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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문 /최은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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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명선
댓글 1건 조회 4,210회 작성일 13-07-28 17:19

본문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시산맥》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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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 1967년 대전 출생. 2007년《월간문학》신인상 당선.

2007년 제9회 수주문학상대상. 2012년 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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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남님의 댓글

권정남 작성일

<p>어쩌면 이런시를 쓸까?&nbsp; 시인은 보이지않는 것을 봐야하고 들리지않는 소리도 들어야&nbsp; 쿵! 하고 울림이 오는 시를 쓰겠지요</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