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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신춘문예 당선 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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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정남
댓글 0건 조회 4,305회 작성일 14-02-14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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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방장은 쓴다/이영재

 

 

 주방장은 쓴다

-이영재

 

 

   눈은 이미 내렸다 새가 날아온다 그리고 새는 날아간다 이곳에서 시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

 

 

   세상엔 먹을 것이 참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 생각까지 했을까

 

 

   허기가 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녀석은 문을 두드릴 줄 안다는 것 요리는 곧 완성 된다 완성되기 전에 이 깨끗한 접시를

쓰레기통으로 던질 수 있을까

 

   내 몸에겐 건강한 학대가 필요하고, 다행히 이곳은 학대에 매우 알맞다 떠나는 새조차 둥지를 훌륭하게 지을 줄 안다

 

 

   시를 포기하고 시인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더 멋진 건, 죽어서 시인이 되는 일
   거짓이다 누구도 시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선 안 된다 담배를 문 주방장만이 오래도록 써왔을 뿐이다

 

 

   휘파람이 휘파람을 불 생각이 없듯 우체통은 붉을 필요가 없다 다행히 라면집은 가끔만 문을 연다

 

 

   요리는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 깨끗한 접시를 온전하게 버리기 위해

 

 

   철새가 돌아올 둥지를 삶아 먹고 이사를 할 것이다 겨울과 더 가까운 곳에 주방을 열고 문을 닫을 것이다 어디서든, 시

작하지 않기 위해

 

 

   거짓인 명제가 가득한 접시 위에만 쓴다

 

 

 【이영재 시인 약력】

 

*1986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예술대학 졸업.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갈라진 교육/심지현

 라진 교육

-

 

 

   오빠 내가 화장실 가다가 들었거든내일 아줌마가 우릴 갖다 버릴 거래그 전에 아줌마를 찢어발기자우리가 죽인

끼들 옆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토끼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빠의 즐거움이잖아.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 여긴 아줌마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이었어

대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너 시들지 않는 새엄마를 시기하고 있구나아버지가 무능해서 고생하는 예쁜 나의 새엄마. 그녀가 나를 버려도 괜찮

개처럼 기어가서 굶겠다고 말하면 그만인걸그게 안 먹히면 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잠 설치는

이를 달래는 척 밤마다 날 찾을지도 몰라자꾸 커지는 를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아이가 되겠지못생긴 엄마가

나면서 주고 간 선물예쁜 우리 새엄마!


 

【심지현 시인 약력】

 

*1990년 경남 김해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오리시계/이서빈

 오리시계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

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이서빈 시인 약력】

 

*1961년 경북 영주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멉.

 

|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알/박세미

-박세미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던 개가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처럼
거기엔 무단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당당했지
버려진 적 없으니까
어느 날 거기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누가 널 낳았니
이름이 없어 좋겠다
털이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니까
집을 나오는 길
두 발이 섞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얼굴
머리카락이 엉키고
몸의 구분이 모호해질수록
흩어져 있던 영혼조각들이 뭉쳐질수록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로 완성되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분류하지 않는 곳
껍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다
자, 이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지
바깥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것
욕조 안으로 들어가면
반쯤 잠기는 몸
최초의 기분은 여기에 있지
출렁인다
다리 하나가 기어나간다

 

  

【박세미 시인 약력】

 

*1987년 서울 출생.

*강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

|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발레리나/최현우

 발레리나

-최현우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발레의 점프 동작

 

 

 

【최현우 시인 약력】

 

 

 

*1989년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문창과 4학년 재학 중

 201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단단한 물방울/김유진

 

단단한 물방울

 -김유진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밤을 깐다
복도가 나오고 수 많은 문이 보인다
벌레는 아주 가끔씩 빛처럼 부서졌다
그때 흔들린 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 뉴스는 보았다
나는 물을 마신다 물이 흩어진다 수 많은 문이 열린다
흩어진 수 많은 껍질을 문이라 할 수 있을까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윗부분 중간을 칼집 내어 잡아 당긴다
형광등은 자주 깜박거렸다
천장 한쪽 구석에 거미줄이 불빛에 걸려 움찔하면
아무도 없을 때 더 시끄러워지는 나는
그동안 꾼 꿈과 마주치고 다양해진다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다시 한 곳에 모인다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거울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본다
웃음이 길게 늘어지며 읽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지나간다
냉장고에 붙여 놓은 명언들이 노랗게 바래지고 있다
자주 삶은 베갯닛과 닮았다
인쇄해두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여행지를 자꾸 머리 속에서 내몬다
종이를 본다 얼룩진 곳이 단단하다

창문 위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고
방에서 물방울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김유진 시인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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