경한 언술이나 비유들이 흠결로 드러나 완성도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흔적 하나’는 창문 틈에 죽은 곤충의 시체를 화자로 한 묘사적 상상력이 진정성에 닿아있어 끝까지 고려되었지만, 군더더기라 할 언술들이 많아 정련미가 부족했다. ‘엄마는 외계인’은 동화적 상상력이라 할 나름의 발성법을 갖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보였으나, 좀 더 웅숭깊은 시선과 시적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기를 바란다.

고심 끝에 ‘당선작 없음’까지 고려되었으나, 해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운 투고자들의 고뇌와 절망을 감안하여 향후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필경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역시 수사적 완성도의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앞으로 각고의 정진을 통해 문체를 획득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런 약점을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하는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특유의 힘 있는 시적 언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심사위원 본심: 엄원태`조용미(시인), 예심: 안상학`김이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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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네팔상회 / 정와연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2013 신춘문예 - 시 당선소감]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아"
꽁꽁 언 날에 훈훈한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마음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몸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설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지려고 그랬을까요.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젖은 땅에 달라붙은 낙엽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빙판길에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았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날마다 감탄하며 살아간다는 어느 노인의 말이 실감 나는 한 해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급변해 요동을 쳤습니다.

먼저 부산일보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갈팡질팡하는 길목에 주단을 깔아 주셨습니다. 그 길로 선뜻 들어서기가 왠지 두렵지만 들어서렵니다. 주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더 높은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열심히 찾아가겠습니다.

큰 도움 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교수님, 김양호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전기철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마경덕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고맙습니다. 문우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묵묵히 지켜봐 준 존경하는 남편 김종갑 씨, 시 쓰는 엄마가 멋지고 자랑스럽다는 세 딸 명륜 소나 안지, 아들 재환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이 무한한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정와연(본명 정길례)/1947년 전남 화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3 신춘문예 - 시 심사평] "세상의 관절염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세상 사이에 관절염이 심한 시대에는 통증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언어의 직녀나 기존의 형식을 개성적인 칼로 쳐내는 새로운 검객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력과 시세계가 각각 다른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는 직녀나 검객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공의 깊이였다. 안타깝게도 용감하게 수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 검을 날리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축에도 문장과 문장을 뛰어넘는 검법에 개연성이 부족했다.

'맥문동 재봉골목'은 예쁘고 앙증맞은 묘사의 보폭이 너무 조심스러워 골목을 벗어나 골목 밖의 세계를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스카라인'은 대상을 도형화하는 섬세한 솜씨에 깊이 치중하여 도형을 그리는 이유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나 언어의 숙련을 제고해 봐야 할 것 같다. 당선작으로 합의에 이른 '네팔상회'는 영리한 작품이다. 관계의 관절염을 앓는 시대를 인식하는 깊이와 언어를 직조하는 내공,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점을 찍는 노련함은 유려하게 흘러 과장되지 않게 세상의 관절염을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로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 영리함에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직조법을 거듭 재탐색할 것이라는 자세도 포함해 주기로 한다. [심사위원 오탁번·강은교·조말선]

 

 

 

[201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녹번동 / 이해존

 

 


 

 

 

 

[201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시 당선소감 -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사무실 마감 일 때문에 정신없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였습니다. 연말연시를 생략하고 2월의 어느 일상으로 앞질러가고 싶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아 당선 전화를 받고난 후, 누군가 잔인한 위로의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습니다.

영화 <폴락>에서 피카소는 ‘질서’를, 폴락은 ‘무질서’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성공을 거둘수록 행복해지지만, 폴락은 그 반대가 됩니다. 성공할수록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겠습니다. 최종심에서의 수많은 고배가 모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가르침이 되어주시는, 언제나 현역이신 정진규 선생님그리고 이승훈, 김소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분화구 절벽에 둥지를 틀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태생의 시천동인들, 전형철, 윤성택, 안시아, 최치언, 천서봉, 박성현, 서동균 시인, 김솔 소설가, 고영, 박후기 선배님, 가까이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최희강 시인 그리고 등단을 손꼽아 기다려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긴 어둠에서 불을 밝혀 주신 황현산, 박주택 심사위원님과 경향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굳은 결의는 변명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냥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 이해존

△1970년 충남 공주생 △여러 출판사의 편집자 생활을 거쳐 현재 월간 ‘현대시학’ 편집장
 

 

[201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시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

문학평론가 황현산·시인 박주택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 외 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 외 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 외 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201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섬,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선소감

 

종종,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견디고 있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즐거운 때, 도저히 그 속에 섞여들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나는 줄곧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희박하지만 여일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애초부터 빈약하고 어수룩한 내 글이 삶의 방편이 되리라는 위험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쓴다는 것'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2010년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다른 쪽으로 난 두 갈래 길을 합쳐 하나로 만드는 무모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기를 게을리 했다.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쓰기를 소홀히 했다. 앞서 간 이들의 빼어난 문장을 교묘하게 훔쳐와 내 것인 양 우쭐대기도 했다. 이 과분한 자리를 빌려 깊이깊이 고개 숙여 반성한다. 앞으로 다가올 새날은, 나만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 살뜰한 문장들이 정수리 위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날들이길 바라본다.

