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_title03.gif

속초 문인 동인 "갈뫼" 문학기행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효선
댓글 3건 조회 2,276회 작성일 13-09-02 18:41

본문

속초에 대표적인 시인과 수필 소설가로 구성된 문인 동인 "갈뫼" 멤버들이 가을이 문턱을 넘는 아름다운 날에 강원도내 문학의 정취를 느낄 수있는 인제의 박인환 시인 문화관과 양구에 있는 박수근 화백의 기념관을 기행하기로 하였다.

8월31일 동인 28명은 행장을 꾸려 울산바위를 등에지고 기념촬영을 시작으로 출발하였다

아야진 초교 박대성 교감 선생님의 사회로 이동하는 차내에서 문학에 대한 思考와 재치있는 말솜씨로 문학기행을 하는 동인들의 감성을 불러 일으켜 의욕을 고취시켜 주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인제에 있는 산촌 박물관과 인접해 있는 박인환 시인 문화관이다.

산촌박물관에선 당시 산촌 사람들의 척박한 생활상과 먹거리를 엿보았고 박인환 시인님의 시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박인환 시인은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1939년 서울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41년 자퇴하고, 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45년 학업을 중단했다. 그 뒤 상경하여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하며 김광균과 친교를 맺었다.

자유신문과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였고, 49년 김병욱 김경린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을 펴냈다.

50년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들과 함께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55년 그의 작품이 망라된 "박인환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혔다. 작고하기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들에 널리 불려지고 있다. 76년에  장남 박세형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당시 시대의 아픔을 문학으로 토로하고 지성인으로 방황하던 천재 시인 박인환은(1926.8.15~1956.3.20) "목마와 숙녀" 외 다수의 시작을 남기고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갔지만 그의 시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 세대 뿐 아니라 후대에도 그의 시적 사상은 면면이 이어질 것이다.

박인환 시인 문화관을 나와 준비하여 온 시합평을 할 수있는 양구에 있는 두타연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뱅이골 공원에서 잠시 사색에 잠겨 흐르는 구름을 세어 보고 점심을 예약한 청수골 쉼터로 옮겨 산속에서만 맛볼수 있는 산채비빔밥으로 배를 든든이 채웠다.

목적지를 삼고 가는 두타연은 민간인 출입통제선 북방인 방산면 건솔리 수입천의 지류에 있는데 동면 비아리와 사태리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박대성 선생님이 미리 출입 신청을 하고 예약을 해놓은 관계로 별다른 절차없이 동인들이 편안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두타연은 유수량은 많지 않으나 주위의 산세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오염되지 않아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국내 최대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높이 10m, 폭 60여m의 계곡물이 한곳에 모여 떨어지는 두타폭포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하고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하여 시계를 흐리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바라볼 땐 쾌청한 날씨 덕에 장엄한 광경을 고스란이 볼 수 있었다.

이 폭포 바로 아래에 있는 두타연은 20m의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 하고 동쪽 암벽에는 3평 정도의 굴이 있어 바닥에는 머리빗과 말(馬)구박이 반석 위에 찍혀있다고 한다
1천년 전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데서 연유되어 두타연으로 부르고 있다.

동인들이 두타연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여기저기서 사진을 촬영하고 잠시 걸었던 피로를 두타연 맑은 물에 씻어 낸 후 두타연 옆 천혜의 자연 학습장에서 준비해간 시합평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이지연 시인이 준비한 "어린 고양이" "낙엽" 을 낭송하고 시에 대한 합평이 있었고 이어 정명숙 시인의 자작시 "위험한 비행" "기도"  풀의 비명"을 낭송하고 애정어린 합평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노금희님이 수필 "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를 소개하고 합평을 받았다. 시합평을 하는 동안 관객 두분이 진지한 모습으로 시합평에 참여하여 의미를 더하여 보람이 있었다.

두타연에서 시합평을 마친 후 마지막 기행지인 박수근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박수근 (1914.2.2~1965.5.6)화백은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났을 당시 넉넉했던 집안 형편은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갈 즈음 어려워졌고 그 이후로는 계속 가난으로 인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고자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6·25동란 후 박수근은 한동안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후 국전에 수 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이 때부터 가난한 이웃을 소재로 하여 평면적이고 독특한 질감을 가지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화가로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7년 심혈을 기울여 그린 대작 <세 여인>이 국전에서 낙선한 것에 크게 낙심한 나머지 과음을 계속하여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간경화도 심해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 작업을 해갔으나 건강이 더욱 나빠져 196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백이였다

박수근 화백이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는 고백처럼 그의 모든 그림은 소박하다고 정직하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의 서민적인 생각이 그림속에 묻혀 있다가 근 50년 이후에 그림을 감상하는 내 마음속에도 당시의 서민들의 삶에 애환이 전해져 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문학기행을 경험하면서 선진들의 진솔하고도 순박한 그들의 문학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또다른 후대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 가슴에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갈뫼 동인들과 하루사이에 겪은 소중한 경험이 또다른 세계로의 시각을 세우게 되었고 잠재된 내면에 도전의 욕망이 터를 잡게 되어 기쁘다.

갈뫼 동인들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권정남님의 댓글

권정남 작성일

이번 문학기행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기행 수필로 잘 써주셨네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즐겁고 행복했던 그날 기행이 다시 살아나고 정리 되는 듯하네요. 특히 이번 문학기행에 참여 하지 못했던 회원님들도 현장에서 함께 한 느낌이들도록  자세히 써 주셨어요. 최효선 장로님 바쁘신가운데 월례 모임에 자주 나오시고 문학기행에 참여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한 가을 되세요

profile_image

김춘만님의 댓글

김춘만 작성일

성지순례기행문을 쓰신분답게 구체적으로 잘 기록해 주셨군요. 이번 여정을 계기로 갈뫼기행에도 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바쁘신가운데도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rofile_image

최명선님의 댓글

최명선 작성일

머리로만 느꼈던 사실들을 가슴으로 느껴보던 좋은 시간 되었었지요.<br />올려주신 글을 읽으니 다시 새롭습니다.<br />좋은 글 고맙습니다. 월례회 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