'시'라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철부지를 이끌어주신 정일근 교수님, 글 쓰며 동고동락한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친구들, 맹랑한 후배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경남신문사 식구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애틋한 나의 가족과 친지들,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서른 전에 등단하겠다'는 만용을 패기로 여겨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문장 겨우 쓰고 쉽게 두 문장을 지우는, 스스로에게 야박하고 모진 시인이 되겠다.

▶약력 198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사범대학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재학. 현재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

 

 

심사평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상식으로 굳어져 최초의 경이를 상실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삶과 사물에 대한 실감을 끌어올 수 있을까.

예심과 본심을 겸한 1차 심사를 거쳐 오른 작품들은 시 장르 고유의 구심점을 향한 몰입과 그로부터의 탈주로 크게 구별되었다. 서정성에 충실하였으나 새로운 모험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 그리고 과잉된 탈주의지로 설명적인 산문투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조립은 잘 되었으나 맥이 빠져 시적 울림에 실패한 작품들 또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박다닌, 최희명, 김유경 세 사람의 응모작이다. 우선, 박다닌은 소외된 삶을 조명하는 따듯한 시선에 호감이 갔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최희명과 김유경의 작품을 들고 팽팽한 긴장 속에 심사를 이어갔다. 최희명은 '고려인 집성촌'이라는 무거운 오브제를 절제된 감각으로 구조화하는 솜씨가 녹록잖았다. 견고한 형식미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형식미가 시상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

 

 

 

[2013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선희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 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당선소감]

 

이젠 마음껏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것

 

시는 내게 순간의 진실을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것. 나는 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시는 내 삶을 맑히는 거름망이고 어지러운 내 삶의 발자국이다.

 

그동안 참 바보같이 살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두고 혼자서 멀리 돌아서 가곤 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고 더러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시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좀 이해해 줄까? 당선 소식을 듣고 무슨 면책특권을 얻은 것 같다.

 

이제 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시인이니까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안도감. 제일 먼저 남편에게 당선 소식을 전한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참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다음에는 시 때려치우라고 구박한 시인 유홍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좋은 시 써서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로모 친구들한테도 참 고맙다. 끝으로 이렇게 당선소감을 쓸 기회를 주신 강원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에 자꾸 두들겨 맞다 보니 눈은 가자미눈이 되고 목은 자라목이 되는 중이었는데 “옴매, 기 살아!” 이젠 짧은 목 길게 뽑아 하늘도 맘껏 쳐다볼 수 있을 것 같다.

 

△ 정선희(44)

△ 경남 진주 生

△ 논술학원 운영

 

 

 

[심사평]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이영춘 시인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 언어감각 놀라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20명 100여편이었다. 그중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이주상의 `풍금소리'와 박명삼의 `두타연', 정선희의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이었다.

 

`풍금소리'는 전통적인 삶을 소재로 묘사는 뛰어났으나 신선한 현대적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두타연'은 주제가 선명하고 묘사는 뛰어났으나 참신함과 현대성이 약했고, 추상적 어휘들이 장애 요소가 됐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은 흔한 소재인 `구름'을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돋보였다. 시의 생명인 리듬감도 잘 살려낸 것은 물론 개성적 발상이 놀랍고, 아이러니와 위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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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애님의 댓글

정영애 작성일

좋은 자료 정말 고맙습니다.<br />지난해 열정도 없이 편수만 채우려<br />후다닥 갈뫼 작품내고는 거짓말처럼 시를 잊고 지냈습니다.<br />습관적인 두통이 심하여 수시로 누워있던 날과 <br />그래서 게으르게 지낸 몇 달이 부끄럽습니다.<br />누더기가 되어 느슨해진 정신을 단단히 다시 잡아 훑어매야겠습니다.<br />위의 글들을 읽으니 정신이 번쩍 납니다.<br />그런데 너무 멀리 가버린 시를 어떻게 쫓아가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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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만님의 댓글

김춘만 작성일

자료 올려주시느라고 애많이 썼습니다. 자주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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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숙님의 댓글

김향숙 작성일

신춘문예..... 참 많이도 설레며 짝사랑하던 젊은 날들이 생각납니다.<br />그리고 여전히도 가슴 싸아해오는 말이기도 합니다.<br />당선소감과 심사평까지 잘 읽었습니다.<br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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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정님의 댓글

송현정 작성일

이렇게 많은자료를 올려주시는 권시인님 참으로 대단하시고 존경합니다<br />참으로 부끄러운 제 글들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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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숙님의 댓글

서미숙 작성일

휴~너무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